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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여행의 기술
김혜리 2015-03-12

※ <와일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꿈보다 해몽>

이광국 감독은 <꿈보다 해몽>에서도 <로맨스 조>에 이어 이야기 속 이야기, 이야기 옆 이야기를 연구한다. 당연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거울 나라의 앨리스>가 다시 인용된다. 단, 이번 영화에서 감독은 왜 타인들의 이야기가 연결되고, 연결되길 희구하는지까지 들여다본다. 그래서 불려나오는 또 다른 동화는 <성냥팔이 소녀>다. 꿈을 붙들 힘을 잃어가는 30대 배우 연신(신동미)은 겨울 놀이터에서 담배와 성냥을 꺼냈다가 문득 성냥을 통째로 쏟아 불을 붙인다. 팔려서 돈이 되지 못한 소녀의 성냥은 제 한몸을 잠깐 덥히는 땔감이 되었다. 어떤 예술가들에게 재능과 열정도 그렇다. 확실히 손에 잡히지만, 지금은 체온을 지켜주는 게 고작이고 몇 개비나 남았을까 가만히 생각하게 되는.

01/07

여행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는 영화를 덥석 믿지 못한다. 이 주저에는 내가 여행을 힘들어하는 부류라는 사실이 작용한다. 무사히 여정을 마치는 것만 해도 과업인데 기념품으로 무려 자아라니! 나는 짐 싸는 요령이 없고 방향치다. 별자리가 갑각류라서인지 집 떠나면 껍데기가 훌렁 벗겨진 달팽이나 소라가 된 기분이다. 여행 기간이 4박5일이면 출발하는 날까지 약 2박3일 동안 짐을 싸는데 반드시 빠뜨린 물건이 있고 도중에 분실물도 많다. 그래서 나의 여행지 방문 장소는 의도치 않게 현지인스럽다. 경찰서, 컴퓨터 A/S 센터, 병원, 은행, 철물점 등등. 좌충우돌하다 간신히 숙소의 냉수 온수 꼭지와 열쇠 돌리는 방향이 손에 익을 만하면 집에 가야 할 날이다. 내게 여행은 낯선 공간과 문화가 주는 매혹과 매일의 실제적 곤경이 뒤섞여 하루에도 열두번 행복하고 열두번 패닉에 빠지는 시간이다. 그야말로 희로애락의 밀도가 치솟는 기간이다. 돌아오는 길이면 파김치가 된 손발 끝부터 심장쪽으로 안도감이 밀려든다. 어쨌거나 이번에도 해냈어. 아직은 고향 밖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세상은 나를 받아줄 여력이 있어. 괜찮아. 어쩌면 나는 주기적으로 모종의 확인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여하튼 여행은 부정할 수 없는 고역이다. 세계는 저 밖에서 우리가 휴가 내기만 기다리고 있다가 위안과 각성을 선물하는 놀이동산이 아니고, 대자연은 우리를 팔 벌려 안아주려고 거기 존재하지 않는다. 여행의 고생스런 면모를 배제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꾸뻬씨의 행복여행> 같은 영화는 그래서 미덥지가 않다. 지중해의 풍미를 담은 몇번의 저녁 식탁이나 제3세계 국민과의 짧은 교류로, 자아가 발견되고 영혼이 치유될 가능성은 여행사 카탈로그와 항공사 CF에나 있다. 실제로 우리의 자아는 우리를 접대하고 가르치려고 작심한 상대가 아니라, 예기치 못하게 부딪치고 부대낀 것들에 의해 딱지를 떼고 형태를 잡아나간다. 오늘 본 장 마크 발레 감독의 <와일드>가 나를 붙든 첫 번째 까닭은 이 영화가 바라보는 여행의 개념이 ‘고생’이라는 점이었다. 평생의 사랑인 엄마(로라 던)와 사별한 후 회한을 견디지 못해 폭주하듯 살던 셰릴 스트레이드(리즈 위더스푼)는 어느 날, 다시 궤도를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를 완전히 압도하고 휘저어 놓을 체험이라고 결정하고 4285km의 배낭 하이킹에 돌입한다. 이를테면 온갖 날씨와 하중 아래 자기를 던져놓고 나라는 인간을 실제로 이루고 있는 물질이 무엇인지 알아보겠다는 심산이다. 보통의 로드 무비에서 알맹이는 주인공이 여정 중 만나는 새로운 인물과 예기치 못한 사건이지만 <와일드>에서는 매일 짐을 지고 수십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행위 자체가 본론이다. 사람들은 재회의 기약 없이 스쳐가고 일화들은 매끈한 서사를 이루기 위해 연결되지 않는다. 셰릴의 여행에는 목표가 없다. 여행 자체가 목표다. 출발 22일째는 23일째를 위한 준비일 뿐이다. 그녀에게는 만나야 할 새로운 사랑도, 풀어야 할 미스터리도 없다. 다시 길을 찾으러 떠났지만 해답이 꼭 반성과 희망이어야 한다는 전제조차 셰릴은 갖고 있지 않다. <와일드>는 우리가 홀로 과중한 짐을 지고 악천후 속을 여행할 때 머릿속에 들려오는 소리와 육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집중하는 원초적 의미의 여행 영화다. 물집과 근육통, 기호식품을 향한 기갈, 탈진한 머릿속에서 끝없이 재생되는 과거의 일, 결코 좋아한 적 없는데 끈질기게 맴도는 유행가 한 소절, 무표정한 자연과 속 모를 이방인들 앞에서 치솟는 울렁임. 장 마크 발레 감독은 디지털 필름메이킹의 장점을 백분 활용해 무방비한 여행자의 감각과 의식을 콜라주한다. 그리하여 여행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은 길 위의 경험과 사색, 우연히 마주친 현자의 교훈을 종합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이례적으로 길고 호된 물리적 고역의 ‘부작용’으로서 계시처럼 닥친다. 나는 극한 체험은커녕 오르막길도 기피하는 여행자지만, 여행이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예가 있다면 <와일드>의 방식이 현실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한다.

