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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의 경사기도권] 0.5초와 30년 사이
허지웅(작가) 일러스트레이션 민소원(일러스트레이션) 2015-07-09

무표정의 위대한 희극배우 버스터 키튼

버스터 키튼입니다. 성룡이 말했다. 가장 좋아하는 배우를 꼽으라는 질문에 0.5초 만에 돌아온 답변이었다. 버스터 키튼이 누구인지 모르는 리포터가 까르르 웃었다.

30년이나 늦게 도착한 박수군요. 노인이 말했다. 회고전 자리였다. 30년 전 만들어졌으나 당대에는 외면당했던 <제너럴>이 상영 중이었다. 관객이 박수를 치고 발을 구르며 웃음을 토해내는 소리를 극장 밖에서 들은 뒤였다. <사이트 앤드 사운드> 기자가 열심히 받아 적었다.

노인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1966년 2월1일. 71살이었다. 그것은 본인의 영화와 무척이나 닮은 해피엔딩이었다. 영화에서 그는 시종일관 주변으로부터 폄훼당하고 멸시당하며 무시되고 간과된다. 혹은 아예 잊혀진다. 그럼에도 그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선의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러닝타임의 마지막 1분여를 남기고 우연한 기회를 통해 복권된다. <셜록 주니어>에서 할머니의 돈을 찾아주기 위해 자기 돈을 내밀고 정작 자신은 도둑으로 몰리는 것처럼. <카메라맨>에서 자신의 실력과 선의를 입증받고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박수갈채를 받으며 도로 한복판을 걷는 것처럼. 그러니까 흡사 하루종일 폭풍우가 몰아치다가 해지기 직전 그것이 0.5초든 30년이든 아무래도 상관없을 만큼 평생에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미친 듯이 맑고 밝은 노을이

아 몰라, 저런 인생은 사양이다.

조셉 프랭크 키튼 주니어가 버스터 키튼이 된 까닭에 대해서는 본인이 여러 번 설명한 바 있다. 요컨대 어렸을 때부터 어디서 굴러떨어져도 뼈가 부러지거나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 키튼이 처음 무대에 올랐던 보드빌쇼(라고 쓰고 아동학대쇼라고 읽는다)가 인기 있었던 이유는 키튼의 아버지가 아들을 멀리 집어던지고 떨어뜨려도 어느 한구석 다치지 않기 때문이었다. 키튼에게 버스터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이 마술사 해리 후디니인지 아니면 그의 유모였는지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진술이 다르다. 다만 키튼이 알려진 것처럼 정말 뼈가 부러지지 않는 아이였던 건 아니다. 그는 어렸을 때 공연 중 오른손에 골절을 입어 평생 왼손으로 글을 써야만 했다. 버스터 키튼의 전설은 타고난 것이 아니었다. 믿을 수 없는 연습량과 시행착오, 그리고 끝까지 버티어낸 결과물이었다.

버스터 키튼은 대개 찰리 채플린과 함께 거론된다. 혹은 찰리 채플린, 해럴드 로이드와 함께 언급된다. 당대 슬랩스틱 코미디의 스리 아미고다. 채플린은 감정을 중요시했다. 로이드는 재미를 우선시했다. 키튼은 그 가운데 가장 장인에 가까웠다. 채플린이 감정과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영화를 활용했다면, 키튼은 영화라는 매체가 사실은 언제나 영화 그 이상일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몸을 활용했다. 버스터 키튼이 자기 몸을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관해서는 문자를 통해 전달할 수 없다. 오로지 영화를 통해 가능하다. 오로지 영화를 통해서 말이다.

