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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레볼루셔너리 로드
김혜리 2015-06-11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여름의 판타지아>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태훈(임형국)과 미정(김새벽)은, 점점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일본 나라현의 소도시 고조를 찾아, 그곳에 괸 삶의 이야기를 영화로 찍고자 한다. 영화를 여는 42년 된 동네 식당의 실내 전경숏은,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주인공이 특정 인물이 아니라 장소임을 말한다. 동시에 그 장소의 특질도 요약한다. 이 장면에서 손님들은 테이블 맞은편의 동행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주인을 포함해 가게 전체가 특정 상대 없이 고즈넉이 말을 주고받는다. 안주인은 아예 손님 사이에 섞여 있다. 자막도 없어서 우리가 듣는 것은 오직 부드러운 웅성임이다. 얼핏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듯, 영화의 요체를 암시하는 서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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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이하 <분노의 도로>)의 ‘Fury Road’에는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의 길’이라는 뜻도 있었다. <분노의 도로>는 맥스(톰 하디)의 시타델 탈출기와 퓨리오사의 탈주/혁명기를 포개놓는 구조를 취한다. 배우 크레딧에서도 샤를리즈 테론과 톰 하디의 이름은 동시에 뜬다. 그러나 이번 영화를 움직이는 의지와 감정은 단연 퓨리오사로부터 나온다. 맥스는 <분노의 도로>의 제1주인공이 아닐뿐더러 캐릭터의 궤적이 낳는 임팩트로 치면 눅스(니콜라스 홀트)에게도 밀린다. 하지만 이 사실은 시리즈 주인장으로서 맥스의 자리를 위태롭게 하지는 않는다. 맥스의 시점에서 찍은 퓨리오사의 모습이 이 영화의 마지막 숏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매드맥스> 연작은 원래 좀 그랬다. 아내와 아이를 잃은 사내의 복수극이었던 <매드맥스>(1979)를 제외하면, 2편과 3편의 맥스(멜 깁슨) 역시 우연히 마주친 낯선 공동체에 휘말려 전투에 가담하는 방랑자였다. 서부극으로 치면 셰인, TV시리즈로 치면 <도망자> 속 닥터 킴블이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터라 웹에서 접한 국내외 일부 남성 관객의 “우리의 소중한 <매드맥스>를 부당하게 여자들에게 도둑맞고 속아서 관람했다!”는 반응은 좀 뜻밖이었다. 한데 그들이 표명하는 스트레스와 좌절감은, 거꾸로 지금껏 대다수의 남성 지배적 액션영화를 보러 갔을 때 여성 관객으로서 내가 극장 입구에서 자동적으로 수행해온 ‘스위치 끄기’ 절차를 환기시켰다. 말하자면 이런 소리다. 영화학자 로라 멀비가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시네마>에서 썼던 대로, 액션 장르영화를 보러 간 여성 관객은 젠더 정체성을 잠시 잊고 남성 주/조연 캐릭터에 상상으로 동일시해야 영화의 쾌감을 최대한 만끽할 수 있다. 흥미진진한 갈등과 근사한 활약은 모조리 남성 인물의 몫이고 여성 캐릭터들은 이야기 주변부로 밀려나 필요할 때 ‘계기’로 동원되거나 해결돼야 할 ‘문제’가 되거나 최악의 경우 모욕당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액션영화를 싫어한다. 액션 연출은 더군다나 못한다”는 통념은 뒤집어볼 필요가 있다. 여성 관객이 액션 장르를 덜 선호하는 게 사실이라면 그 까닭은 과연 태생적으로 폭력을 못 견디는 여린 평화주의자라서일까? 혹시 영화를 보는 동안 그녀들의 욕망을 자연스럽게 투사하고 몰입할 만한 동일한 젠더의 캐릭터가 스크린에 부재하고 부족해서는 아닐까?

