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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경의 영화비평] 소녀의 흡혈이 의미하는 것

현대적 경쾌함과 고전적 그로테스크의 조합으로 탄생한 새로운 뱀파이어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스트라이프 티셔츠, 차도르, 스케이트보드, 고양이, 이 네 가지는 ‘악의 도시’에 살고 있는 뱀파이어 소녀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조건들이다. 애나 릴리 아미푸르 감독의 데뷔작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의 참신함은 스토리가 아니라 강렬한 이미지들을 결합하는 스타일에 있다. 스트라이프 티셔츠 위에 차도르를 뒤집어쓴 뱀파이어 소녀가 인적 없는 밤거리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달리는 모습은 현대적인 경쾌함과 고전적인 그로테스크의 경이로운 조합이다. 고전 설화부터 근대의 고딕소설로 이어지던 뱀파이어 이야기는 영화의 등장 이후 호러 장르의 가장 매혹적인 소재가 되었다. 인간의 피를 먹고 영원히 죽지 않는 뱀파이어는 두렵고 낯선 존재이기에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TV드라마의 주요 캐릭터로 뱀파이어가 나올 만큼 친숙해졌다.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는 본디 낯설었던 것이 마치 일상의 존재처럼 가까워져버렸을 때 그것을 다시 비일상적인 존재로 환원시키는 하나의 해법을 제시한다.

타락한 성인 남성들에 대한 응징

흑백 화면으로 찍은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의 시공간은 모호하다. 단지 ‘악의 도시’(bad city)라고 지칭되는 공간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미국을 매우 낯선 공간으로 묘사한 짐 자무시의 <천국보다 낯선>의 흑백 화면을 연상시킨다. 더구나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의 인물들은 이란어를 사용하고 있어 공간적 모호함은 한층 심화된다. 실제 촬영은 미국의 베이커스필드에서 했다고 알려졌지만 영화에서 특정 도시를 짐작하기 어렵다. 명암의 대비, 길게 드리운 그림자, 고딕 양식을 연상시키는 건축물에서 독일 표현주의를 연상하게 되고,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석유 유정의 프로펠러, 높다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밤공기를 가로지르는 화물열차, 말라버린 시냇물에서는 웨스턴과 필름누아르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애나 릴리 아미푸르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세르지오 레오네와 데이비드 린치가 로큰롤 베이비를 낳았는데, <노스페라투>가 와서 베이비시터를 한 것 같은” 작품이라고 말한다. 다소 괴이한 설명이나 그녀가 그리고자 했던 세계가 무엇인지 잘 알려주는 말이다. 장르의 혼종은 감독이 계산해서 내놓은 결과물이라기보다 자신에게 축적된 영화적 감수성이 자연스럽게 분출된 현상으로 보인다.

