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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장르라는 은유법
김혜리 2015-04-30

※ <팔로우>의 결말을 포함해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차이나타운>

전철역 사물함에 핏덩이일 때 버려져 ‘엄마’(김혜수)의 조직에서 길러진 <차이나타운>의 일영(김고은)에게는, 쓸모가 곧 존재 이유다. 과연 매우 유용한 존재로 자란 소녀의 견고한 세계는, 딱 한번 머물지 말아야 할 곳에 머문 시선으로 인해 균열한다. 우리는 이런 분기점을 예전에 본 적이 있다. <차이나타운>의 일영은 종종 <달콤한 인생>의 선우(이병헌)가 섰던 자리에 정확히 당도한다. 선우는 첼로 켜는 여자를, 일영은 요리하는 남자를 응시한다. 그래서 비슷한 궤적 안의 차이를 살피는 일이 더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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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그것’이 널 따라올 거야. 나도 누군가에게 받았고 방금 너한테 넘겼어. 새로운 상대와 섹스해야만 저주를 벗어날 수 있어. 하지만 다음 사람이 ‘그것’한테 잡히면 저주는 네게 돌아와.”

사귀는 청년 휴(제이크 위어리)와 첫 섹스를 나누고 깨어난 제이(마이카 먼로)는, 느닷없이 서바이벌의 규칙을 통보받는다. 휴는 제이가 믿지 않을까봐 그녀를 묶어놓고 저만치서 다가오는 ‘그것’을 보여준다. 제이가 살아남아야만 자신도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팔로우>는 얼핏 “섹스하면 살해당하고 ‘순결’을 유지하면 친구보다 오래 살 수 있다”로 요약되는 70, 80년대 틴에이지 연쇄살인 공포영화의 규칙을 직계 상속한 호러로 보인다. 과연 <팔로우>에서도 여자들은 <할로윈>에서처럼 뜬금없이 속옷이나 핫팬츠 차림으로 돌아다니고 10대 주인공들은 악령 앞에서 번번이 바보짓을 한다. 그러나 <팔로우>를 15분만 미행해보면 깨닫게 된다.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 감독이 섹스를 다루는 원칙은, “하면 죽는다” 식의 청교도적 전제를 무심히 바닥에 깔고 가는 선대 청춘공포영화들과 딴판이다.

우선 <팔로우>의 섹스는 화근일 뿐 아니라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하다. 성으로 악이 매개되는 설정을 근거로 <팔로우>를 성병을 빗댄 호러라고 묘사하는 평자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섹스로 감염된 병은 제3자와 성교한다고 치유되지 않는다. 제이는 섹스라는 비행(非行)의 벌을 받는 게 아니다. 오히려 <팔로우>의 괴담은 꼭 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끔찍한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는 삶에 대한 우화에 가깝다. 결국 <팔로우>의 핵심은 금욕이냐 방종이냐가 아니라, 지옥을 혼자 감당할 것인가 섹스로 타인에게 고통을 전가할 것인가의 갈등으로 귀결된다. 연약한 10대들이, 아는 타인에 대한 사랑과 모르는 타인에 대한 윤리를 시험받게 되는 상황이 <팔로우>의 지옥이다. 게다가 합의된 섹스만 유효하고 다음 사람이 죽으면 도로아미타불이 되므로, 인물들은 누구를 상대로 택할지, 저주를 넘긴 다음 어떻게 행동할지에 무심해질 수 없다.