일부 남자 관객의 낙담에도 아랑곳없이, 내 눈에 톰 하디의 맥스는 ‘올해의 남성’ 후보이며 충분히 영웅적이다. 확실히 <분노의 도로>의 맥스는 30년 전 멜 깁슨에 비교하면 히어로치고 모양 빠지는 상황을 많이 겪는다. 영화 초반 장시간 재갈이 물려 자동차 앞에 비끄러매지는가 하면, 퓨리오사가 발목을 잡아준 덕분에 거꾸로 매달려 간신히 살아남는 상황도 있다. 그러나 맥스는 진화된 방식으로 남자답고 영웅적이다. 이 영화에서 맥스의 매력이 절정에 달하는 대목은, 그가 멋진 액션을 독점하는 세트 피스가 아니라, 두 차례 오발 끝에 마지막 총탄이 남은 라이플을 등 뒤로 말없이 다가온 퓨리오사에게 넘기고 한팔이 없는 그녀의 조준을 위해 두툼한 어깨를 대주는 장면이다(이것이 <분노의 도로>를 통틀어 두 남녀 주인공이 육체적으로 가장 밀착한 순간이다!). “내가 쏠게”라는 제안도 “당신이 쏴”라는 양보의 말도 생략돼 있다. 어색한 자존심 저울질도 없다. 훈련된 전문 사수가 쏘는 편이 합리적이니 그렇게 할 뿐이다. 곧이어 맥스는 일행을 두고 어둠 속의 적을 향해 홀로 떠났다가 전리품을 지고 돌아온다. 출발할 때 댁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퓨리오사의 질문에 맥스는 무슨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그냥 가”라고 답했다. 나는 결코 이 스토리의 필수불가결한 주인공이 아니라는 확인 같다. 맥스는 영웅을 자처하지 않으면서 영웅적 일들을 해낸다. 여기서 조지 밀러 감독은 놀랍게도, 적진에 침투한, 아마도 화려했을 맥스의 단독 액션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카메라는 퓨리오사 일행 곁을 계속 지키다가 피에 젖어 귀환한 맥스를 마중함으로써 영화의 중심을 재차 못 박는다. 이에 앞서 맥스는 스플렌디드(로지 헌팅턴 휘틀리)가 달리는 차에 걸린 사슬을 끊어 자기를 구하자, 감격하거나 칭찬하는 대신 담백하게 엄지를 들어 인정한다. 하지만 고마운 그녀가 차에서 추락했을 때는 미인을 구하는 기사가 되는 대신 “바퀴 밑으로 들어갔어”라고 퓨리오사에게 정보만 전달한다. 동반 여성 캐릭터를 보호하거나 사랑하지 않은 채 존중하면서 필요한 일을 나눠 하는 남성 영웅으로서 톰 하디의 연기는 부족함이 없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와 이 영화만 보고 톰 하디를 어슷비슷하게 둔탁한 연기만 하는 배우라고 단정하는 관객에겐, <분노의 도로>의 대사 분량 100배에 달하는 말을 이 배우가 자동차 핸들 뒤에서 85분간 쏟아내는 모노드라마 <로크>를 권하는 것으로 반박을 대신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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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도로>의 말없음에 대해 말해야 할 순서다. 조지 밀러 감독은 스토리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를 말로 설명하는 데에 관심이 없다(두 무관심은 전혀 다르다). 예컨대 긴 몽타주로 미래 세계를 소개한 2편 <매드맥스2: 로드 워리어>와 대조적으로 <분노의 도로>는 22세기 지구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머리 둘 달린 도마뱀 한 마리와 그를 집어 날로 먹는 맥스의 행위로 뚝딱 제시한다. 맥스가 끌려간 시타델의 정치 체제도 마찬가지다. 보통 영화라면 시타델의 사회구조는 지배자 임모탄 조(휴 키스 번)와 부하의 대화로 관객에게 간접 브리핑됐을 가능성이 높다. 조지 밀러는 다 집어치우고 그냥 보여준다. 신이 비를 내리듯 아쿠아 콜라(물)를 낮은 땅의 인민에게 퍼붓는 의례, 유축기에 가슴을 물린 여자들의 동굴, 지배•피지배 계급을 막론하고 병에 찌든 육신들을 보며, 관객은 시타델이 돌아가는 원리를 눈치껏 파악한다. 사물과 인간의 작명법도 의미심장하다. 사람의 직업은 ‘씨받이’, ‘워보이’, ‘피주머니’로, 지명은 ‘석유촌’, ‘총탄 농장’이라 불리는 이 세계에서 문명인의 완곡어법은 잉여분의 사치가 된 지 오래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자원 독점, 유사 종교, 이족간의 분업 및 물물교환, 지배층끼리의 공조, 유전자 개량…. 영화가 무심하게 다음 장애물을 돌파하고 다음, 그 다음 1마일을 달려나가는 동안 22세기의 세계상은 우리 머릿속에서 키워드를 하나씩 더하고 퍼즐을 완성한다.