01/10

아, 그리고 <와일드>의 셰릴 스트레이드는 여자다.

로드 무비는 미국적인 장르의 하나로 서부극에서 가지를 쳤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영화 속 남자들은 주로 그들을 길들이려는 (여성적인) 문명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길을 떠나는 반면, 많은 여성 로드 무비는 가부장제 사회 바깥으로 탈출하는 여정이다. <델마와 루이스>와 <보이즈 온 더 사이드>의 여자들은 가정폭력, 성폭력, 레즈비언이나 싱글맘에 대한 차별로부터 도망쳐 길을 가는 동안 일시적 대안 가족을 이룬다. 여성 여행자들은 남자 없이도, 그들을 지켜주고 있으니 순응하라고 엄포를 놓던 가부장제 시스템 없이도 충만한 삶이 가능함을 발견한다. 그리고 수순대로 길 위에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과연 집으로 돌아가서 꼭 필요할 이유는 무엇일까 자문하게 된다. 그러나 도시와 마을을 떠난 후에도 남성적 장르가 규정한 여성성의 내용은 그대로이기에, 그들은 남성과의 관계를 해결할 수 없다. 그냥 내버려두고 도주를 계속하는 길만 남는다. 여성 로드 무비들이 흔히 죽음이나 판타지에서 비상구를 찾는 이유일 것이다.

<와일드>는 조금 다른 예다. 셰릴의 여행은 가부장제로부터의 탈주가 아니다. 오래전 나쁜 아버지의 기억이 있긴 하지만 그녀는 남성적 폭력에 희생된 피해자의 위치에서 여행을 시작하지 않는다(단, 가정폭력으로 싱글맘이 된 후 아이들을 부양하느라 홀로 떠난 적 없는 어머니 대신, 어머니의 기억과 동행한 여행이라고 표현할 수는 있겠다). 셰릴은 피해자이긴커녕 불륜으로 착한 남편을 배신했고 약물 중독을 포함한 방종을 저질렀다.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완주하는 동안에도 델마와 루이스가 겪었던 것처럼 성적인 폭력과 차별에서 기인한 위협적인 사건은 셰릴에게 닥치지 않는다. <와일드>가 여성의 관점에서 그녀가 여행하는 세계를 그리는 방식은 보다 일상적이고 은근하다. 재미있게 비교할 만한 장면이 있다. <델마와 루이스>에 나온 트럭 운전기사들의 여성혐오적 언어폭력 대신 <와일드>에는 <부랑자 타임스> 기자의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차도를 걷는 셰릴을 자동차로 따라잡은 남자 기자는 여성 부랑자는 희귀하다며 인터뷰를 시도한다. 셰릴은 발끈해서 “나는 그냥 여행 중이에요. 여자는 부모 봉양하고 아이를 돌봐야 하니까 일상을 떠나기만 하면 부랑자 꼬리표가 붙어야 하나요?”라고 반박하지만 기자는 막무가내다. “어이구, 페미니스트처럼 말하네요?” “맞거든요!”

유별나게 약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평균적 20대 여성인 셰릴의 육체는 시종일관 영화의 중심에 서 있다. 확실히 그녀는 남성 여행자들보다 연약하고 요령이 부족하며 젊은 여성의 매력으로 인해 약간의 호의를 사기도 하고 집적거림을 당하기도 한다. 셰릴과 관객은 그녀가 남자들과 맞닥뜨릴 때마다 반사적으로 긴장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남자들 중 누구도 성 폭행범으로 판명되지 않지만 희미한 위협은 언제나 공기 중에 떠돈다. 주의를 끄는 것은 평범한 남자들에게 내재돼 있는 과시욕과 가학성이다. 그들은 실제로 추행하려는 의도가 없으면서도 그것을 암시하는 말- 남자들은 짓궂은 농담일 뿐이라고 생각하는-을 하며 셰릴이 드러내는 두려움과 긴장을 즐긴다. 약자에게 자기가 가진 힘이 줄 수 있는 영향을 확인하고 재미있어한다. 요컨대 <와일드>는 치명적 사건을 배제한 채 여성으로서 여행하고 살아가는 일에 불가피하게 따라오는 조건들을 보여준다. 끝으로, 셰릴은 영화 속 선배들과 달리 남자들과의 관계를 내팽개치거나 포기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지 않는다. 심지어 그녀의 선택은 나무랄 데 없는 전남편의 품으로 돌아가는 안전한 카드도 아니다. 영화 말미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미래완료 시제로 셰릴이 다른 남자를 만나고 아이를 갖고 이 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알려준다.

