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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덕호의 시네마 애드리브] 혼합과 변태

<네이키드 런치>와 오넷 콜먼

오넷 콜먼

변태, 변이, 변신, 변용, 변형. 그 무엇으로 부르든지 간에 한동안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관심사는 일관되게 그곳에 있었다. 의식을 점령하는 영상의 문제를 다루든(<비디오드롬>), 과학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한 인간의 끔찍한 초상을 다루든(<플라이>), 자동차 충돌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성적 희열을 다루든(<크래쉬>), 그곳에서 인간은 변태가 된다.

<비디오드롬>(1983)에서 성인물 케이블 방송의 사장인 맥스(제임스 우드)는 가학적 (실제) 포르노물에 의식을 빼앗기자 그의 장기들은 어느새 비디오플레이어로 바뀌었고, 그의 공격성이 고개를 들 때 그의 손은 권총과의 기이한 결합물로 변이된다. 반면에 <플라이>(1986)는 변태의 문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다룬다. 획기적인 전기운송장치를 발명한 과학자 세스(제프 골드블럼)는 자신을 취중에 (이거 조심해야 한다) 직접 실험도구로 사용하다가 실험기기 안으로 날아든 파리와 합성되어 획기적인 ‘파리인간’으로 변신한다.

이러한 변태는 유충에서 성충을 거쳐 나비 혹은 잠자리로 변하는 과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들은 모두 영상, 파리 등 외부의 물질에 감염된 변태들이다. 맥스는 갈라진 자신의 복부 속으로 비디오테이프가 삽입되는 광경을 지켜보았으며, 세스는 인간의 문명을 잃고 곤충으로서의 야만성을 획득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맥스와 세스가 모두 죽음을 택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애인 니키(데보라 해리, 80년대 팝 팬이라면 그룹 ‘블론디’와 함께 그녀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가 “과거의 육체를 죽여요”라며 맥스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마지막 장면이 그다지 해피엔딩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만약 해피엔딩이었다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죽음과 변용>(Tod und Verkla¨rung)이 딱 어울렸겠지만 하워드 쇼의 음악은 훨씬 더 무겁고 암울했다.

그렇다면 크로넨버그는 변태를 감염의 산물로, 부정적인 결과물로 바라본 것일까? 물론 <비디오드롬>과 <플라이>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내심 그럴 리가 있을까. 그가 변태를 혐오했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그 문제에 집착할 리가 없다. 배가 갈라지고 그 속으로 물컹해진 비디오테이프들이 들어가고, 신체의 혈관과 총의 부속품들이 서로 연결되고 그 위로 마치 맛탕 위에 끼얹은 조청 같은 점액질의 물체가 뒤덮인 모습을 크로넨버그는 즐긴다. 귀와 턱뼈가 부스러지고 그 속에서 파리인간의 형상이 튀어나오는 광경에 그가 탐닉하고 있다는 사실은 영화의 한 장면만 보아도 훤히 들여다보인다.

크로넨버그는 결국 그러한 자신의 취미를 <크래쉬>(1996)에서 명백히 인정했다. 자동차 출동이라는, 명백한 혼합의 접촉을 통해 얻어진 자동차의 잔해, 손상된 육체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성적 쾌감을 느낀다. 내장기관으로 들어오는 비디오테이프처럼 보족기구가 지탱해주는 다리(육체와 기계가 결합된 변태)에 카메라는 매혹당한다. 가브리엘(로잔나 아퀘트)의 허벅지 뒤편에 길고 깊이 팬 흉터를 보고 제임스(제임스 스페이더)가 극도의 흥분을 느끼는 장면은 손상된 육체, 변태에 대한 크로넨버그의 애착이다.

