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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 cross] 편견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
이예지 사진 오계옥 2015-07-06

<젖은 잡지> 편집장 정두리

독립 도색잡지를 표방한 <젖은 잡지>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3호 판매량은 1천부를 넘겼고 4호는 선주문 694부를 기록했다. <젖은 잡지>의 편집장 정두리는 청순하고 사랑스러운 외모와 대비되는 반전 몸매로 2014년 ‘미스 맥심’에 선정되기도 한 인물. 미술을 전공한 그녀는 모델, 아프리카 BJ, 야설 작가, 잡지 편집자 등 여러 영역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는 중이다. 페미니스트로서 SNS에서 여성혐오에 맞서는 행보를 보여왔으며, 최근엔 데이트 폭력을 당했던 사실을 고백하며 경고의 전언을 보내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인천 송도의 한 카페에서, 프랑스의 캉 셰르부 보자르 대학을 휴학하고 <젖은 잡지> 다음호 출간에 몰두하고 있다는 그녀를 만났다.

-<젖은 잡지>를 창간하여 4호까지 이르렀다. 다양한 성적 욕망을 담은 콘텐츠들을 다루고 있는데 창간 동기는 무엇이었나.

=미대 학부 때부터 섹슈얼리티에 대한 주제로 작업을 해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세상과 직접 부딪치면서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사회에서 소외받는 타자와 소수자의 욕망에 대해 다루고 싶었는데 여성의 시각에만 한정하고 싶진 않았다. 사실 여성이 성적주체가 된다고 하면 뻔하게 보는 편견이 있지 않나. 젊은 여성이 주체가 되어 성인 콘텐츠를 다룰 때, 사적인 경험에 대해 자극적이고 노골적인 화법으로 털어놓길 원하는 시선이 있다. 나는 그런 기대를 채워줄 생각이 없다. 스스로가 20대 여성임을 부각시키는 걸 원치 않고, 수위가 높고 하드한 주제여도 잔잔하게 이야기하는 화법을 택했다.

-4호는 선주문만 694부에 이르렀다고 들었다. 독립잡지로서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 것 같나.

=<젖은 잡지>는 개인 작업의 연장선이어서 수익을 내겠다는 생각은 못했다. 2013년 8월에 자비로 1호를 100부 만들었고, 그 후 텀블벅 펀딩을 받아서 몇 백부 더 발행했다. 이어 2014년 3월에 2호를 만들 때까지는 자비 출판이었고 수익이 나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에 3호를 냈는데, 이때는 미스 맥심에 선정된 특수를 누렸는지 1천부가량 판매되면서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그 수익금으로 2015년 6월에 4호를 출판했고 선주문만 700부 가까이 들어왔다. 4호의 성공은 어느 것에도 기대지 않은 온전한 <젖은 잡지>의 성공인 것 같다. <젖은 잡지>가 잘될 수 있던 이유는, 글쎄, 대중매체의 일반화되고 상품화된 성에 염증을 느낀 독자들이 예술에 대한 열망에 목말랐던 것이 아닐까. 또한 동성애 등 터부시하는 주제에 대해 거침없이 접근한 것이 해방감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4호의 주제는 정두리 편집장이 ‘인생 테마’라고 정의한 ‘백합’(여성간의 관계를 다룬 퀴어물)이었다. LGBT 문제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 사회에서 욕망과 사랑을 이야기할 때 가장 박해받는 존재는 아마도 LGBT일 것이다. 중학생 때 제일 친한 친구가 게이였다. 동급생들에게 괴롭힘당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웠다. 나 역시 타자로서 억눌려온 존재이기에 박해받는 이들을 대변하고 싶다. 장르로서의 백합을 좋아하기도 한다. 사회적 금기 때문에 더 애절하지 않나.

-아프리카TV에서 BJ 활동을 하고, 2014년 미스 맥심에 선정되고, 웹에 야설을 연재하고, <젖은 잡지>를 창간하는 등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다. 각각의 목적이 궁금하다. 또 이런 활동들을 통해 지향하려는 바는 무엇인가.

=아프리카TV BJ는 일종의 실험이었다. 그곳에서 여성은 보여주고 남성은 관음한다. 성매매 프레임 안에서 별창(별풍선 창녀의 줄임말로, 여성 BJ를 비하하여 지칭하는 말)이라는 단어도 파생됐다. 그 안에 들어가서 관습적 코드들을 답습하고 배신하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일반 BJ들이 하듯이 별풍선을 주면 애교를 부리다가, 어느 날부터는 화면을 꺼버리거나 했다. 그 과정에서 여성이 수동적으로 보여지는 위치가 아니라 주도적으로 자신을 보여주는 위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의 전환을 했다. 미스 맥심에 출전한 것은 <젖은 잡지>의 인쇄비를 벌고 홍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비판도 있었으나 고질적인 성녀와 창녀 이분법은 답답한 지점이다. 이른바 페미니스트라는 사람들조차 남자들의 시선 안에서 포획당하는 여자들에 대해 배타적이다. 페미니스트이지만 BJ도 하고 맥심 모델도 할 수 있다. 야설 연재는 ‘북팔’이라는 사이트에서 1호에 실었던 <아이들의 시간>을 연재할 것을 제안하여 하게 됐다.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그 영역을 넘나드는 것에 매력을 느낀다. 정체성을 한 가지로 규정한다는 것은 곧 편견을 만나는 일이다.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편견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야설을 쓰거나 화보를 찍을 때 여성의 욕망을 주체로 내세우기 위해 하는 시도들이 있나.