‘Every picture tells a story.’ 로드 스튜어트의 유명한 앨범 제목은 <분노의 도로>의 슬로건이 될 만하다. <분노의 도로>를 이루는 모든 이미지는 스토리를 내포한다. 사막에서 부상당한 맥스가 상처의 피를 유조차에서 흘러나오는 젖으로 씻어내는 숏에는 한줄의 시(詩)가 깃들어 있다. 영감과 위트로 세부를 매만진 소품과 메이크업은 의도한 이야기 너머를 우리가 상상하도록 자극한다. 예컨대 워보이의 외양을 보자. 삭발한 얼굴을 백랍처럼 칠하고 눈가를 까맣게 강조한 그들의 모습은 알고 보면 죽어서 ‘발할라’로 들림 받기를 원하는 자들의 해골 코스프레다. 전투 중 피어오르는 색색의 스모크는 생뚱맞은 호들갑인 듯하지만, 짚어보면 통신망이 사라진 시대에 자연히 부활한 봉화다. 번지점프 와이어에 매달려 라이브 연주로 진군을 독려하는 기타리스트는 어떤가.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웃자고 넣은 난센스처럼 보이지만 부족사회로 퇴행한 시대의 전장에 썩 어울리기도 한다. 19세기 이전 전쟁터에서 북치고 백파이프를 불었던 병사들처럼. 이 캐릭터와 ‘드럼 사병’들의 연주는 액션영화에서는 드물게도 화면 안에서 전투를 반주하는 동시에 추격이 소강상태에 빠졌을 때에는 원경의 사운드로 임모탄 군대가 어디쯤 왔는지 가늠하게 해주는 기능도 한다. 굶주리고 병든 시대에도 사람들은 장식을 하고 의례를 치른다. 완벽히 아름다운 세계를 파괴해놓고도 자기들은 살아보겠다고 어떻게 해서든 한줌의 아름다움을 지어내려고 발버둥친다. 단검을 변형한 기어봉, 차체 아래에 더덕더덕 붙은 해골, 뼈로 만들어진 손잡이. <분노의 도로>에 등장하는 수많은 차량들은 관객이 알아차리건 말건 제각기 사연을 장착하고 모래 먼지 속을 달린다. 나아가 낱낱이 해명되지 않은 시각적 ‘떡밥’들은 텍스트를 풍부하게 만든다. 가미카제 같은 자살 공격을 앞두고 입에 크롬 스프레이를 뿌리는 워보이들의 행위는 누가 어떻게 최초로 시작한 걸까? 기타 치는 병사는 어쩌다 눈이 멀었을까? 임무를 위해? 아니면 거꾸로 눈이 멀어서 소명을 받게 됐을까?

<분노의 도로>의 상상력이 다 이런 식이다. 얼핏 보면 미친 것 같은데 극중 세계의 현실과 논리에 가만히 비추어보면 또 그럭저럭 말이 된다. 인물들의 과묵함도 마찬가지다. 시시콜콜한 데에 연연하지 않고 커뮤니케이션은 눈빛 교환으로 해결하는 맥스와 퓨리오사의 성격도 성격이지만 어느 인물도 수다스럽지 않은 까닭은 교육과 문화가 절멸한 탓도 있을 터다. 어휘는 제한적이고 달변가는 아무도 없다. 동식물을 포함한 사물의 다수가 사라져버렸기에 단어도 자연 감소했을 것이다. 나는 극중 인물이 수렁에 빠진 트럭을 묶을 나무를 보고 금방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듯 ‘저것’이라고 지칭하는 장면에서 치밀하게 의도된 대사가 아닐까 잠시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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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매드맥스>도 기념비적 카체이스영화였지만 저예산이 원수라 정작 차끼리 충돌하는 모멘트는 편집으로 무마한 대목도 심심찮게 보인다. 하지만 이 거칠고 조악한 면모가 작품과 어울린다는 점이 공교롭다. 누가 뭐래도 <매드맥스>는 영화 끝나기 15분 전에야 영웅이 복수할 사건이 터지는 ‘비뚤어진’ 형상의 괴작이다. 반면 <분노의 도로>는 ‘1억5천만달러를 쓰는 가장 효과적 방법’으로 기네스북에 올라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조지 밀러는 이 돈을 현장 특수효과와 스턴트, 그리고 마치 대장장이 신이 독주를 들이켜고 조립한 레고처럼 보이는 150여대의 돌연변이 차량에 쏟아넣었다. CG는 그리기보다 지우는 데에 썼다. 결과는, 관객을 한시도 안심할 수 없게 만드는 위기감과 장면의 유기성이다. 같은 날 같은 햇빛 아래서 찍은, 혹은 같은 테이크에서 조각냈다가 다시 조립된 시퀀스만이 줄 수 있는 온전한 박력이, 추격전으로 점철된 <분노의 도로>를 질리지 않게 한다. 퓨리오사가 최초로 워리그의 핸들을 틀어 노선에서 이탈하는 순간부터 터져나오는 <분노의 도로>의 모든 자동차 액션 세트 피스에는 각기 뚜렷한 목표와 내적 플롯이 있다. 덕분에 임모탄 부대, 무기 농장, 가스 타운의 무리에다가 바이크족까지 가세해 일행을 사방에서 공격하는데도 뒤죽박죽이 되지 않는다. 눈썰미 좋은 관객이라면 세번쯤 보고나면 시타델에서 광야로, 다시 시타델로 이어지는 동선의 전투 상황을 지도 위에 그릴 수도 있을 법하다.

