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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욱의 영화비평]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영화 속 공포와 슬픔에 대하여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이해영 감독의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이하 <경성학교>)을 보고 나서 뭔가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리뷰가 아닌 아주 ‘조심스런’ 단상을 적고 싶다. 영화 전체를 설명할 생각은 없고, 내가 눌려버린 어떤 이미지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건 이상할 정도로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것으로, 아니 사실 말을 꺼내기도 힘들고 정확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이미지에 놀란 피할 수 없는 ‘나-관객’의 경험에 속한다. <경성학교>에서 내게 그것은 과다한 물의 이미지이며, 물에 잠긴 소녀들의 끔찍한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들은 놀라울 정도로 영화의 홍보성 자료들, 사진들에서는 결코 보이거나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영화의 초반부터 끝까지 나를 공포에, 때로는 격한 슬픔에 잠기게 한 것들이다. 영화의 초반부 주란(박보영)과 연덕(박소담)이 호수에 빠져들게 될 때. 이미 그 순간부터 물(속에 잠긴 소녀들)의 이미지는 내게 압도적인 현실감으로 다가왔다.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그때부터 쉽지 않았다. 1930년대라는 시대적 설정이나, 회자되는 레퍼런스 영화들(굳이 말하자면 레퍼런스와 관련해 나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캐리>보다는 <분노의 악령>에 이 영화가 더 근접하다고 생각한다)의 어떤 장르성에도 회수되지 않는 이미지들이다. 그때 이미지는 이야기의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라, 반대로 이 이미지들 때문에 어떤 다른 현실과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이 이미지가 불러오는 압도적인 현실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는 가장 끔찍하면서도 처참한 현실의 이미지를 보게 된다.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지만, 그것은 4•16의 이미지이다. 이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리얼 완전한 수장룡의 날>(2013)에서 과다한 물의 이미지를 보고 3•11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관객의 경험으로 말하고 있기에, 이 이미지에 감독의 숨겨진 의도나 무의식이 있다고 말하고픈 것이 아니다. 이해영 감독은 이에 대해서 내가 아는 한, 어떤 인터뷰에서도 언급한 적은 없다. 하지만 의도와 상관없이 이 이미지들은 크라카우어가 일찍이 지적하듯이 그 끔찍함 때문에 본능적으로 우리가 보기를 거부했던 다른 사건으로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한다. 픽션의 이미지는 페르세우스의 방패에 비친 괴물의 형상처럼 우리가 그동안 회피했던 끔찍한 사건을 직시하게 만든다. 우리가 그것을 직접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무서웠던 것들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만큼 4•16 이후를 살아버린, 공포와 슬픔에 잠기게 한 영화를 아직까지, 나는 보지 못했다. 순전히 그것이 나-관객의 경험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록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보아야만 한다”.(세르주 다네)

다시 글을 쓰기 전에 인터넷에서 관객이 남긴 짧은 글들을 살펴보았고 몇편의 글을 찾아 읽었다. 비슷한 느낌을 전한 이들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럴 땐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2000)의 대사가 떠오른다. “내가 보는 것을 당신도 보고 있나요?” 영화를 보는 체험은 원리적으로 동등할 수 없다. 이는 지적인 능력의 문제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우리가 마주하는 이미지에 대한 감정적, 정동적 충격은 서로 제각각이기 마련이다. 결국 나의 과민한 반응에 대해 말해야만 할 것이다. 마치 영화에서 주란이 과민하게 무언가 끔찍한 것들을 계속 보았던 것처럼 말이다(나는 주란의 운동력보다 환각능력,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보는 능력에 주목하고 싶다. 이와 연관된 찢겨진 일기장, 흑백사진, 기록 영상과 영사기,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낡은 축음기와 같은 기록-표상 장치들도 이채롭다. 이에 대해서는 더 설명이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앞서 <씨네21> 1010호에 실린, 같은 영화에 대한 이지현 평론가의 ‘판타지의 파괴’라는 글을 잠깐 언급하고 싶은데, 생각이 다른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지현 평론가는 “사회의 일상적 공포를 드러내려 호러를 활용했던 2000년대 초반과 달리, 이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은유가 아닌 과학적 해석을 시도한다”고 지적하고는, 이 영화의 “미스터리함이 불러온 서스펜스, 산 자와 죽은 자의 공존이 켜켜이 쌓아올린 고딕풍의 공포감은 마침내 희생된 소녀들이 안치된 유리방의 폭발 장면에 이르러 산산조각난다. 만일 이것을 ‘스타일이 있지만 영혼이 부재하는 어떤 경향’을 보는 것 같다고 평하면 너무 가혹하게 들릴까?”라 결론짓는다. 이 지적과는 반대로, 나는 사회의 일상적 공포를 느꼈고, 은유 대신 (과학이 아니라) 어떤 현실성을 체험했다고 말하고 싶다. ‘영혼이 부재한 스타일’이 대체로 이미지가 내러티브에 제대로 기능하지 못함을 지적하는 것이라면, 반대로 나는 그 때문에 이미지에 사로잡혔다고 고백하고 싶다. 영화 속에 찍힌 어떤 것들이 이야기에 쉽게 환원되지 못하는 순간들에 내가 멈춰 섰기 때문이다.

