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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삶, 질감을 영화에 담고 싶다”
이주현 사진 오계옥 2015-06-18

<한여름의 판타지아> 장건재 감독 인터뷰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거창한 이야기는 잘 안 쓰게 되던가.

=<회오리 바람> <잠 못 드는 밤>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준비하기 전에 늘 다른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드라마의 힘도 있고, 장르적인 요소도 강한 작품들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준비하던 영화들이 잘 진행되지 않으면서 ‘미완의 프로젝트’ 폴더에 들어 있던 작품들이 먼저 세상에 나오게 됐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도 나라국제영화제로부터 갑자기 제안받아 시작한 프로젝트다. 준비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무리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만들려고 했다. 그게 지금까지 만든 세 영화들의 공통된 작업 목표이기도 했다.

-원래 준비하던 것은 어떤 작품들이었나.

=박민규 작가의 팬인데, <회오리 바람> 전엔 박민규의 소설 <핑퐁>을 영화화하려 했다. 언제가 됐건 <핑퐁>은 무조건 내가 영화로 만들 생각이다. 영화로 만들기엔 이야기가 난해해서 아무도 판권을 사지 않을 것 같다. (웃음) <잠 못 드는 밤> 전에는 결혼 10년차 된 중년 부부의 이야기를 SF 장르로 준비했었다. <한여름의 판타지아> 이전엔 영화감독이 주인공인 영화를 준비 중이었고.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나라국제영화제에서 지원을 받아 제작했다. 나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인 가와세 나오미 감독으로부터 제안받은 것으로 아는데.

=나라국제영화제는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만든 영화제이고, 격년제로 열린다. 영화제가 열리지 않는 시기에 제작지원 프로젝트인 NARAtive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참여 기회는 전해 경쟁부문 수상 감독에게 돌아간다. <잠 못 드는 밤>이 2회 경쟁부문 출품작인데, 수상은 못했었다. 그런데 2회 수상자인 뉴질랜드 감독이 NARAtive 프로젝트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내게 제안이 왔다. 나중에 가와세 나오미 감독에게 왜 나였냐고 물어보니, 당시 경쟁부문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잠 못 드는 밤>이 많이 언급됐었다고 하더라. 난 또 일본이랑 가까워서 제안한 줄 알았다. (웃음)

-촬영, 조명, 조연출 등 주요 현장 스탭을 일본 스탭들로 꾸렸다. 일본의 촬영감독과 작업한 것은 일본의 공간에 대한, 고조시라는 지역에 대한 이해가 깊을 것 같아서였나.

=오히려 그 점을 경계했다. 공간에 대한 선입견 없이, 나만의 시선으로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처음엔 한국 촬영감독과 작업하겠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여러 사정상 그러지 못했고,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추천한 후지이 마사유키 촬영감독과 함께했다. 나만의 두려움일 수도 있는데, 나라현이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세트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어떻게 앵글을 잡아도 가와세 영화의 인서트를 보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후지이 마사유키 촬영감독한테도 종종 “안 됩니다. 이건 가와세 나오미 숏이에요”라는 얘기를 많이 했다. 가와세 나오미의 흔적이 보이면 안 된다는 강박 때문에 의식적으로 다른 앵글, 다른 숏을 찾으려 했다.

-시나리오와 콘티 없이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촬영하는 방식을 일본 스탭들은 굉장히 낯설어했을 것 같다.

=초반엔 영화에만 집중하느라 일본 스탭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도 몰랐다. (웃음) 그러다가 불만과 문제제기가 들어왔고 스탭들을 모아서 얘기했다. 이건 원래 내 스타일도 아니고, 한국 감독들의 일반적인 스타일도 아니다. 다만 이 영화가 요구하는 방식이 그럴 뿐이다. 이해해달라. 그 뒤론 일본 스탭들도 현장에 잘 적응했고, 나 역시 큰 어려움 없이 촬영할 수 있었다.

-혜정과 유스케의 키스 신에서 혜정이 자신의 연락처를 유스케의 팔목 안쪽에 적는 장면이 특히 로맨틱했다. 손바닥에 적을까 손등에 적을까 하다 결국 팔목 안쪽에 적는데, 지금 보니 당신의 손등에 볼펜으로 메모한 흔적이 있다. 배우들에게 디테일한 부분까지 주문한 건가.