이 영화 속 누구도 액션 히어로로서 압도적으로 강하지 않다. 응급실에서 스스로를 교육한 전직 의사답게 조지 밀러의 영화에서 원인은 반드시 결과를 낳는다. 낙상하면 골절하고 총탄이 스치면 피가 흐르고 그 피에 발이 미끄러져 트럭 바퀴 밑에 깔리고 만다. 순간 가속을 하려면 엔진에다 입으로 석유를 뿜어 넣어야 한다. 결정적으로, 대비의 아름다움을 아는 편집이 이 줄기찬 전자 기타 속주 같은 영화 안에 마음을 끄는 파동을 만들어낸다. 일대일로 드잡이를 벌이는 세부는 전투 대형의 큰 움직임과 단단히 연결되고, 가장 부드러운 교감의 순간은 거친 폭발로 애틋하게 스러진다. 폭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눅스가 골짜기에서 몸을 던져 동지들의 혈로를 뚫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대놓고 CGI 티가 나는 대목이다. 물론 전반부의 모래 폭풍 신이 실제라고 보는 관객은 없겠지만, 그 장면에서 CG의 목표는 사실성이다. 반면 사람과 사물이 사방으로 부웅 날아가는 골짜기 폭파 신은 노골적으로 관객에게 외치는 듯하다. “옜다, CG! 옜다, 3-D! 2시간 동안 여태 본 거랑 많이 다르지? 그건 리얼이었거든.” 조지 밀러 감독은 특정한 예술적 덕목에 전혀 집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독창성은 스피드, 그로테스크, 유머, 신념, 미, 추를 조합하는 자기만의 비율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분노의 도로>를 생각하면 언제나 내 마음은 떨려 올 것이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영화감독이란 얼마나 날렵한 맹수가 될 수 있는가!

<엑스 마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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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 마키나>를 뒤늦게 봤다. IT 부호 네이든(오스카 아이삭)이 보여주는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센 인간의 생활양식이 깨알 같다. 네이든이 거주하고 연구하는 맨션은 첨단 스마트 건물이지만 외관은 숲에 가려진 나무 상자다. 티는 졸부나 내는 것이다. 네이든의 집은 전면 유리벽으로 전망을 트고 천연 암벽을 그대로 실내에 끌어들였는데, 그 자연도 몽땅 네이든 명의라는 점이 어처구니없다. 자연친화적인데 자연을 독점한다. 사교도 엄연한 노동이므로 네이든은 혼자 만취했다가 혼자 웨이트 운동으로 숙취를 해소하길 반복한다. 집요하게 몸을 만들지만 육체를 사랑해서라기보다 혐오하기 때문에 컨트롤하려는 것 같다. 줄곧 맨발에 옷은 펑퍼짐하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 없는 유아독존 최강자이므로 재질만 최고급에 편하면 그만이다. 미술품 수집은 기본이지만 투자 목적조차 아니라는 대목에서 네이든은 평범한 부자와 차별화된다. 잭슨 폴록의 유화 앞에서 장광설을 늘어놓던 그는 단지 자기 논점을 강조하기 위해 회의실 칠판인 양 캔버스에 함부로 손을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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