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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거저 얻는 사랑
김혜리 2015-04-09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

인공 눈사태가 스키장 레스토랑을 덮친다. 사상자는 없다. 깔려죽은 것은 위기의 순간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혼자 줄행랑을 쳤던 남자의 에고다. 가족의 공기엔 살얼음이 끼기 시작하고 이윽고 “나는 생존 본능의 희생자야!”라는 남자의 울부짖음이 쾌적한 호텔 복도에 울려퍼진다. 루벤 외스트룬드 감독은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의 배경인 스키 리조트를, 사나운 자연과 그것을 길들이려는 문명이 부딪치는 장소로 소개한다. 광막한 설산과 5성급 호텔의 편의시설, 동물적 본능과 문화적으로 구성된 셀프 이미지가 대조된다. 특히, 네 식구가 쓰는 같은 상표의 전동칫솔은 부유한 핵가족의 일체감과 잘 관리된 라이프 스타일을 함축한다. 그러나 청결한 침묵 가운데 울려 퍼지는 진동음은 기괴하게 위협적이다.

02/24

“꺼져! 이 흉악한 인간아. 나는 아빠랑 집에 가겠어.”

<위플래쉬>의 클라이맥스인 카네기홀 공연에서 플레처 선생(J. K. 시먼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진 앤드류(마일스 텔러)는 그렇게 외치지 않는다. 위로하러온 자상한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대신 다시 무대로 올라가 막무가내로 에고와 재능을 폭발시켜 플레처로부터 인정의 눈짓을 얻어낸다. 앤드류는 플레처의 세계에 투항한 것인가? 하지만 <위플래쉬>는 연주가 끝난 후 사제가 악수를 나눈다거나 앤드류가 유명 재즈 레이블의 러브콜을 받는다거나 하는 확실한 마침표를 찍지도 않는다. “역시 내 가르침이 옳았어”식의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은 플레처의 얼굴에 카메라가 머무는 일도 없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폭풍 같은 연주가 끝나자마자 인물의 긴장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지점에서 뜯어내듯 영화를 끝낸다. 모호함의 정도를 심사숙고한 엔딩이다. <위플래쉬>는 <나를 찾아줘>나 <나이트 크롤러>가 택한 냉소적 결말의 몇 발자국 전에서 의도적으로 멈춘다. 관객은 거기서 각자 보고 싶은 것을 본다.

나는 앤드류가 야심 없는 아버지를 떠나 성취제일주의자 플레처에게 ‘입양’되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시 말해 무색무취하던 청년이 플레처라는 강력한 피그말리온을 만나 제2의 플레처로 빚어졌다고 믿지 않는다. 어떤 혹독한 교육도 본래 한 인간 안에 없던 자질을 짜내기는 불가능하다. 앤드류와 플레처 선생은 원래 동족이다. 둘은 제법 잘 어울린다. 두 사람은 적당히 균형 잡힌 인생의 행복을 한쪽에, 오로지 한 목표에 집중하고 고통스럽게 자기를 몰아붙여 도달하는 위대함을 대척점에 놓는 이분법적 인생관을 공유하며 훌륭한 예술가의 길은 오직 후자라고 확신한다. 사랑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데에 만족하고 연주의 희열을 즐기며 좋은 귀를 가진 청자와 동료에게 인정받는 행복을 동력으로 살아가는 뮤지션들도 인생 어느 시점에 충분히 위대한 음악을 만들 수 있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앤드류와 플레처는 동시에 단호히 고개를 저을 것이다.