=스스로 컨셉을 잡고, 장소와 포토그래퍼를 섭외하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나를 보여준다. 남자들의 욕망에만 맞추는 게 아니라 나 역시도 욕망을 실현시키는 거다. 시선의 권력을 도치함으로써 여성에게도 다양한 성적 욕망과 화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의한다. 여성혐오가 만연한 현 시대에서 이는 어떤 의미인가.

=페미니스트는 사회 속 타자나 약자를 향한 모든 종류의 폭력과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이다. 어릴 적 프라티바 파마의 <팝의 여전사>(1998)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거기엔 미국소녀들의 인터뷰가 나오는데, 남자친구가 있고 패션잡지를 읽더라도 페미니스트일 수 있다고 말하더라. 그 덕에 나도 페미니스트일 수 있구나 깨달았다. 페미니즘에 기반을 둔 대안학교에 다녀 그것에 익숙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 대학에 가서 사람들에게 페미니스트라고 했더니 비웃더라. 이때 한국 사회가 여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식수준이 낮다는 걸 알게 됐다. 한국의 여성혐오는 이제껏 쭉 있어왔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더 불거져 보이는 것일 뿐이다. 요즘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해시태그 운동이 열풍인데 무척 기쁘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칭하고 거기서 오는 기쁨을 더 많이 느꼈으면 좋겠다.

-최근 이런 해시태그 운동을 비롯해 여성들이 반격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어느 때보다 페미니즘 이슈가 활발하게 논의 중인데, 여성들의 메르스갤러리(이하 메갤)의 점령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기쁜 일이다. 메갤을 보고 남자혐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메갤을 남성혐오라고 본다면 그건 여성혐오를 자백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메갤은 여성혐오에 대한 미러링(거울처럼 현상을 똑같이 보여주며 풍자하는 것)을 하며 눈높이 교육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첫 단계니 다소 과격할 수밖에 없는 점은 있다. 놀라웠던 것은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사람이 아닌 불특정 다수의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후엔 여성혐오를 비추어 보여주는 거울 단계를 넘어서 나아가야 하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단계다.

-현재 이른바 진보논객들이 행한 데이트 폭력도 이슈가 되고 있다. 당신도 SNS에 데이트 폭력과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음을 밝히고, 과거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세 남자에 대해 각오하라는 전언을 남겼다. 향후 어떻게 대응할 생각인가.

=여성단체의 도움을 받아 합당한 처벌과 반성을 받아낼 계획이다. SNS에서 이야기한 이유는 이런 일들이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폭로하겠다는 목적보다는 데이트 폭력이라는 것이 페미니스트로 활동하는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향후 <젖은 잡지>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 같나. 판매 부수가 높아지면 규모를 키워 월간지 등 메이저 잡지로 갈 생각도 있나.

=모 언론기업에서 출판대행을 하고 싶다는 제안도 받았다. 편집까진 내가 하고 출판과 배포를 해주겠다는 거다. 고민이 많이 됐지만 거절했다. 언론기업이 출판대행을 하게 되면 그만큼 잡지의 내용에 관여하고 싶은 것도 있을 테니 말이다. 시스템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메이저로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계간지로 출간할 계획이다.

-<젖은 잡지> 편집장이자 페미니스트, 아티스트로서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현재 <젖은 잡지>에 열중하기 위해 휴학하고 귀국한 상태다. 작가에게 학업이 중요할지 작업이 중요할지 고민했는데 작업을 선택했다.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건 작가로서의 미술 작업이다. 그것으로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것이 목적이다.

독립 도색잡지 <젖은 잡지>

독립출판물 형태의 아트북으로 2013년 1호 출간에 이어 현재 4호까지 출간됐다. SM, LGBT 등 사회에서 금기시되거나 소외되어 있는 욕망을 야설, 만화, 화보, 학술적인 분석 등 다양한 콘텐츠로 담아낸다. <젖은 잡지>라는 이름은 여성 화자의 욕망을 ‘젖은’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 3호부터 징병제 관련 인권운동을 하며 기고가로 활동 중인 안악희 에디터가 합류했으며, 4호부터 LGBT 전문 서점 오픈을 앞두고 있는 햇빛 스튜디오가 디자인을 맡았다. 인터넷으로 주문이 가능하고 독립출판물 전문서점 유어마인드에서 직접 구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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