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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의 경사기도권] 모두의 미래가 지켜질 수 있을까
허지웅(작가) 일러스트레이션 한차연(일러스트레이션) 2015-05-14

만화 원작의 탁월한 연출의 묘가 아쉬운 영화 <기생수>를 보고

지구에 사는 누군가가 문득 생각했다. 모든 생물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고.

다시 봐도 너무 근사한 첫 문장이 아닌가. 변형되거나 강화된 신체 이야기를 유독 좋아했던 청소년 시절. <기생수>는 언제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 가운데 하나였다. <암스>나 <가이버>도 좋지만 <기생수>에 견주기에는 너무 길고 장황했다. <기생수>만큼 스스로 제기한 화두로부터 시종일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굵고 명확하게 이야기를 맺는 작품은 드물었다. 사실 <기생수>의 첫인상은 당시로서도 새롭지 않았다. <신체강탈자의 침입>과 같은 고전이나 <악마의 손> <이블 데드>, 특히 존 카펜터의 <괴물>의 잔상이 겹쳤다. 그럼에도 달랐다. <기생수>는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인간, 임을 상기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질문 속으로 몰아넣었다(그렇게 우리는 중2병에 걸렸다).

<기생수>는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는 기생생물이 출현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기생생물은 인간의 머리를 차지하여 조종한다. 그리고 다른 인간을 잡아먹는다. 딱히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들은 인간을 잡아먹지 않아도 충분히 살 수 있다. 다른 인간들이 먹는 것을 똑같이 먹으면서 조용히 섞여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인간을 잡아먹는 건 본능 탓이다. 이들은 인간을 먹어치우라는 지상명령과 함께 태어났다. 한편 주인공 신이치에게도 기생생물이 접근한다. 그러나 작은 사고로 인해 이 기생생물은 신이치의 머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오른팔에 기생하게 된다. 그렇게 ‘오른쪽이’와 신이치의 동거가 시작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신이치는 점점 인간의 모습을 잃어간다. 반면 오른쪽이는 인간답게 변해간다.

주인공 신이치가 ‘천신일’(언제나 그렇듯이 말이 안되는데 가만 보면 또 되는 것 같은 묘한 국산 작명)로 등장하는 해적판을 처음 보았고 2000년대에 들어서야 제대로 된 완역본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기생수>를 좋아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이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무 많았다.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이의 취향을 꿰뚫는 만화였다. 그만큼 연출이 노련했다. 잔혹한 묘사 때문에 손사래를 치던 이도 책장을 몇번 들추고 나면 말을 잃었다. 오른쪽이가 신이치에게 이별을 고하고 떠나가는 순간. “꿈이라 생각하고 다 잊어버려”라며 오른쪽이가 사라지자 신이치가 손바닥을 더듬거리다 오른팔을 온몸으로 끌어안으며 절규한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 눈물! 내 뺨을 타고 내리는 이 뜨거운 눈물! 신이치가 끝내 되찾았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인간의 눈물! 우리는 모두 엉엉 울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오른쪽이와의 추억을 공유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기생수>의 영화화는 오래전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사였다. 잊을 만하면 영화화 소식이 들려왔다. 할리우드에 판권이 팔렸고 곧 영화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스무번은 들은 것 같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 또한 이상했다. 이 좋은 작품의 애니메이션 버전이 없다는 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아무튼 늘 소문은 무성했다. 결과물이 없었을 뿐이지.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벌어졌다. 지난해 말 <기생수>의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만들어져 방영되었다. 매드하우스가 제작했고 24회차로 마무리되었다. 음악도 좋고 작화와 액션이 무척 근사했다. 무엇보다 원작이 힘주어 이야기하고자 했던 틀거리를 해치지 않았다. 훌륭한 작품이었다. 작화가 많이 달라진 까닭에 원작 팬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지만 80년대 작품을 이 정도로 이질감 없이 현재에 가져와 펼쳐낸 건 상찬받아 마땅한 작업이다.

애니메이션 시리즈와 함께 영화화 작업도 진행됐다. 영화는 두편으로 나누어 만들어졌다. 지난해에 파트1이, 이번에 파트2가 공개되었다. 파트1에서는 어머니의 모습을 한 기생생물과 신이치가 맞붙는 대목까지 다루어졌다. 그 말인즉, 파트2에서는 원작 팬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할 만한 고토와 신이치의 대결이 그려진다는 이야기다.