=까먹을까봐 손등에 연락처 같은 걸 잘 적는데, 그 장면은 배우들이 만들었다. (김)새벽씨한테는 유스케의 손등에 연락처를 적으라고만 했다. 그런데 손등보다 더 민감한 부분인 팔목 안쪽에 적더라. 그게 유스케를 자극한 게 아닌가 싶다. (웃음)

-그 신에서 두 배우한테 서로 다른 디렉션을 줬다고.

=원래는 두 사람이 인사만 하고 헤어지는 거였는데,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이와세 료한테 새벽씨에게 입을 맞춰보라고 했다. 새벽씨는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고. 컷 하고 난 뒤 새벽씨한테 혼났다. (웃음) 사전에 배우와 스탭들한테 “이 장면은 딱 한번밖에 안 찍을 거다, 기술적으로 문제 없게 해달라”고 당부했는데, 그래서 새벽씨도 당황스러웠지만 끝까지 연기를 해준 것 같다.

-김새벽 배우는 어떻게 캐스팅했나.

=지인들에게 일본어가 가능한 여배우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누군가는 보아를 추천하기도 했고. (웃음) 그러다 친한 감독인 김경묵 감독이 <줄탁동시>(2011) 때 함께했던 새벽씨를 추천해줬다. 내가 본 새벽씨의 아름다움, 기존의 모습과 다른 면을 이번 영화에 담고 싶었다. 이와세 료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였다. 서로 말은 안 통하는데, 나는 한국어로, 이와세 료는 일본어로 세 시간씩 영화 얘기를 하며 수다떤 적도 있다.

-영향받은 감독이 있나.

=최근 5~6년 사이 영향받은 감독은 <>(1989)와 <>(1997), 그리고 <행진하는 청춘>(2006) 등을 만든 페드로 코스타 감독. 그의 작업 태도, 세계관, 작품들에 크게 영향받았다.

-영화학도 시절의 취향은 어땠나.

=전형적인 시네필이었다. 영화사 책에 나오는 모든 영화를 보는 게 목표였다. 지금은 예전만큼 영화를 보지 않는다. 좀 거창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사회를 감각하려고 더 노력하는 편이다. 내가 느끼고 경험한 그 감각으로 영화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요즘 영화들을 보면, 내가 느끼는 세상과 다른 세상 이야기 같다. 이 땅의 삶, 그 질감을 영화에 담고 싶다.

-당신의 필모그래피에서 <한여름의 판타지아>가 갖는 의미가 좀 각별한가.

=우선 극장에서 개봉하는 나의 세 번째 장편영화다. 아직까지 영화로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여기까지 온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데뷔작을 만들 때도, 두 번째 작업을 할 때도 다음 작업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렇게 세 번째 작업까지 왔다. 이번 영화를 단순히 영화제 프로젝트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합작 형태로 만들어 한국의 관객에게도 영화를 소개하려 했다. 이번엔 무기력하게 끝내고 싶지 않다. 1년에 1천편의 영화가 개봉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이 영화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물론 돈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를 알릴 수 없다. (웃음) 마케팅은 돈이니까. <잠 못 드는 밤> 때는 개봉 첫날 관객이 한명도 들지 않아 무대인사가 취소된 적이 있고, <회오리 바람> 때는 나와 배우 포함해 세명이 무대에 섰는데 관객이 한명인 적도 있었다. 각오했기 때문에 슬프진 않았는데, 이번엔 좀더 많은 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면 한다.

-당분간 영화 작업을 쉬겠다고 했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새로운 영화를 찍고 싶다. 그러려면 내 모든 도구를 새로 세팅해야 한다. 장사로 비유하면, 새로운 곳에서 업종을 바꿔 다시 가게를 열려고 하는 거다. 새 가게에서도 맛있는 음식은 내놓을 수 있는 거니까. 그러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다. 최소 2년. 마치 서태지 은퇴하듯 선언하고 있는데(웃음), 좋은 작업을 하고 싶다. 더 길게, 더 오래. 그러려면 활시위를 놓았다가 다시 당기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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