가령, 영화의 중반쯤 주란은 혼자 호숫가의 낡은 배에 앉아 있다 그녀를 잡아당기는 어떤 손에 이끌려 물속에 잠기는데, 글로는 옮기기 힘들 만큼 끔찍한 장면(물에 잠긴 소녀들의 이미지)이 이어 전개된다. 내가 이 이미지에 큰 공포를 느낀 것은 이 순간 어떤 마주할 수 없는 (금지된) 이미지와 맞닥뜨리는 충격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공포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끔찍함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나는 공포영화의 ‘공포’에 언제나 사로잡힌다. 공포의 이미지는 금기를 넘어서게 하기에 강력하다. 이 끔찍한 이미지는 내러티브에 (아직) 소환되지 못하고 급작스러운 직접성과 충격적인 진실성으로 다가온다. 주란은 영화에서 물에 두번 빠지는데, 처음 그것은 자신의 건강함에, 기쁜 마음에 연덕에게 달려들 때이다. 이 순간 우리는 주란의 손수건이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볼 뿐 그들이 물속에서 나오는 장면을 보지 못한다. 이 장면이 다시 내러티브에 소환되는 지점은 꽤 나중이다. 영화의 끝 무렵 연덕이 온몸이 쇠사슬로 묶인 채 수족관에 차오르는 물에서 구제되지 못해 고통스럽게 죽어가기 직전(이는 정말 끔찍한 순간이다), 그리고 주란이 의식불명 상태에서 깨어나기 전, 마치 꿈처럼 두 소녀가 물 바깥으로 나오는 장면이 이어진다. 현실에서 이들은 죽음에 처했다. 나는 이때 물(속에 잠긴 소녀들)의 이미지가 내러티브가 요구하는 ‘스타일’을 넘어서, 그 자체가 스스로 폭로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느꼈다. 이 이미지들은 현실과 이어진 탯줄이 아직 잘려나가지 못한, 그래서 내러티브에 귀환하는 시간을 더디게 하면서 스크린 위에 떠도는 일종의 유령처럼, 너무나 무섭기 때문에 끊임없이 보았지만 제대로 주시할 수 없었던 현실을 우리의 기억에서 떠올리게 한다. 구제할 수 없었던 현실. 4•16의 공포의 거울효과. 이 무섭고 끔찍한 이미지는 그러므로 어떤 은유로 기능하지 못하고, 그렇기에 나는 이 영화에 대한 어떤 난해한(하지만 손쉬운) 정신분석적, 기호적 접근들에 아무런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내러티브 독해와 구제의 결말이 관심사가 아니다. 영화는 가차없이 잔혹한 결말로, 소녀들의 죽음으로 치닫고 어떤 구제의 시도로 마감하지 않는다. 기혹한 결말이다. 하지만 반대의 지점에서 이 영화는 저항적이라 생각한다. 내러티브의 손쉬운 구제가 아니라 우리를 끔찍하고 무서운 일로, 여전히 비가시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가장 강력한 금기와 마주하도록 하기에 그렇다. 크라카우어가 지적하듯이 페르세우스의 최대 공적은 메두사의 목을 잘라낸 것에 있지 않다. 공포에 저항해 방패에 비친 어떤 끔찍한 상을 본 것에 있다. 이 끔찍한 이미지는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4•16의 끔찍한 현실이 남긴 어떤 흔적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해영 감독의 <경성학교>는 4•16 이후 영상체험의 변화를 큰 충격으로 느끼게 한 영화로 남았다. 영화를 침수로 끌어가는 4•16의 이미지, 우리의 무의식의 공포. 슬픈 일이지만, 이제 우리는 그 이전의 시각이나 영상의 감수성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주란이 연덕을 끌어안고 비록 ‘이제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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