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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K. 시먼스] <위플래쉬>

J. K. 시먼스

<위플래쉬>

“내 템포가 아니야.” <위플래쉬>에서 19살 드럼학도 앤드류(마일스 텔러)를 무엇보다 곤혹스럽게 만든 건 플레처 교수(J. K. 시먼스)의 이 입버릇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채 슬쩍 박자를 늦춰 연주하면 불호령이 떨어지고, 눈치 보며 속도를 높이면 따귀가 날아든다. 종국에는 지금 내고 있는 연주의 박자가 빠른지 느린지조차 모를 지경의 공황상태로 이끄는 모호한 템포의 실체? 악보에도 답이 없고, 심지어 플레처 본인도 명확한 정의를 내려주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내 템포’란 오로지 그 자신의 머릿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문제는 박자 맞추기 까다로운 것이 드럼 템포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앤드류가 플레처의 밴드에 발탁된 첫날, 그는 연주 도중 “버디 리치가 여기 있군”이라는 스승의 극찬을 받는다. 하지만 그로부터 앤드류의 정수리를 향해 접이식 의자가 살벌하게 날아오기까지는 채 3분이 걸리지 않았다.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기복이 심한 감정 상태. 어쩌다 플레처가 상냥하게 대할 때는 우쭐했다가 고함을 지르면 위축되는 식으로 내내 그 감정에 농락당하던 앤드류는, 발표회 당일 단원들과 청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문제적 스승에게 과격하게 대들면서 전기를 맞는다. 말하자면 자신의 훈육방식이 옳다고 믿는 스승의 인정욕구와 메인 연주자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손이 피범벅이 되도록 연습한 제자의 인정욕구가 충돌하며 폭발한 순간이자,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는 것만이 비로소 ‘내 템포’와 공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암시하는 순간이랄까.

우리가 캐릭터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일반적인 감정선의 클리셰에서 벗어나 있는 <위플래쉬>의 플레처 교수. 흥미롭게도 이것은 배우 J. K. 시먼스가 즐겨 맡아왔던 배역에서 적잖이 발견되는 성격이기도 하다. 1990년대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새뮤얼 L. 잭슨, 윌리엄 H. 메이시, 로라 리니 등 수많은 명배우를 발굴했던 최장수 미국 드라마 <로 앤 오더>에서 정신과 의사 에밀 스코다 역을 맡으며 시청자에게 이름을 알렸고,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HBO>의 <오즈>에서는 네오나치 성향의 갱단 두목을 연기하여 TV에서는 실력 있는 장르 연기자로 정평이 나 있었던 J. K. 시먼스. 그러나 만 60살에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게 한 <위플래쉬>를 만나기 전까지 영화계에서 그는 흔한 주인공의 아버지 전문의 조•단역 배우 중 한명이었다.

다만 아버지 역은 흔할지언정 J. K. 시먼스가 연기한 아버지는 대체로 평범하지 않았다.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의 <주노>(2007)에서 이제 겨우 열여섯인 딸이 임신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도 그의 첫 반응은 아기 아빠가 누군지 물어본 다음 “그럴 능력도 없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라며 키득거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극적 상황에서 으레 나올 수 있는 리액션과는 딴판인 데다 허셸 고든 루이스의 고어영화를 태교삼아 보는 주인공 주노(엘렌 페이지)의 4차원적 유전자가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능히 짐작하게 하는 설정인 셈. 게이인 둘째 아들의 성정체성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그런 아들을 인생 최고의 친구라 당당히 밝히는 <아이 러브 유, 맨>(2009)에서의 가장 역할 또한 마찬가지다. 심지어 경력 30년 만의 첫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소감도 이러한 패밀리 맨 이미지의 연장선상에 있다. “방송을 보고 있을 수십억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부모님께 전화해라. 문자도, 이메일도 안 된다. 반드시 전화해서 사랑하고 감사한다고 말해라.”