앤드류의 본령은 플레처 선생이 아니라 여자친구, 가족과 함께하는 장면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연습에 집중하기로 결단한 앤드류가 니콜(멜리사 베노이스트)에게 일방적으로 헤어지자고 요구하는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이별의 이유보다 통보의 방식이다. 내겐 드러머로서 성공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러므로 오로지 훈련해야 하고 너와 만나는 시간이 아까워질 건 당연하고 그럼 너는 사랑을 성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여자애들이 그렇듯이 칭얼거릴 테고 어차피 안 좋게 끝날 테니 여기서 갈라지는 편이 여러모로 현명하다. 앤드류의 머릿속에는 확고한 플로차트가 들어 있다. 그는 니콜의 됨됨이를 단정하고 그녀의 의견은 묻지도 않으며, 제3의 길을 둘이 같이 만들어갈 수고를 무릅쓸 의욕이 없다. 사랑이 주는 영감이 음악에 보탬이 될 수도 있다는 아이디어 따위는 앤드류의 예술관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아버지가 “인생에는 신경 써야 할 다른 것들이 있단다. 내 나이쯤 되면 통찰이 생기지”라고 말했을 때 앤드류는 “통찰 갖고 싶지 않아요”라고 고무공처럼 반발한다. 클라이맥스의 카네기홀 장면을 보다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저 아버지가 아들을 위로할 수 없는 이유는 지금 아들이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영영 알지 못할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앤드류가 원하는 인정과 사랑은 특정한 종류다. 음악을 ‘딴따라 일’ 정도로 아는 무지한 친척과 앤드류가 벌이는 말다툼에 많은 힌트가 있다. 그는 친구가 많으냐는 질문에 친구 필요 없다고 대꾸하고, 그럼 누가 너를 기억해주냐는 반문에 친구가 아닌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한다. 차라리 미움받고 따돌림당하는 편이 목적의식을 벼르는 데에 유익하다고 단언한다. 이쯤 되면 분명해진다. 앤드류에겐 거저로 주어지는 사랑은 무가치하다. 그는 성취를 통해 획득한 인정과 사랑으로만 충족되는 부류의 사람이다. 요컨대 앤드류는 어떤 일이 있어도 플레처의 닦달에 시달린 후유증으로 자살한 선배 뮤지션의 전철을 밟을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플레처의 교육 방식에 대해 옳고 그름을 떠나 효율을 확신할 수 없는 까닭은 학생들이 달라서다. 어떤 아이는 밀어붙여질 때 부서지는 대신 비약하고 다른 아이는 안정감과 행복 안에서 잠재력을 최상으로 발휘한다. 앤드류는 플레처 타입이다. 두 주인공이 동류이기에 내 눈에 <위플래쉬>는 소년이 상반된 두 아버지상 중 하나를 선택하는 성장영화라기보다 비슷한 두 남자의 권력 투쟁 드라마로 보였다. 수석 드러머 자리를 박탈당하자 앤드류는 곧장 주먹을 휘두르며 플레처를 덮친다(순간 나는 앤드류가 플레처보다 크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고 당황했다). “모든 파트는 내 소유고 너희에게 빌려줄 뿐”이라는 입장을 가진 플레처에게 앤드류는 “따낸 순간 이 파트는 내 소유다”라고 맞선다. 내게 <위플래쉬>는 같은 트랙에서 달리는 A가 선발주자 B와 기어코 동등해지기까지의 드라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한명의 위대한 예술가를 완성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모욕에 관한 교훈극이 아니라, 위대한 예술을 위해서는 억압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들한테 일어나는 일을 그려낸, 잘 짜인, 힘 있는 이야기다.

02/26

금요일 저녁을 헌납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실망스러웠다. E. L. 제임스의 원작 소설을 읽은 관객들은 감독이 선방했다며 안심하는 눈치인 걸 보니 내가 책을 보지 못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스토리 오브 오>나 <나인 하프 위크> 같은 영화의 개정판만 볼 수 있었더라도 상당히 만족했을 것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로맨스의 구색으로서가 아니라 섹스 자체를 중심 소재로 다룬 주류 상업영화라는 점에서 가치 있긴 하다. 이 영화를 즐길 만한 방법으로는 “놀리는 맛에 보기”가 있을 것 같다. 친구들과 DVD를 틀어놓고 좌중이 동시에 실소를 터뜨리는 장면에서 돌아가며 한잔씩 하는 유쾌한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못됐다고? 하지만 내 직감에는 샘 테일러 존슨 감독이나 배우들도 썩 기분 나빠하지 않을 듯하다. 다음 목록은 ‘한잔하기’ 게임에서 걸릴 법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포인트들이다.