<캐논볼> 촬영현장의 어느 스탭은 재키 챈이라는 이름의 낯선 동양 배우에게서 버스터 키튼의 바로 그런 측면을 엿보았다. 그래서 그에게 버스터 키튼을 추천한 것이었다. 키튼의 영화를 본 이후 성룡의 영화관은 영영 바뀌었다. <스팀보트 빌 주니어>나 <제너럴>에서의 저 놀라운(아마도 결코 앞으로는 가능하지 않을) 아날로그 액션 시퀀스들은 성룡뿐만 아니라 몸을 쓰는 모든 배우들로 하여금 버스터 키튼이라는 인간의 놀라움에 경탄을 바치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버스터 키튼의 진면목은 위험을 무릅쓴 슬랩스틱 액션에만 있는 게 아니다. “영화라는 매체가 사실 언제나 영화 그 이상일 수 있음을 증명”해내는 데에는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관한 충분한 성찰과 고민이 필요했다. 이것은 단지 앞에 보이는 것을 기록하는 도구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 마술인가. 영화 초창기 역사의 모든 선지자들이 그러했 듯, 키튼은 어떤 의미에서 마술사였다. 그는 <셜록 주니어>에서 이미 지금 시대의 감독들이 하는 거리두기 트릭을 선보였으며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에게 영화 속의 다른 영화를 보여주며 액자식 구성 속의 내러티브가 서로에게 상호 영향을 끼치는 장치들을 상업적으로 성공시켰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저 모든 장면은 평생 충족할 수 있는 미감의 어느 극한이다. 무성영화 전성기인 1920년대 키튼은 채플린과 굳이 견주지 않아도 저 홀로 독보적이었다.

버스터 키튼의 몰락은 20년대 후반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와 결별한 이후 MGM과 계약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제너럴>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키튼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는 사업적인 수완이나 깜냥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키튼이 자신의 스튜디오를 MGM에 매각하고 그 또한 소속 배우로 들어가겠다고 말했을 때 가장 반대했던 것은 찰리 채플린이었다. 제작과 편집에 관련된 일체의 권리를 내놓는 일이었다. 이것은 버스터 키튼의 영화에 있어서 극약 처방에 가까웠다. 채플린은 키튼이 너무나 쉽게 거대 제작사의 부속품으로 전락되어 소모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키튼은 결국 MGM으로 들어갔다. <카메라맨>과 <스파이트 메리지>를 MGM에서 내놓았다. 그것이 버스터 키튼 인생의 마지막 무성영화였다. 키튼 본인은 유성영화 환경에서도 자신이 생명력을 이어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무대 공연을 통해 다져진 실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유성이냐 무성이냐에 있지 않았다. 채플린의 예상이 맞았다. 권한의 문제였다. 키튼은 더 이상 필요 이상의 위험한 촬영을 할 수 없었다. MGM이 그것을 감당하려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스튜디오와 상의하고 결제를 얻어야 했다. 조율과 협업을 통해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내는 위대한 감독들이 있다. 그러나 홀로 고군분투하며 고집스레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어야만 무언가를 성취해내는 감독들 또한 존재한다. 버스터 키튼은 여실히 후자였다. 그는 MGM으로 들어간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이후 그는 여태 쌓아놓은 커리어가 먼지가 되어 날아가고 또 그 먼지가 앉아 있던 희미한 자취마저 남김없이 지워져버리는 모멸의 시간을 묵묵히 겪어내야만 했다. 뒤늦게 복권되기 전까지.

키튼의 전성기 영화를 보면 그가 전혀 웃지 않는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웃지 않는다. 차라리 울상에 가까운 무표정이다. 무대 공연 시절 자기가 웃지 않으면 않을수록 관객의 웃음이 더 커진다는 경험치를 발휘한 결과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여태 ‘그레이트 스톤 페이스’로 불린다. 그러나 그가 패티 아버클과 연기했던 1910년대 영화들을 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영화에서 키튼은 크게 웃고, 슬프게 울며,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 표정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이 위대한 무표정의 사내에게는, 그의 안에는, 남에게 주고 싶은 감정들이 그렇게도 많았던 것이다.

10년 전 버스터 키튼에 관해 썼던 글의 마지막을 다시 옮기고 싶다. 그는 한때 완전히 잊혀진 듯 보였으나 실제로는 한번도 지워진 적이 없었던, 그 자체가 전설로 완벽하게 산화된 존재다. 그가 떠난 후 49번째 해를 맞이했으나 그의 영화는 여전히 새롭고 재기발랄하며, 그를 능가하는 배우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이것이 무표정의 위대한 희극배우 버스터 키튼의 전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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