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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ituary] 영원한 현역 떠나다
주성철 사진 씨네21 사진팀 2015-07-10

서정민 촬영감독 1934~2015

1960년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었음은 물론 2000년대 이후에도 젊은 영화인들과 함께하며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했던, 한국영화계의 거장 촬영감독 서정민이 지난 7월7일 별세했다. 향년 81살. 1934년 인천에서 태어난 그는 함흥과 청진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해방을 맞이하고 6•25 전쟁을 경험했다. 어려서부터 극장에서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고려대 화학과 4학년 때, 우연히 선배의 친구인 박성복 감독의 추천으로 촬영부에 들어가면서 영화에 입문했다. 임원직 감독의 <촌 오복이>(1961)를 통해 데뷔한 그는 1964년 <돌아오지 않는 해병>으로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이만희 감독의 주요 작품을 거의 도맡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1966년에는 김지미, 허장강, 박노식 등이 출연한 <동대문시장 훈이엄마>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후 김기영, 임권택, 이두용 감독은 물론 1980~90년대에도 이장호, 정지영,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참여하며 한국영화계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이름이 됐다.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수취인불명>(2001) 현장에서 서정민 촬영감독을 처음 만났다. 양공주였던 엄마(방은진)와 그의 혼혈아들 창국(양동근)이 단둘이 살아가는,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마을 입구의 빨간 버스가 취재기자들에게 공개된 장면이었다. 모든 것이 재빨리 진행되는 김기덕 감독 특유의 현장 분위기 속에서 한 노장 촬영감독의 존재감은 어색하면서도 특별했다.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김기덕 감독의 반대편에서 묵직한 무게중심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부끄럽지만 “저분이 <돌아오지 않는 해병> 촬영하신 기사님이에요”라는 관계자의 얘기를 듣고야 그에 대해 알게 됐다. 잠시나마 대화를 청해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도 있는데, 현장이 어떠냐는 질문에 “김 감독 현장은 무지 빨라, 정신없어. 그런데 재밌어, 허허허” 하고 웃으셨던 순간이 유독 잊히질 않는다. 아마도 ‘선수’들끼리만 통하는 그런 호흡이 있었기에 두 사람은 <야생동물 보호구역>(1997)과 <파란대문>(1998)은 물론 <수취인불명>까지 내리 세 작품을 함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영화계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이름

당대 젊은 감독들과의 멋진 호흡은 (박광수, 장선우, 이명세, 이창동, 허진호 등과 함께하며) 익히 알려진, 그보다 한살 어린 고 유영길 촬영감독(1935~98)의 그것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덧붙여, 부산국제영화제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의 회고에 따르면 두 사람은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 1998년 3회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고 유영길 촬영감독의 회고전이 열렸는데 특별전과 함께 책자와 비디오도 발간했고, 대표로 이를 유영길 촬영감독의 부인에게 전달한 사람이 바로 서정민이었다. 아무튼 배창호에게 유영길이 있었다면 이장호에게는 서정민이 있었다.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어둠의 자식들>(1981), <과부춤>(1983), <바보선언>(1983) 등이 모두 그의 솜씨다. 또한 <거리의 악사>(1987), <산배암>(1988)의 정지영 감독, <테레사의 연인>(1991), <서울, 에비타>(1991)의 박철수 감독 등 당대 주목받던 다른 신인감독들의 초기작도 그의 카메라를 거쳤다. 2년 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바보선언>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를 가졌던 이장호 감독은 “이만희 감독님 영화의 특징이 아주 움직임이 강한 촬영이었는데, 서정민 촬영감독은 그에 능한 분이셨다. 그래서 내가 먼저 그를 찾아가 내 작품들을 촬영해 달라고 부탁드렸었다. 하지만 <바보선언>의 경우는 시나리오 없이 촬영을 해나가는 것에 대한 불만이 크셨다. 그렇게 현장에서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나중에는 거의 포기하셨는지(웃음) 이 작품으로 촬영 인생 끝나도 어쩔 수 없지 뭐, 라며 내 작업을 지지해주셨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역시 서정민이라는 이름을 한국영화사에 뚜렷하게 각인시킨 계기는, 이장호 감독도 얘기했듯 바로 이만희 감독의 작품들을 통해서다. 이만희 감독과 임원직 감독의 <인력거>(1961)를 통해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처음부터 마음이 통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펴낸 한국영화사 구술총서 제2권 <한국영화를 말한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1>은 그 둘의 관계를 아래와 같이 묘사한다. “<다이알 112를 돌려라>(1962)에서는 탈곡기로 광풍기를 만들어 바람을 일으켰고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는 실탄을 발사하며 전투 장면을 찍어야 했다. 오직 카메라 한대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했던 상황에서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촬영의 구도와 카메라의 움직임뿐이었다. ‘낙후된 기자재와 신통치 않은 자본’이 전부였던, 오직 사람의 손과 머리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순전히 두 사람은 각자의 역할을 믿고 맡기며 1960년대 초•중반 주옥같은 작품들을 함께 만들어냈다.”