셰릴은 현실과 교섭을 포기하고 장렬히 산화해서 관객에게 죄책감을 남기거나, 여행으로 죄의식을 털고 안온한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한번 과오를 저지른 여자는 남자보다 인생을 돌이키기 어렵다는 잠재적 통념에 맞선다. 이 반박의 힘은 영화가 앞서 그녀의 과오를 보호자연하며 변명하지 않았기에 나온다. <와일드>에는 그랜드캐니언 위로 자동차를 날리는 <델마와 루이스>의 정지화면만큼 해방의 이미지를 응축한 프레임은 없다. 이 영화가 주는 해방감은 다른 곳에서 온다. 전부 아니면 무, 성녀 아니면 창녀, 순응 아니면 통제 강박…. <와일드>는 여상 캐릭터들에게 강요되는 그 모든 양자택일의 프레임들을 거절함으로써 극장을 나서는 내가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01/24

로테르담영화제 취재 전, 기차로 20분 거리인 헤이그에서 며칠 머물기로 했다. 내가 예약한 민박은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는 부부의 집이었다. 중국계 미국인 부인 S와 네덜란드인 남편 F는, 사진을 전공하고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독립해 나간 딸 J의 방을 여행자들에게 빌려주고 있었다. J의 방에는 그녀가 어린 시절 쓰던 크레용과 장난감부터 포토그래퍼로서 작업한 사진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서 24시간이 지나기 전에 나는 방주인과 아는 사이인 양 착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들의 집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중개 사이트 소개글 서두의 “우리 가족도 세계를 여행할 때면 민박을 즐겨 이용한다”라는 구절이었다. 몇해 전 암스테르담 여행의 기억이 문득 되살아난 것이다. 당시 늦은 밤 도착한 나는 가방을 끌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는데,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한 아가씨가 일부러 기수를 빙 돌려 도와주러 왔다. 감격하는 내게 그녀는 당연하단 투로 말했다. “괜찮아요. 나도 여행할 때마다 그곳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무사하지 못했을 텐데요, 뭐.”

S는 바쁜 생활에도 불구하고 비워두어도 무관한 공간에 굳이 민박을 시작한 이유를 명랑하게 설명했다. “젊은 시절에는 디자인 회사 클라이언트를 만나기 위해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여러 사정으로 예전처럼 여행을 자주 할 수 없게 됐어요. 그래서 생각했죠. 내가 세계로 나가지 못하면 세계를 이리로 오게 하면 되잖아?” 게다가 S는 ‘부업’에도 철저히 프로페셔널했다. 부부가 소개해준 박물관을 찾아가는 데에 표지판이 없어 조금 애먹었다고 들려주자 다짜고짜 민원편지를 작성할 준비를 시작했다 “숙박업 종사자로서 좌시할 수 없어요. 우리가 권한 장소를 방문하는 게스트가 곤란을 겪는다면 그건 내가 하는 일의 문제점이기도 하잖아요?” 교훈 하나. 훌륭한 여행자가 훌륭한 호스트가 된다. 로테르담을 향해 나와 작별하며 S는 딸이 연출한 단편영화의 온라인 링크를 알려주었다. 모녀 관계가 소재이니 자신과 딸의 사이를 엿볼 수 있을 거라는 귀띔과 함께. 나의 영화제는 그렇게 조금 일찍 시작되었다.

<프랑켄슈타인>

좋아요

‘색맹’ 캐스팅

영국 국립극장의 2011년작 <프랑켄슈타인> 실황이 서울 국립극장에서 상영됐다. 대니 보일 감독이 연출한 <프랑켄슈타인>은, 신의 개입 없이 생명을 창조한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그의 피조물 역할을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조니 리 밀러가 번갈아 연기해 극중 캐릭터끼리의 관계를 캐스팅에 반영했다. 시선이 머문 또 다른 대목은 프랑켄슈타인의 아버지와 사촌 역을 흑인 배우 조지 해리스와 나오미 해리스가 연기한다는 점이다. 인종에 아예 눈감기로 한 캐스팅이다. 이론의 여지가 있을 테지만 신선하다고 느꼈다. 벤 킹슬리, 앨프리드 몰리나 같은 배우가 국적과 인종을 초월하는 연기로 활약하고 호평받는 모습을 보며 품었던 질문 때문이었다. 그들이 아시아나 아프리카계였다면 동등한 폭의 예술적 기회를 누릴 수 있었을까? 관객이 인종의 표식에 앞서 캐릭터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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