아버지 역할과 더불어 J. K. 시먼스의 필모그래피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역할은 조직의 리더 또는 숙달된 관료로, 의외성이라는 키워드는 이러한 배역들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코언 형제의 <번 애프터 리딩>(2008)이라든지 데이비드 에이어의 <하쉬 타임>(2005), 벤처투자자 아서 록을 연기한 <잡스>(2013) 등에서 그는 시스템의 규칙을 충실히 따르기보다는 스스로를 그 자리까지 오르게 만든 경험치를 철저히 신봉하는 인물을 주로 연기해왔다. 가차 없이 신속한 의사결정이 특기로, 그 정점에 있는 캐릭터는 <스파이더맨> 3부작의 조나 제임슨 편집장이다. 생활고와 죄의식에 시달리는 슈퍼히어로의 현실적인 고민을 조명했던 이 마블 시리즈는 유독 데일리 뷰글 신문사로 무대를 옮기면 이질적이리만치 코믹한 공기를 선사하곤 했는데, 그 근원은 극중 다른 배역들은 물론 J. K. 시먼스의 과거 연기 스타일에서도 크게 벗어나 있는 조나 제임슨만의 템포, 즉 양식화되고 과장된 동작과 화법에 있었다. 신문 1면 마감을 6분 앞둔 상황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을 찍어온 피터 파커(토비 맥과이어)에게 잔소리를 해대고, 점찍어둔 욕실 타일이 다 팔렸다며 하소연하는 아내의 전화에 신속히 대처하는 와중에 1면 헤드라인까지 능란하게 뽑아내는 묘기를 선보이는 그 순간, 잠시 영화는 스파이더맨이 최초로 등장했던 코믹스의 실버에이지로 타임슬립한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J. K. 시먼스를 대표하는 패밀리 맨과 리더, 그 각각의 속성이 병리적으로 공존함은 물론 배우의 실제 생애와도 연관된다는 점이 테렌스 플레처라는 인물과 영화 <위플래쉬>의 기묘한 특성 중 하나다. J. K. 시먼스 스스로도 “<로 앤 오더>의 에밀 박사였다면 테렌스 플레처에게 경계선 성격장애 진단을 내렸을 것”이라 생각할 정도의 포악한 리더지만, 친구의 어린 딸에게 “나중에 크면 우리 밴드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으련?”이라고 말할 때는 그처럼 살가울 수가 없다. 앤드류가 어느 클럽에서 밴드와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의 모습을 우연히 목격했을 때, 마치 꿈꾸는 듯 음률에 취해 한없이 자애롭던 표정은 또 어떤가?

배우 개인으로 보자면 일찍이 스크린에서 펼쳐낸 적 없었던 음악적 재능을 유감없이 드러낼 수 있었다는 점에 <위플래쉬>의 남다른 감회가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음악교사였다가 장차 몬태나대학 음악학부장까지 역임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같은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할 때까지 조너선 킴블 시먼스의 꿈은 가수였다. 다만 이후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의 베니 역을 비롯해 다수의 음악 활동 이력을 가졌다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테렌스 플레처라는 캐릭터와 그의 접점을 찾기는 어렵다. “만약 다른 일에 재능이 있었다면 배우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대로 J. K. 시먼스는 능력의 한계까지 절차탁마해야 그 너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해악을 끼치는 말이 ‘잘했어’”라고 주장하는 <위플래쉬>의 플레처는 단언한다. “어린 데다 연주도 형편없었던 찰리 파커에게 조 존스가 심벌즈를 던지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버드(찰리 파커)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무대와 광고 연기를 제외하고도 무려 150여개의 배역을 소화해왔지만 크고 작은 그 어떤 상과도 인연이 없었던 J. K. 시먼스는 마침내 2015년, 모두에게서 ‘잘했어’라는 상찬을 들었다. 그 찬사가 해악이기는커녕 이제야 발견되기 시작한 이 중견 예술가에게 새로운 기회의 창이 되어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터. 그 의심은 말하자면, 16살 당시 이미 스윙 재즈의 낡은 틀을 혁파하고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 중이던 천재예술가 찰리 파커의 미래가 그저 심벌즈 한짝의 모욕감에 좌우될 거라는 극단적인 확신만큼이나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스파이더맨>

Magic hour

애증의 스파이더맨

2000년대 이후 J. K. 시먼스를 중용했던 두명의 감독이 샘 레이미와 제이슨 라이트먼이다. 절친이기도 한 제이슨 라이트먼의 영화에는 모두 출연했으며, <주노>의 아버지라든지, <인 디 에어>(2009)에서 첫 해고통보 임무를 맡은 나탈리(안나 켄드릭)에게 좌절을 안겨주는 실직 가장 등 이야기의 거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도맡았다. 하지만 대중에게 그를 각인한 영화는 뭐니 뭐니 해도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3부작. 두 사람의 첫 작업은 야구영화 <사랑을 위하여>(1999)였다. 영화에서는 스파이더맨을 흠집내지 못해 안달이 난 고혈압 편집장 조나 제임슨을 연기했으나 정작 본인은 1960년대 코믹스 원년부터 스파이더맨의 열렬한 팬. 극중 피터 파커가 버린 스파이더맨 슈트를 남몰래 입고 포즈를 취해보는 장면은 그런 J. K. 시먼스를 위한 서비스였다. 이때의 강렬한 연기 덕분에 이후 TV애니메이션 시리즈 <얼티밋 스파이더맨>과 <어벤저스: 지상 최강의 영웅들> 제작진이 조나 제임슨의 성우로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떠올리기가 불가능했음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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