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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부끄럽지 않냐고 물으신다면

<유령작가> <시라노> <그녀> 등에서 살펴본 대필 작가의 도(道)

<유령작가>

3X년을 살면서 한번도 연애편지를 써본 적이 없다. (연애는 했다.) 사랑을 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던데 나는 웬일인지 상대가 시인이 되면 그나마 있던 사랑도 달아나곤 했다. 아직은 젊었던 30대 초반, 애인으로부터 “그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키스를”이라는 문자를 받고는 너무 부끄러워 아무도 없는데 이불 속에 숨었다가 오밤중에 뭐하냐, 빨리 자라고 답한 사람이 나다. (경상도 남자냐.) 이렇게 돌이켜보니 내가 지금껏 결혼을 못한 데엔 다 이유가 있었구나, 로맨틱이 성공적이지 않아.

하지만 한때 내게도 하루에 몇통씩 연애편지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남의 연애편지를. 한창 잘 먹(고 그게 몽땅 살로 가)던 중학교 2학년, 2교시가 끝나면 도시락을 까먹고 점심시간엔 기아에 허덕이던 나는 저울 좀 보고 살면서 작작 좀 먹으라며 용돈을 주지 않던 엄마에게 대항하여 스스로 식비를 벌기 시작했다. 연애편지 대필 한번에 사발면 한개, 가끔은 모아서 떡볶이 한번. “내 마음엔 의자가 한개 있어. 아직은 텅 빈 의자가. 거기에 네가 와서 앉아주지 않겠니?” 따위의,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수치스러운 문장을 휘갈기면서 나는 열다섯에 밥벌이의 비루함을 깨달았더랬다, 후우, 그랬더랬다. 그 시절 나를 살찌운 건 팔할이 대필이었다. 그리고 그 살은 아직도 빠지지 않았지.

세월이 흘러 대필로 받은 원고료를 들고 신이 나서 고기를 굽던 나에게 시인 지망생이었던 지인이 물었다. “나중에 부끄럽지 않겠어요?” 넌 지금 나한테 얻어먹는 고기가 부끄럽지 않냐. “그런 게 어딨어요, 내가 일해서 받은 돈인데(그러니까 너도 집에서 용돈 그만 받고 나가서 일하라고). 난 일은 열심히 해요.” 그렇다, 돈만 받으면 아무거나 하는 나에게도 도(道)는 있으니, 대필 작가라고 하여 지키고 싶은 길이 없으랴. <유령작가>의 유령 작가(이완 맥그리거, 유령 작가인 것만도 서러운데 배역 이름도 없다)도 그 도를 지키느라 대필하는 자서전 주인공에 관한 사실을 꼼꼼하게 짚고 넘어가려다가 인생 말아먹기에 이르지 않는가.

<시라노>

역사상 가장 유명한 대필 작가(이자 호구)는 실존 인물인 영화 <시라노>의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제라르 드파르디외)다. 코가 너무 커서 자기는 연애를 할 수 없을 거라고 믿었던 그는 칼싸움도 잘하고 글도 잘 쓰고 그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자아도취도 경지에 이른 군인 겸 예술가인데, 프랑스에서 태어난 죄로(슬프다, 한국인이었다면 코가 크면 XXX도 크다고 환영받았을 텐데) 연애편지 대필만 하다가 노총각으로 늙어 죽은 인생이다.

진상은 호구를 낳는다 했던가. 시라노는 자기 애인 보살펴달라는 짝사랑 상대의 부탁에 다 큰 어른 보모 노릇을 하는데,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얼굴만 잘생겼지 성질은 못돼먹은 백치, 좋아하던 여자는 남자들 일하는 전쟁터에 와서 술이나 먹이며 일터를 휘젓고 다니는 진상. 그 둘 사이에 낀 희대의 호구 시라노는 “이 편지를 쓴 잉크는 나의 피”라는 낯 뜨거운 편지를 써주다 못해 불러주는 대사도 못 받아먹는 백치를 대신하여 직접 밀회에 나서 그대의 하얀 잠옷 어쩌고저쩌고 운운하며 체면을 구긴다. 역시 프랑스, 로맨틱한 나라. 하지만 어떤 프랑스 남자가 “너의 미소는 세상을 정복할 수도 있을 거야”라고 말한 순간, 나는 2유로(당시 환율로 3천원, 그리고 선불)에 달하는 맥주 한잔을 버리고 달아났지. 때로는 성공적이지 않은 로맨틱.

<그녀>

내 비록 열다섯 시절, 사발면하고 떡볶이로 연명하느라 인생에 수치를 남겼지만 시라노만큼 멀리 간 적은 없으니, 그보다는 <그녀>의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처럼 되고 싶었다. 첨단 테크닉이 범람하는 미래, 손으로 쓰는 편지를 대필하는 블루오션의 노동자 테오도르는 일상에 기반한 담백한 문장과 세심한 취재에 바탕을 둔 추억의 에피소드로 편지 대필 회사 최고의 작가로 불린다. 어찌나 섬세한지 운율까지 맞추는 테오도르, 나도 한번 해볼까. “내 마음엔 의자가, 아직은 텅 빈 의자가/ 네 가슴엔 용사가, 아직은 어린 용사가/ 용사가 의자에 앉아, 텅 빈 의자에 용사가 앉아, 이제 내 가슴은 용기로 가득 차~ 지.” 죄송합니다.