직업적 이유로 내 머릿속에 빨간불을 처음 들어오게 한 장면은 아나스타샤(다코타 존슨)가 감기에 걸린 교지 기자 룸메이트를 대신해 백만장자 그레이(제이미 도넌)를 인터뷰하는 도입부였다. 질문의 내용부터 필기도구를 빠뜨린 실수에 이르기까지 세상 수습기자들에게 ‘나쁜 인터뷰의 예’로 보여줄 만한 시퀀스다. 일의 서투름이 환상적 연애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는 설정이야 애교다. 결정적으로 나의 화를 돋운 요소는 중요한 인터뷰를 편집부 동료도 아닌 룸메이트에게 덜컥 맡겨놓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교지 기자 친구가 별로 위독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원작에서 유래한 결함이겠지만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서 제일 허무한 점은 영화의 전체 줄거리가 “두 인물이 계약에 서명하기까지”- 이것도 꽤 지루하게 들리지만- 도 아니고 “서명하지 않기까지”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BDSM(결박, 지배, 사도마조히즘적 섹스) 계약을 둘러싼 설왕설래는 <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 벨라가 뱀파이어가 되느냐 마느냐를 놓고 벌이는 뜸들이기에 비할 만하다. 그런데 문제의 계약이 관객에게도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려면 계약 성사 여부에 따라 할 수 없는 행위와 있는 행위가 명확히 보여야 하는데 맥 풀리게도 아나스타샤와 그레이는 사인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할 만한 일을 다 한다. 나는 이 에로틱 로맨스의 남자주인공이 백만장자라는 점까지 트집잡을 뜻은 없다. 성적 판타지를 위해 돈이 할 수 있는 일은 실제로 많다. 완벽한 방음과 보안으로 무슨 일을 해도 허용될 듯한 그레이의 펜트하우스를 보라. 도시 전경이 내려다보이면서도 밖에서는 들여다보이지 않는 넓은 거실, 세계 곳곳에서 수집한 값비싼 최고급 섹스 장난감들, 긴 밤 중간에 남자의 섬세한 면모를 강조해줄 그랜드 피아노. 그러나 그레이 커플이 성적 환상을 위해 완벽하게 조율된 이 공간에서 성인으로서 합의 아래 ‘감행’하는 행위들은 매우 평이하고 지루하다. 위험하지도 환상적이지도 않아 섹스에 포함된 어두운 충동이나, 고통이 쾌락으로 전이되는 메커니즘을 표현하기엔 역부족이다. 도발적이긴커녕 처녀라는 사실에 못내 감동하는 남자의 모습이나 이튿날 아침 여자가 보이프렌드의 셔츠를 입고 팬케이크를 굽는 장면은, 이 영화를 그저 센 척하는 촌스런 샌님처럼 보이게 만든다. 심지어 “오직 섹스할 뿐 로맨스는 없다”고 누누이 강조하던 남자는 협상안으로 일주일에 한번씩 데이트를 해주겠다는 제안을 절충안으로 내놓는다. 주 1회 데이트. 음, 보통의 커플과 별로 다를 게 없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여성 관객을 주요 타깃으로 설정하고 노골적으로 환상을 충족시키는 목표를 가진 영화라는 점을 감안할 때 남자주인공의 매력 부족은 치명적 약점이다. 그레이는 <죽기 전에 부유한 매력남이 해보아야 할 언행 101가지> 같은 출판물이 있다면 딱 거기 나올 법한 전형적인 말과 행동을 줄줄이 선보여 그를 예찬할 만반의 태세가 돼 있는 객석을 김새게 한다. 여자가 술 마시고 있다고 하면 외동딸 과보호하듯 데리러 오고,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뭐뭐한 건 네가 처음이야”라고 공치사를 반복한다. “자, 내 멋진 상체를 봐” 하는 투의 특정한 방식으로 매번 상의를 벗어 보는 이를 창피하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특히 기겁한 대목은 그레이가 아나스타샤의 정든 털터리 차를 멋대로 팔아버리고 아우디 열쇠를 던져줄 때였는데 유달리 물질에 초연해서가 아니라 내가 아나스타샤라면 불같이 화를 낸 다음 문제의 중고차 딜러 번호를 요구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레이는 자긍심과 자신이 없다. 자기의 현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과거의 상처 탓으로 돌리는 남자가 멋있기는 어렵다. 제일 나쁜 점은 배우 제이미 도넌이 그런 언행을 스스로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 배우에겐 평평한 캐릭터를 활성화시킬 매력과 재주가 없고 무엇보다 그럴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거칠게 요약해 성을 대가로 남자가 여자에게 많은 것을 제공하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플롯은 여성에게 모욕적으로 보이지만 캐릭터 묘사에 더 큰 불만을 품어 마땅한 쪽은 남성 관객이다. 급기야 나는 대사가 두세 마디뿐인 그레이의 운전사 테일러(맥스 마티니)쪽에 한눈을 팔기에 이르렀는데, 적어도 뭔가 스토리가 있어 보이는 이 인물과 아나스타샤가 바람이 나면 훨씬 흥미진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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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만의 나라

섹스를 통해 전이되는 악령에 관한 호러 <팔로우>의 배경은 디트로이트다. 자동차 산업 융성기에 미국 최고의 부를 누렸으나 경기 변화로 군데군데 공동화된 이 도시에는, 분명 현실 세계에 존재하면서도 리얼리티와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이탈한 장소로 보이는 특이한 자질이 있다. 다큐멘터리 <서칭 포 슈가맨>과 권태롭게 영생을 사는 뱀파이어의 이야기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가 일찍이 이 속성을 멋지게 활용했다. 디트로이트 자체가 캐릭터이자 주제였던 힙합영화 <8마일>은 말할 것도 없다. <팔로우>에서 식민지 양식의 붉은 벽돌주택, 뒤뜰의 간이수영장, 흉가와 반쯤 철거된 폐건물들은 저주받은 친구를 구하기 위해 어른들의 도움 없이 사투를 벌이는 고아 같은 10대들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마치 고철더미를 성곽과 진지로 상상하며 뛰어다녔던 어린 날의 놀이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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