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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 cross] 내 안에 <자학의 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송경원 사진 오계옥 2015-05-04

<두 번 본 영화> 그리는 웹툰 작가 난다

열 번째 시즌을 시작한 <어쿠스틱 라이프>의 난다 작가가 <두 번 본 영화>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연재를 시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진정 몸에 잘 맞는 옷을 찾아 입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천천히 감상하고 느긋하게 풀어놓는 ‘어쿠스틱’한 영화 웹툰이 탄생했다. 영화를 말하는 만화는 많지만 이토록 사적이고 사소한 지점에서 영화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는 작품은 드물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데 꽂혀 수십번 말을 건 끝에라야 깨달을 수 있는 취향의 발견. 까칠하고 예민한 20대 여성에서 이제는 쌀이 엄마로 거듭난 난다 작가에게 <두 번 본 영화>의 매력에 대해 물었다.

-무려 시즌10, 횟수로는 200화를 돌파했다. 새삼 되돌아본다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연재 중일 땐 소재 고갈, 에너지 고갈 때문에 대체로 바닥에 붙어 있는 상태다. (웃음) 그렇게 쥐어짜내는 기분으로 버티다가도 막상 시즌이 끝나고 시간이 생기면 또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것들이 쌓인다. 이번에는 육아를 위해 7개월 정도 긴 시간을 쉬어서 그런지 쌓인 내용들도 좀더 많아졌다. 신인 작가들은 시즌 사이에 혹여 독자들로부터 잊힐까 불안해하기도 한다. <어쿠스틱 라이프>는 꽤 장기 연재를 한 편이라 이제는 쉬는 동안에도 그렇게까지 초조하진 않다. 할 땐 쉬고 싶고 쉴 땐 일하고 싶고. (웃음) 그런 식으로 하다 보니 어김없이 오늘이 왔다.

-원고가 펑크났을 때나 소재가 바닥났을 때, 아니면 정말 원고가 그리기 싫을 때는 어떻게 하나. 위기를 탈출하는 요령이 있나.

=딱히 그런 건 없다. 결국 마감이 완성시켜준다. 좋아하는 만화 중에 <울어라 펜!>이란 작품이 있는데 마감을 마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날의 괴로움을 버틴다. 딱 그 심정이다. (웃음) 다들 세이브 원고를 몇편씩 그려놓는다고 하는데 나는 안 되더라. 미리 하는 습관이 안 되어 있어서 평생 세이브 원고 못 만들어놓을 팔자다. 예전에는 마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원하는 만큼의 이야기를 완성해야 한다는 고집이 있었는데 갈수록 1순위가 마감으로 바뀌고 있는 것 같다. (웃음) 그 밖에 요령이라면 메모하는 습관 정도? 연재를 시작한 이후론 강박적으로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다. 휴대폰 메모장을 사용했는데 그나마도 메모장 켜는 사이에 까먹는 것들이 있어서 요즘엔 ‘1초 메모’라는 어플을 애용한다.

-임신에 대한 이야기를 단행본으로 엮은 <내가 태어날 때까지>도 재미있게 잘 봤다. 기존의 일상툰 대신 가상의 부부를 설정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임신을 주제로 한 좀더 깊은 고민과 이야기들을 마음껏 펼쳐보고 싶어서 아예 새로운 작품으로 담아냈다. 가상 캐릭터를 설정한 이유는 간단한데, <어쿠스틱 라이프>에서 일상의 거의 모든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변별점이 필요했다. 차기작으로 스토리 만화를 그리고 싶어 경험을 쌓는다는 의미도 있다.

-쌀이의 임신을 계기로 웹툰의 정서가 확실히 바뀌었다. <내가 태어날 때까지>도 그 일환으로 보인다. 이제는 ‘까칠한 유부녀 난다’보다는 ‘쌀이 엄마’가 더 어울린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 예전보다 일도 훨씬 재미있어진 것 같고. 아이는 행복이지만 막상 육아를 겪고 나니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거였구나 하고 매일 느낀다. 요즘은 내 인생 최고로 근로 의욕에 불타고 있다. (웃음) 작업 시간과 스타일도 많이 달라졌다. 그전에는 시간관념이 부족한 편이었고 주로 밤샘작업을 했는데, 요즘엔 베이비시터가 아기를 봐주는 오전 3시간 동안 작업한다. 아이가 마감이 되어준달까. 집중력이 다르다, 집중력이. (웃음)

-시즌1부터 한주도 거르지 않고 웹툰을 봤는데, 점점 착해져가는 난다를 보는 게 아직도 이상하다. (웃음)

=그런 면이 없지 않다. 일단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졌다. 예전엔 가치관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쟤는 왜 저럴까?’ 하고 관심을 끄는 편이었는데, 최근엔 이상한 사람을 보면 ‘저 사람도 누군가의 자식인데 엄마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까. 너의 이상한 점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아, 너도 대자연의 일부구나. 그렇게 흘러가는구나 하고 달관의 시점으로 보게 된다. (웃음)

-맞다. 본격 육아만화를 보고 있는 기분이다. 마치 엄마가 된 후 음악적인 색깔이 밝아진 자우림의 김윤아를 보는 기분이랄까.