대략 <플라이>와 <크래쉬> 사이에 위치한 <네이키드 런치>(1991)는 변태에 대한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 역시 타자기가 변이된 대형 바퀴벌레(그의 등껍질 속에는 말하는 항문이 달려 있다), 마약의 화신인 ‘머그웜프’, 초대형 지네로 변한 동성애자, 가정부 파델라(모니크 머큐어)로 분장해온 벤웨이 박사(로이 슈나이더)를 묘사하고 싶은 크로넨버그의 욕망을 원동력으로 삼고 있음은 자명해 보인다. 다시 말해 크로넨버그는 겉으로는 원작자인 윌리엄 버로스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은 프란츠 카프카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네이키드 런치>

이 영화에서의 변태 역시 마약이라는 이름의 감염의 산물이다. 인간의 정신 속에 혼합되어 타자기를 바퀴벌레로 만들고, 머그웜프로 만들며 이성애자를 동성애자로 만들고 동성애자를 지네로 만든다. 주인공 윌리엄은 현실세계를 떠나 ‘인터존’, ‘아넥시아’라는 환각의 공간을 배회하며 그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누군가(벤웨이 박사)에 의해 의식이 통제되고 있음을 본다.

하지만 크로넨버그가 혼합과 변태의 이미지를 음악과 완벽하게 결합시킨 것은, 내 생각에 <네이키드 런치>가 유일했다. 그것은 지난 6월11일 세상을 떠난 프리재즈의 개척자 오넷 콜먼(1930~2015)에 의해 완벽하게 만들어졌다. 왠지 앨프리드 히치콕의 <싸이코>가 떠오르는 오프닝 타이틀이 시작되면 77인조 오케스트라의 사운드가 화면을 가득 메운다. 하지만 몇초 후 알 수 없는 조류의 괴성처럼 들리는 알토 색소폰 소리가 화면을 분할하며 지나간다. 하워드 쇼가 작곡한 오케스트라의 곡조와 오넷 콜먼의 즉흥연주는 전혀 다른 음악, 완전히 무관한 음악을 동시에 틀어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이 기이한 혼합으로 음악은 또 다른 변태를 낳는다.

오넷 콜먼은 이러한 음악을 이미 영화 <네이키드 런치>가 만들어지기 19년 전인 1972년부터 시도했다. 그는 이 기법을 하몰로딕(harmolodic)이라고 불렀는데- 단어 자체가 화음(harmony)과 선율(melody)의 혼합물이다- 작곡가가 선율을 작곡해놓았다고 하더라도 연주자들은 조성과 템포를 마음대로 선택해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1972년작 <미국의 하늘>(Skies of America)에서 콜먼은 이 방식을 실현했고 모로코의 민속악 연주자들이 참여한 <상상 속의 춤>(Dancing in Your Head)에서 이 기법은 밴드 음악으로 구체화됐다. 집단 즉흥연주를 추구하던 록그룹 그레이트풀 데드의 기타리스트 제리 가르시아는 콜먼의 방식에 큰 관심을 갖고 이 시절 콜먼과 협연하기도 했다.

특히 모로코의 민속악과 함께 연주했던 콜먼의 작품 <정오의 일출>(Midnight Sunrise)은 <네이키드 런치>에서 다시 쓰이면서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인터존’이라는 환각의 공간(하지만 그 공간의 분위기는 모로코와 같은 북아프리카를 쉽게 떠올리게 한다)에서 벌어지는 동성애자들의 강간 장면에서 거대한 지네로 변신한 ‘클로케’의 모습은 두개의 다른 연주가 합성된 것 같은 기이한 음악을 통해 혼합과 변태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부각시킨다(물론 당시 CG를 사용할 수 없었던 기술적인 한계 속에서 유달리 급조한 것 같은 ‘지네인간’의 모습은 감상자의 넓은 아량을 요구한다).

조성이 없는 오케스트라 위에서 따로 노는 것 같은 즉흥연주의 혼합은 영화 곳곳에서 쓰이지만 윌리엄과 조앤이 타자기를 두드리며 벌이는 정사 장면에서의 음악은 화면 그 자체를 청각으로 구현한다. 두 사람의 성적 흥분이 절정에 이르자 타자기는 부들부들한 육체로 변하고(버로스의 표현대로 하자면 ‘소프트 머신’) 결국에는 성행위를 나누는 남녀의 성기 모습을 한 동물로 변형되어 두 사람의 몸 위를 덮친다. 이때 콜먼의 색소폰은 이 동물의 괴성처럼 울부짖는다. 혼합과 변태의 소리. 적어도 영상과 음악의 완벽한 조화라는 측면에서 <네이키드 런치>는 분명 걸작이다. 그리고 지난 6월 우리 곁을 떠난 이 거장에게 우리는 한마디 건네지 않을 수 없다. 당신, 정말 멋진 변태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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