일단은 썩 나쁘지 않다. 만화 원작을 영화로 옮겨왔을 때 자칫 사변적으로 보일 수 있는 대목들은 모두 잘려나갔다. 우다 마모루나 카나 같은 캐릭터도 삭제되었다. 가족 구성에도 변화가 있는데 특히 신이치가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덕분에 신이치의 어머니가 기생생물에게 몸을 빼앗기는 과정도 원작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어찌됐든 속도감 있는 전개를 위해 이야기와 캐릭터에 변화가 있었고, 결과물은 그럭저럭 쓸 만하다.

그간 만화 원작 일본영화들이 원작의 닮은꼴 배우를 캐스팅하는 데에만 모든 창작력과 예산을 쏟아부어 결과적으로 영화를 만든다기보다 거대한 예산 낭비를 반복해왔던 전례들에 비춰볼 때 캐스팅도 괜찮은 편이다. 신이치 역의 소메타니 쇼타는 평범하고 유약해 보이는 외양을 지녔다. 그런데 저 평범한 울상에서 괴력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나는 아직도 이 배우가 후루야 미노루의 원작을 영화화한 <두더지>에서 스미다를 연기하면서 보여주었던 반짝반짝한 표정들을 잊지 못한다. 고토 역의 아사노 다다노부는 언뜻 재미없는 선택이다. <이치 더 킬러>에서의 그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원작의 공기와는 아무래도 톤이 많이 다를 것 같다. 역시 원작의 고토와는 다르다. 그런데 그 다른 점이 아사노 다다노부만의 고토를 완성해낸다. 아무래도 성의 없는 상찬처럼 들릴 것 같은데 아니다. 아사노 다다노부는 원작의 고토처럼 근사한 대사를 마구잡이로 뱉어내는 것보다 그냥 밑도 끝도 없이 흉악한 걸 훨씬 더 잘해낸다.

다만 아쉬운 건 원작 특유의 연출의 묘를 영화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기생수>가 그토록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연출의 섬세함에서 오는 호흡 조절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타미야 료코가 공원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을 보자. 기생생물 타미야 료코가 자신을 희생해 아기를 지켜낸다. 강화된 머리카락으로 아기를 감싼 채 자신은 총탄을 맞아가며 천천히 신이치 앞으로 걸어온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여태 그것을 계속 생각해왔다고 말한다. 오늘 그것을 알았다고 말을 맺더니 이 아기를 인간들의 손으로 평범하게 길러달라고 부탁한다. 신이치가 아기를 건네받는다. 타미야 료코가 고맙다고 말한다. 고맙다는 말에 오른쪽이가 크게 놀란다. 타미야 료코가 쓰러져 죽는다. 이때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린 신이치가 감정의 동요를 일으킨다. 눈물이 차오른다. 사토미가 부르자 신이치가 고개를 돌린다. 아기를 감싸안은 채 신이치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신이치에게서 이제는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눈물이다. 눈물이 왼쪽에만 차올라 주체할 수 없이 흐르고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오른쪽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그러더니 한 줄기가 뚝, 하고 떨어져 뺨을 타고 흐른다. 독자들의 심장도 함께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진다. 기생세포가 신이치의 오른쪽 신체에 더 치중하여 분포되어 있다는 걸 감안한 연출이다.

이런 장면을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원작의 대사를 다 살려 읊어달라는 게 아니다. 그런 태도는 만화와 영화라는 매체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작품에 독이 된다. 문제는 <기생수>가 유사한 문제의식을 다룬 여타의 작품들과 크게 구별되었던 가장 큰 장점들을 이 영화에서 발견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아쉬운 노릇이다.

지구에 사는 누군가가 문득 생각했다. 모든 생물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고. 어렸을 때는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마도 신이나 초월적인 의지를 가진 무엇일 것이라 여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역시 인간이었다. 인간의 선한 의지들이 은연중에 집단화되어 기생생물을 만들었고,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의 목적에 대해 상기하게 한 것이다. 다만, 그것으로 괜찮을까. 천적이 없는 종으로서 인간이란 애초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된 존재일까. 그것이 거대담론 속의 인간이든 일상 안의 소시민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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