차도르 자락을 망토처럼 휘날리며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뱀파이어 소녀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고, 알 수 없는 시공간 속에 인물들을 배치시킨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내용은 아주 단순하다. 스토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순결한 뱀파이어 소녀가 타락한 인간 세상의 틈새에 존재한다. 소녀는 타락한 인간을 응징하는 차원에서 흡혈을 한다. 뱀파이어 소녀는 도시에서 유일하게 순수한 소년과 사랑에 빠지고 악의 도시를 탈출한다. 대사도 많지 않다. 타락한 세상에 대한 묘사도 술, 마약, 매춘에 빠진 부도덕한 인간들만이 존재한다는 정도다. 소략한 중심 스토리를 메워주는 것은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들과 종횡무진 소환되는 다양한 음악들이다. 스파게티 웨스턴에 흘러나올 법한 음악부터 팝 발라드 등 소년과 소녀가 듣는 음악이나 화면에 깔린 배경음악 역시 시공간을 초월한다. 이와 같은 시공간의 무화와 초월이 가져오는 효과는 시대와 국적을 불문하고 ‘인간 세상은 타락했다’라는 메시지의 명료화이다.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는 타락에 대한 뚜렷한 구원책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타락한 자를 구체적으로 지목하고 있다. 뱀파이어 소녀는 영화에서 세 번 사람을 죽이고 흡혈을 한다. 그녀가 죽이는 대상은 부류가 한정되어 있다. 그들은 술, 마약, 매춘에 빠진 성인 남성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뱀파이어 소녀의 첫 번째 살인과 흡혈 장면은 그녀가 ‘이빨 달린 질’(vagina dentata)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걸 잘 보여준다. 뱀파이어 소녀는 흡혈 충동이 일어날 때만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다. 첫 번째 희생자는 젊은 마약상인데 그의 온몸을 휘감은 문신 중에서도 유독 목 앞쪽에 새긴 ‘sex’라는 글자가 두드러진다. 뱀파이어 소녀는 자신을 유혹하는 그의 손가락을 입에 넣자마자 뱀파이어로 돌변해 그의 손가락을 잘라버린다. 잘린 손가락을 마약상의 입에 처넣은 뒤 소녀는 그의 목덜미를 물어 흡혈을 한다. 성적 방종에 대한 처벌이라는 의미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두 번째, 세 번째 희생자도 모두 성인 남성인데 한명은 술에 취해 뻗어 있는 거리의 부랑자이고, 다른 한명은 평생을 마약과 여자에 탕진한 노인이다. 뱀파이어 소녀는 잉여인간이라 할 수 있는 남성들을 처치하지만 소년과 여자를 희생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구걸을 하는 소년에게 “착한 아이가 되렴. 너를 평생 지켜볼 거야”라고 겁을 주지만 해치지는 않는다. 매춘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여성에게는 “당신의 슬픔”을 보았다고 위로한다. 문란한 생활을 하는 부유하고 젊은 여성들 중 아무도 희생되지 않는다. 타락한 성인 남성만을 응징하는 뱀파이어 소녀의 송곳니가 ‘이빨 달린 질’의 은유라는 점이 확실해지는 지점이다.

뱀파이어 소녀와 아라쉬가 가까워지는 모습은 위태롭다. 뱀파이어 소녀는 아라쉬와 스킨십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솟아오르는 송곳니를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린다. 아라쉬가 선물한 귀걸이를 하기 위해 옷핀으로 귀를 뚫는 장면에서 그녀의 본능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아라쉬가 소녀의 귓불을 옷핀으로 뚫는 것은 성적 행위를 상징한다. 이때 소녀의 송곳니는 매우 위협적인 상태로 변한다. 이빨 달린 질 대신 송곳니를 가진 뱀파이어 소녀에게 섹스는 곧 흡혈 행위가 된다. 소녀는 언제까지 아라쉬에게 송곳니를 감추고 지낼 수 있을까?

희망 혹은 절망, 그 어느 편으로도…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가 타락한 세상을 응징하고 구원한다는 심층적 주제를 내포하고 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아라쉬는 마약에 찌든 아버지를 돌보며 힘들게 2191일을 일해 원하던 차를 샀지만 바로 마약상에게 빼앗겼다. 영화 초반과 중반 등장하는 TV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잔인하다. “행복한 가정을 생각하십니까? 당신의 남편은 당신을 떠나거나 앓아누워버릴 수 있습니다. 이런 게 인생입니다.” 뱀파이어 소녀에게 위로받은 매춘부는 감사 인사 대신 “부자나 멍청이들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라는 신념을 건조하게 들려준다. 즉,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는 표면적으로 타락과 응징을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스토리 전개 차원의 소재로 보인다. 희망과 구원에 대해서는 유보적이다. 순수한 아라쉬만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듯 보인다.

악의 도시를 떠나는 아라쉬와 뱀파이어 소녀가 갈 곳이 있을까? 질문은 꼬리를 문다. 마지막 장면에서 급작스럽게 후미등이 켜지고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 자동차의 뒷모습은 희망 혹은 절망 어느 편으로도 기울지 않는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새>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며, 이들이 과연 악의 도시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떨쳐내기 어렵다. 또 한편으로는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뱀파이어 로맨스물 <렛미인>의 마지막 장면처럼, 예정된 슬픈 결말이 읽히기도 한다.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에는 배우 이상의 비중을 갖는 고양이가 시종일관 모습을 드러낸다. 말없이 차에 앉아 있는 아라쉬와 뱀파이어 소녀를 번갈아 쳐다보는 고양이의 시선은 알 수 없는 둘의 운명을 번갈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자 관객의 시선이 된다. 어둠이 사라지면 무엇이 나타날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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