제이는 선배 ‘호러퀸’들처럼 전형적인 백인 미소녀지만 그저 방종의 대가로 비명 지르며 고문당하러 영화에 들어와 있는 여자애가 아니다. 극중 네번(보기에 따라 세번)의 성적 접촉에서 그녀는 통제력과 자결권을 행사한다. 휴는 제이에게 “넌 (예쁜) 여자니까 섹스하기 쉬울 거야”라고 달래지만(이걸 위로라고!) 이후 영화의 전개는 청년의 속단을 철저히 반박한다. 제이는 겁에 질려 탈진해서도 대뜸 아무나 붙들고 악령을 넘기지 않는다. <팔로우>는 여자건 남자건, 굳이 악령이 연루돼 있지 않더라도 섹스는 자칫하면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는 무거운 행위임을 돌아보게 만든다. 달리 말하면 <팔로우>에서 공포의 대상은 섹스라기보다 유령의 형태로 세상 끝까지 우리를 쫓아오는 섹슈얼리티다. 영화 초반 수영장의 제이를 훔쳐보는 시선이 괴물의 것인 줄 알았던 관객은 호기심 많은 옆집 꼬마를 울타리 뒤에서 발견하게 된다. 제이와 친구들을 위협하는 ‘그것’은 하체를 적신 부모- 섹슈얼리티의 근원- 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섹스는 섹스로만 지울 수 있는 번민을 낳고 관계는 반드시 떨칠 수 없는 결과를 수반한다. 죽음은 집요한 악령처럼 빠르진 않지만 일정한 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고작해야 섹스는 죽음을 잠깐 잊게 해줄 뿐이다. 요컨대 <팔로우>는 공포를 생산하기 위해 성과 죽음을 이용하는 대신, 성과 죽음을 논하기 위해 영화적 공포를 이용하는 구조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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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팔로우>는 무서운가? 답은 “예”이기도 하고 “아니오”이기도 하다. 취향 따라 판단을 돕고자 <팔로우>의 공포가 지닌 특성을 적어본다. 첫째, 이 영화가 디자인한 공포는 극도로 심플하다. 비교적 정상적 외모- <식스 센스> 속 망자들 정도다- 의 악령이 희생자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 게 거의 전부다. 다만 집요하다. 평범하고 단순한 악령은 아무것도 아닌 일상을 위협적으로 바꿔놓는다. 프레임 원경으로부터 누가 다가오기만 해도 겁을 먹게 되는 것이다. 나는 <팔로우>를 보면서, 히치콕의 <새>를 가리켜 “아침 출근길의 새들이 달리 보였다. 아무렇지도 않았던 대상을 무섭게 만드는 연출이야말로 굉장하다고 생각했다”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소감을 떠올렸다. 둘째, <팔로우>의 ‘그것’은 평균 보행 속도로 움직인다. 느려도 무서운 존재로는 좀비가 있지만, 혼자 움직이는 ‘그것’은 인해전술로 희생자를 제압하지 않는다. <팔로우>의 악령이 느리다는 사실은 자체로 고문이다. 역설적인 극중 대사가 까닭을 알려준다. “‘그것’은 천천히 다가오기 때문에 누구한테 악령을 넘길지 네가 궁리할 틈이 있어.” 생각할 여지는 곧 번민의 고역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느림과 연결된 세 번째 특징은 이 영화의 공포가 집단적 패닉과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팔로우>의 악령은 오로지 한번에 한 사람씩만 더구나 설명을 동반해 옮겨다닌다. 공기를 통해 무작위로 감염되거나 동네를 휩쓰는 악령이 아니기에 겁에 질린 군중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공황의 스펙터클은 없다. 심지어 희생자의 바로 옆에 붙어 있어도 제3자는 안전하다. 고통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며 희생자를 돕는 일은 순전히 의지의 문제로 남는다. 넷째, <팔로우>의 악마는 텅 빈 괄호와 같다. ‘그것’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희생자 사슬을 타고 구전된 서바이벌의 원칙도 100% 정확하다는 보장은 딱히 없고, 눈앞의 ‘그것’을 어찌어찌 물리친다고 해도 매번 다른 육체로 등장하니 발본색원은 불가능해 보인다. 다시 말해, ‘그것’은 모호해서 무적이다. 악의 실체를 규정할 수 없고 근원을 추적할 수 없기에 <팔로우>의 괴담은 문득 보편적인 은유로 읽히기 시작하며 서서히 추상화된다. 급기야 “때로는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너를 해치려는 것처럼 보일 거야”처럼, 사실을 단순 적시하는 대사도 의미심장하게 들리게 된다. <팔로우>가 영원한 설화의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교묘하게 연대를 흐려놓은 프로덕션 디자인에도 있다. 극중 10대들의 일상에서는 엄마들이 쓰던 조가비 분첩 모양의 스마트 기기가 흑백 브라운관 TV와 공존하고, 패션의 연대는 뒤죽박죽이다. 데이트하는 젊은 커플은 일본풍 벽화가 있는 단관 극장에 줄을 서 <샤레이드>의 표를 산다. 결과적으로 <팔로우> 속 디트로이트는 현실 세계와 약 15도쯤 어긋난 평행우주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는 무서울 수도 무섭지 않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 감독이 호러 규칙을 엄격히 세우고 지키는 동시에, 공포를 경유해 시공을 벗어난 어떤 적막한 장소로 자꾸만 우리를 데려가려 한다는 점이다. 그곳의 이름은 꿈일 수도 동화일 수도 연옥일 수도 있다. (다음에 계속)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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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비전

토니 스타크의 살림살이부터 전투 슈트까지 관리하는 자비스(폴 베타니)는 몸 없는 인공지능 비서다. 원작 코믹스에서는 집사에 가까운 자비스 캐릭터에 대해 마블 스튜디오는 “우리한테는 마이클 케인이 없으니까 집사는 피하는 게 좋겠다고 결정했다”고 농반진반 회고한 적이 있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자비스의 프로그램을 응용하고 X요소를 더해 인격화된 캐릭터 비전(폴 베타니)으로 재창조한다. 단, 비전은 자비스의 일부를 가졌을 뿐 동일 캐릭터는 아니다. 아름다움과 강함의 차이까지 명상하는 비전에게는, 고도 지성체 울트론(제임스 스페이더)이 갖지 못한 시심(詩心)이 보인다. 안드로이드로 탈태하기 전, 인공지능 홀로그램 모양만으로도 둘의 차이는 분명하다. 울트론의 신경망은 차갑고 푸르며 가차 없이 정밀한 반면, 금관악기의 온화한 금빛을 띤 자비스의 그것은 둥글게 얽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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