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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약자끼리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는 현실
김성훈 2015-03-09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과 신연식 감독의 대립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하 <개훔방>) 논란이 다시 불붙었다. 현재 극장에 걸려 있는 <조류인간>을 연출한 신연식 감독이 지난 3월2일 보낸 보도메일 한통이 불씨였다. ‘<개훔방>을 비롯한 대한민국 영화 관계자 분들께 전합니다’라는 제목의 메일에 따르면, ‘2월26일 개봉한 <조류인간>은 3월2일 현재 22개의 예술•독립영화전용관에서 개봉하고 있다. 하지만 개봉 첫날 몇몇 극장에서는 오전 10시와 밤 10시40분대라는 현실적으로 관람이 힘든 시간대에 상영 중이었다. 예술•독립영화전용관에 재개봉한 <개훔방>이 좋은 시간대에 편성된 것을 보며 좌절감을 느꼈다. 아이러니하게도 <개훔방>의 시나리오를 직접 썼기에 당황스러운 기분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는 게 메일의 주요 내용이었다.

익히 알려진 대로, 지난해 12월31일 개봉한 <개훔방>은 개봉 2주 만에 상영관 수가 10개 남짓으로 줄었다. 영화를 제작한 삼거리픽쳐스 엄용훈 대표가 “정상 수준의 1/3 정도 개봉관밖에 확보하지 못했고, 그나마 받은 상영관은 조조와 심야시간대가 주를 이루는 안타까운 상황에서 개봉했다”고 멀티플렉스의 불공정한 거래를 문제 삼으면서 한동안 논란이 된 바 있다. 영화는 1월29일 IPTV, VOD 서비스 등 2차 부가판권 시장에 풀렸다가 개봉 40여일 만인 2월12일 CGV아트하우스를 비롯해 총 44개관에서 재개봉할 수 있었다.

<조류인간>

신연식 감독이 메일을 통해 <개훔방>의 제작사와 감독 그리고 배급사 리틀빅픽쳐스에 요구한 건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상업영화를 예술•독립영화전용관에서 재개봉하는 행위를 중단해달라는 것이다. 신 감독은 “예술•독립영화전용관은 영화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데 가치를 두고 만들어진 극장이다. 상영관 수가 그리 많지 않아 <조류인간> 같은 독립영화는 아트하우스 체인 5개관을 배정받는 것도 어려운데 상업영화인 <개훔방>이 15개 이상 상영관을 배정받는 건 독립 영화계에 엄청난 폭력”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것은 고등학생이 대학생에게 폭행을 당했다가 억울해하면서 유치원 놀이터에 와서 폭력을 행사하는 행위”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요구는 <개훔방>의 각본 크레딧에서 김성호 감독의 이름을 빼달라는 것이었다. “<개훔방> 시나리오는 4, 5년 전 내가 쓴 것이다. 제작사와 이견이 생겨 작품에서 하차한 뒤, 촬영 직전 김성호 감독이 찾아와 내가 쓴 시나리오를 거의 고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감독이 각본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고, 여러 인터뷰를 통해 원작에 없던 설정들이 자신의 아이디어인 것처럼 얘기했다”는 게 그 이유다. 신연식 감독은 “상업영화가 어떠한 이유에서든 예술•독립영화전용관에서 재개봉된다면, 이후에 극장 개봉을 마친 상업영화를 IPTV 매출을 올리기 위해 독립영화관에서 재개봉시키는 선례를 남길 수 있다”면서 “<개훔방>은 개봉 이후 대기업 투자배급사의 독과점 문제를 지적했다. 하지만 영화계 내부에 만연한 부조리를 스스로 돌아보지 않고 대기업 투자배급사의 부조리만 지적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영화인 모두 영화계 내부의 문제를 되돌아봤으면 좋겠다”고 보도메일을 발송한 이유를 설명했다.

신연식 감독의 메일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가자 <개훔방>은 폭풍우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순풍에 돛다는가 싶더니 다시 역풍을 맞은 모양새가 됐다. 엄용훈 대표와 김성호 감독은 일단 “당황스럽다”는 반응이다. 엄 대표는 “<개훔방>은 CJ CGV에 아트하우스관이 아닌 일반 상영관을 내달라고 요청했는데, CJ CGV가 아트하우스관 상영을 제안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CJ CGV의 의견은 약간 다르다. CGV는 “엄용훈 대표가 먼저 CGV에 아트하우스관을 요청하지 않은 건 맞다. 하지만 엄용훈 대표와 리틀빅픽쳐스에서 만나 상영관 확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엄 대표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에 예술영화 인정 신청을 했다고 하기에 일반 상영관 대신 아트하우스에 확대 상영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개훔방>은 1월21일 영진위에 예술영화 인정 신청을 했고, 현재 신청이 접수된 상태다. 영진위는 “3월15일 결과 발표가 나올 예정”이라고 알렸다.

또 각본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는 요구를 받은 김성호 감독은 “신연식 감독이 참석했던 <개훔방> VIP 시사회라든가 마리끌레르영화제에서 크레딧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씀을 했더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갑자기 지금 문제를 제기하는지 모르겠다”며 “무엇보다 크레딧 문제는 내가 아닌 제작사에 요구해야 할 부분”이라고 전했다. 김성호 감독은 3월3일 감독조합에 출석해 현재의 논란을 설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페이스북에 ‘신연식 감독에게 보내는 77문77답 퀴즈’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시나리오 아이디어 77개를 신 순서대로 열거해 신연식 감독의 아이디어가 맞는지, 아닌지 표시해 이중 하나라도 신연식 감독의 아이디어가 있다면 각본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을 빼겠다는 요지의 글이었다. 이 얘기를 들은 신연식 감독은 “김성호 감독이 촬영 직전 ‘완성된 작품은 내 시나리오에서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고, 그걸 가지고 있다”며 일일이 대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번 논란에서 누가 옳고 그른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보다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씨네21> 993호 한국영화 블랙박스 ‘갑질의 연쇄’에서 보도된 대로, 중소 배급사와 독립영화 제작사가 작은 파이를 두고 싸울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다. 한 독립영화인은 “리틀빅픽쳐스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개훔방>이 예술•독립영화전용관에서 개봉하면서 이 시기에 개봉하는 독립•예술영화들에 피해를 준 건 사실”이지만 “<개훔방> 역시 좋은 영화라 안타깝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하나는 여전히 불거지고 있는 크레딧 문제다. “표준계약서가 하루빨리 현장에 안착해야 하는 이유”라는 목소리가 영화계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것도 그래서다.

<개훔방>쪽과 신연식 감독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논란을 정리할 수 있는 혜안이 나올 수 있을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약자끼리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는 현실이 꽤 씁쓸하다. 천만영화 시대의 어두운 이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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