=그보다는 가족만화라고 불러주면 좋겠다. 육아가 소재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이 소재다. 어쩌면 처음에는 팬들이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자학의 시>를 좋아하던 철없는 아줌마가 천사가 되어가고 있으니. 하지만 확신컨대 자우림의 김윤아씨는 본인의 생활에 아주 만족하고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변화다. 굳이 캐릭터를 내세워 연기할 필요가 없지 않나. 팬들도 결국 변화에 익숙해질 거다. 나도 처음엔 시니컬한 캐릭터가 망가지는 게 아닌지 고민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가 있는 생활이 완벽하게 녹아들어 내 일부가 됐다. 그걸 자연스럽게 보여줄 뿐이다. 물론 그럼에도 내 안에 <자학의 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하는 순간과 장소에서 불쑥 표출될지도. (웃음)

-<두 번 본 영화>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 컨셉이 재미있다.

=예스24에서 영화에 대한 웹툰 제의가 들어왔다.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하길래 듣는 순간 바로 ‘두번 본 영화’가 떠올랐다. 워낙 반복해서 보는 걸 좋아해서 사실 ‘열번, 스무번 본 영화’가 되어야 하지만 적당히 타협해서 두번으로 했다. (웃음)

-영화는 자주 보는 편인지.

=원래 영화보는 걸 좋아한다. 한동안 임신과 육아로 인해 영화를 보지 못했는데 그 반동인지 조금 여유가 생긴 얼마 전까진 일주일에 거의 3, 4편씩 봤다. 연재를 시작하곤 1, 2편 정도 본다.

-영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2003)을 다룬 2화 에피소드 중 ‘편리하고 심플한 것 대신 복잡한 사랑의 길을 선택하는 과정’이란 설명이 참 마음에 든다. 그동안 영화를 보고 나서 짧게라도 감상평을 써왔나.

=예전엔 재미없는 영화를 보고 나면 마치 내가 제작한 것처럼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냐고 신랄하고 구체적으로 작성해 블로그에 올리곤 했다. 그런데 연재를 시작한 이후엔 그게 안 되더라. 내가 만드는 입장이 되어보니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다. ‘다 사정이 있겠지’ 하고 왠지 편들어주게 된다.

-영화를 고르는 기준이 있다면.

=완성도나 감동의 크기와는 별개로 일상을 뒤흔들 만큼 울림이 큰 영화들은 잘 못 본다. 힘들어서. 연재 중엔 감동에 파묻히는 건 웬만하면 경계한다. 예를 들면 이창동 감독님 영화 같은? 그런데 그중 <>(2010)만큼은 여러 번 봤다. 시를 완성하는 엔딩의 순간은 몇번을 봐도 좋다.

-<두 번 본 영화>는 언제까지, 몇편이나 연재할 계획인가. 일상툰 이외 또 다른 차기작은 어떤 작품이 될까.

=잘릴 때까지? (웃음) 격주 일정이라 크게 무리는 없다. 반응이 좋으면 계속하고 싶다. 나중에는 아이와 함께 보면 좋은 영화도 다뤄보고 싶다. 스토리 만화는 가능하다면 <이웃집 야마다군>(1999) 같은 가족물을 그리고 싶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준비 중이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아직 시작된 건 아무것도 없다. (웃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매일매일에 충실하다 보면 언젠간 뭐가 되어 있지 않을까? 매번 마감이 작품을 완성시켜주는 것처럼 말이다.

<두 번 본 영화>

난다 작가의 영화툰 <두 번 본 영화>

두번 본 영화가 더 재미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재미있는 영화라야 두번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재미있는 영화를 모두 다 두번 보고 싶은 건 아니다. 완성도와는 별개로 오래, 자세히 보다보면 절로 사랑스러워지는 영화들이 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개봉작 속에 일회용으로 소비되는 게 대다수 영화의 운명이지만 그 와중에도 가끔, 가까이 두고 오래 사귄 벗과 같은 편안하고 익숙한 관계가 꽃핀다. 어쩌면 영화와의 만남이란 원래 느리고 천천히, 시간을 두고 발견해나가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어쿠스틱 라이프>의 ‘까칠하지만 내 가족에게는 따뜻한’ 시선처럼 말이다. 공을 들이다보면 때로 어떤 영화들은 쉽사리 보여주지 않는 소중한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놓는다. 부디 내가 발견하지 못한 그 사소한 재미들을 이 웹툰이 나서서 계속 찾아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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