이후 그는 이만희 감독과 <마의 계단>(1964), <검은 머리>(1964), <만추>(1966), <원점>(1967) 등을 작업하며 거의 데뷔와 동시에 주목받는 촬영감독 대열에 합류했다. 더불어 이 시기 <애수>(1967), <제삼지대>(1968) 등 배우로 유명했던 최무룡 감독의 작품들, 그리고 <애꾸눈 박>(1970), <잡초>(1973), <증언>(1973),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 등 정일성 촬영감독과 함께하기 전의 임권택 감독(혹은 이장호 감독과 함께하기 전의 서정민 촬영감독)의 작품들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더불어 기억해둬야 할 순간들도 있다. 실질적인 국내 최초 100% 동시녹음영화인 정진우 감독의 <심봤다>(1979), 1990년대 중반 한국영화계에 컴퓨터그래픽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하던 시기의 작품인 유상욱 감독의 <피아노맨>(1996), 당시로서는 불길 가득한 화재 장면의 특수효과가 인상적이었던 양윤호 감독의 <리베라메>(2000)도 그의 솜씨다. 한국영화계에서 촬영에 관한 한 색다른 시도가 돋보였던 주요 작품들에서 언제나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그가 최근까지 ‘영원한 현역’, ‘지치지 않는 노장’이라 불렸던 이유다.

SNS에서는 그에 대한 추모글이 이어지고 있다. 극동스크린에서 일하던 당시 그가 촬영을 맡았던 김호선 감독의 <미친 사랑의 노래>(1990) 촬영현장에 있었던 명필름 심재명 대표는 “태어나서 처음, 촬영현장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전율을 느끼게 했던” 선배 영화인으로 그를 떠올렸고, 김경형 감독은 “조감독 시절, 내 판단을 믿고 존중해주셨던 분. 감히 대작도 못했던 연배셨는데 내게 소주잔을 내밀며 ‘김 감독도 한잔해’라며 감독이란 호칭을 처음으로 불러주셨던 분”이라며 “고려대 럭비선수 출신이라는 배경과는 전혀 다르게 늘 소년처럼 수줍게 웃으시던 분”이라 얘기했으며, 방은진 감독은 <수취인불명> 촬영 때를 떠올리며 “리허설 한번에 테이크 한두번으로 하루 분량을 소화했던 (김기덕) 감독에게 ‘너만 예술하냐? 나도 좀 찍자!’시며 거친 현장을 마다지 않으셨고, 2008년 (<무방비도시>) B카메라로까지 현장에 계셨습니다”라고 그를 추억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영화를 말한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1>에 실린 그의 인터뷰에서 “감독님의 인생에서 영화가 어떤 의미인지요?”라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옮길까 한다. “가장 중요한 질문인데 참 대답하기가 힘들구먼. 나는 영화를 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생각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좋지 않았나 싶어요. 내가 만약 영화를 하지 않았다면, 월급쟁이로서 인생을 마쳤다면 참 초라한 인간이 되지 않았을까? 영화를 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감이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 같아요. 난 일하고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그런 면에서 난 행복한 사람이지 않을까. 단지 영화촬영인으로서 작업에 임할 때 참 열심히 임했고 한 작품, 한 작품 내 작품을 분석했을 때 나름대로 뜻있는 영상을 구축했다, 이런 느낌을 받았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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