하지만 21세기 한국 대필 작가의 현실은 남루하기 그지없어 내가 발로 써도 너보단 잘하겠다며(그래서 진짜 발로 쓴 듯한 문장력을 선보이던) 저자로부터 막말을 듣기 일쑤다. (이 말을 직접 들었던, 참으로 잘 쓰시던 저의 편집자 시절 대필 작가님, 드라마 작가 데뷔를 축하드립니다, 재밌었어요.) 그런 대필 작가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영화가 <나두야 간다>이다. 조폭 두목(손창민)의 자서전을 쓰는 소설가 동화(정준호)는 동화 같은 나날을 누리는 대필 작가다. 계약금 다섯장(5천만원으로 추정)에 사무실, 대신 주먹 써주는 조폭 부하들, 말 잘 듣는 저자, 기분 전환하라고 일본 온천 여행까지.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대필 작가의 지상낙원에서 모자란 것이라고는 본인의 필력뿐. 하지만 저자만 잘 만나면(눈먼 저자를 만나면) 아무 문제 될 거 없는 것이 필력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차라리 미국영화 <메이저리그의 전설 타이콥>이 현실에 가까울 것이다. 저자와 대필 작가 사이에 쌍욕이 난무한다는 건 초현실에 가깝지만, (자칭) ‘위대한 타이콥’의 대필만 하면 되는 줄 알고 한겨울 깡촌으로 찾아갔더니 운전에 술친구에 사람 찾는 탐정 노릇에 총기 난사 사고의 뒤처리까지, 노인네 온갖 수발 다 들면서 감금 생활하는 걸 보면 <미져리>(1990)가 따로 없다. 하지만 타이콥의 대필 작가가 힘든 건 다른 이유 때문이다. 위대한 야구 선수이지만 천하의 인간 말종인 타이콥을 그대로 드러낼 것인가, 오해받았다고 주장하는 그의 가면을 보여줄 것인가.

몇번 대필을 하면서도 누군가의 말대로 ‘부끄럽지’ 않았던 건 이건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 덕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자기 이름이 나가는데도 다른 사람 말을 그대로 받아 적는, 대필이나 마찬가지인 기사들을 보면 마땅히 가져야 했을지도 모르는, 가뜩이나 희박했던 나의 부끄러움이 사라지곤 한다. 그런데 만약 그 기사들이 진짜라면, 받아 적은 내용이 진짜 그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거라면? 그게 더 무서워.

차라리 보험을 팔걸 그랬나

대필 작가가 가져야 하는 두세 가지 미덕

<메이저리그의 전설 타이콥>

멀티태스킹

무시무시한 노인네 타이콥(토미 리 존스)의 자서전을 쓰는 <메이저리그의 전설 타이콥>의 스포츠 기자 스텀프는 할 일이 많다, 수틀리면 총 쏘는 것이 취미인 타이콥의 총알을 피해야 하고, 눈길을 최고속도로 달리며 추격전을 벌여야 하고(타이콥한테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실패), 클럽에서 관광버스 춤을 추는 타이콥 장단도 맞춰야 한다. 그렇게 글쓰는 것 말고도 숱한 능력을 과시하며 멀티태스킹을 수행하던 그는 있는 그대로 쓴 원고를 훔쳐보고 노발대발하는 타이콥 때문에 원고까지 두 가지 버전으로 멀티 집필을 시작한다. 이미 수십년 전부터 한 가지 능력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었구나.

<유령작가>

영업력

<유령작가>에서 이미 한권 분량이 되고도 남을 전(前) 영국 총리의 자서전을 고쳐 쓰는 작업에 걸린 원고료는 25만달러이다. 어머, 받기가 미안할 정도야. 그리하여 정치에 관심 없다고 튕기던 유령 작가는 체면 불구하고 다섯 번째 면접자로 등판, 본인이 이 책을 써야만 하는 이유를 약장수 저리 가라 할 화술과 속도로 풀어놓으며 면접하러 나온 엘리트들의 혼을 빼놓는다. 그의 마케팅 포인트는 ‘가슴’, 독자의 가슴에 다가가겠습니다! 그 정도 실력이면 바닷가 외딴 저택에 감금되어 자서전 대필하지 않아도 보험왕 정도는 됐을 텐데.

<지상 최고의 아빠>

감정이입

대필 작가에게도 자아는 있으나 대필하는 순간만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화 <지상 최고의 아빠>의 아빠(로빈 윌리엄스)는 실패한 작가인데 자위하다가 사고로 죽은 아들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감싸느라 자살로 위장, 유서를 대필했다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외로운 10대 소년 시점으로 일기까지 쓰기에 이른다. 그리고 평생 꿈꿔왔던 출판 제안을 받는다. 기껏 작가가 되었지만 대필 작가, 그것도 아들이 저자. 그래도 재능은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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