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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의 만화가 열전] 베트남은 패망했고 나는 만화를 읽었다
오승욱(영화감독) 2015-07-28

김민, 길 위의 인생들을 가장 잘 그린 만화가

<마지막 인간>

전학을 한 지 얼마 안 되어 친구도 없이 혼자 조용히 앉아 있던 나에게 한 소년이 다가와 수줍게 뭔가를 내밀었다. 갱지 여러 장을 실로 묶어서 만든 만화책이었다. 소년은 자신이 만든 만화책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 연필로 촘촘히 그린 만화책의 표지에는 ‘아까끼의 새 외투’란 제목과 글, 그림으로 소년의 이름이 있었다. 소년은 내가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을 유심히 보고 친구가 되고 싶다는 표현을 그렇게 한 것이었는데 만화 그리기를 그림 낙서 수준으로 하던 나로서는 경천동지의 사건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무수히 많은 그림 낙서계의 만화의 신들을 만났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스쿨버스의 뒷좌석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서 마음에 드는 아이들에게만 그림을 그려주던 6학년 형. 그 형 앞에는 많은 아이들이 아부의 탄성을 내뱉으며 자신의 공책 뒷장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줄을 서 있었다. 그 형은 아이들의 공책에 일필휘지. 요괴인간의 뱀, 베라, 베로와 타이거 마스크를 그려주고 있었다. 나도 그림을 좀 그렸지만 만화를 보고 겨우 흉내나 내는 수준이었는데, 그 형은 만화를 안 보고도 인물의 전신을! 그것도 발까지 그리고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내 짝은 교과서와 공책을 모두 만화 주인공 철인 28호로만 채우는 만화의 광인이었다. 선생에게 뺨을 맞고 부모님이 호출당하는 수난을 겪고 공책에 만화를 그릴 수 없게 되자 그는 자신의 넓적다리 위에 색연필로 철인 28호를 그렸었다. 처절했다. 중학생 때, 일본 만화의 캐릭터들을 어마어마하게 잘 그리는 만화의 신을 만났다. 그의 그림은 연필 선의 농담이 살아 있었다. ‘나가이 고’보다 더 마징가 Z와 데빌맨을 잘 그렸고 특히 여자주인공들을 무척이나 잘 그렸다. 여자를 절대로 못 그렸던 나에게 그는 넘볼 수 없는 만화의 신이었고 그의 꿈은 애니메이터였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는 그림물감의 화학약품 냄새에 눈물, 콧물이 멈추지 않는 철야의 지옥, 용산으로 표표히 떠나갔다. 고등학생 때였다. 남학생들만 사용하는 기술실의 칠판에 나는 검객이 상대방의 몸을 세로로 쪼개며 그의 몸을 통과하고 갈라진 몸통 사이로 밤하늘의 그믐달이 드러나는 그림을 그렸었다. 모두가 그림을 잘 그리는 놈들만 득시글거리는 학교였지만 ‘나만큼 만화를 잘 그리는 놈이 있어?’ 하는 호기였다. 며칠 후 나는 기술실의 칠판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내 그림을 지우고 중국 무사가 칼을 휘두르고 검객 두명의 목이 잘리며 나자빠지는 그림을 누군가가 칠판에 떡하니 그려놓았던 것이다. 그 그림은 내 그림보다 열배는 뛰어난 솜씨였다. 누구지? 그림의 주인공을 찾고 보니 나보다 훨씬 어린 중3이어서 세상은 넓고 만화의 신들은 많으니 어디 가서 그림으로 잘난 척하지 말자고 단단히 결심을 하였다.

하지만 이런 만화의 신들은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릴 뿐 더 대단한 세계가 그 소년이 그린 만화책에 있었다. 소년은 기껏 종이 위에 만화 캐릭터 한명을 그리던 그림 낙서 수준의 만화의 신들을 저 멀리 날려버렸다. 소년의 만화 속에는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그가 그린 30페이지 남짓의 만화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 주인공이 새로 산 외투를 잃어버린 아까끼의 불행에 감정이입하여 끔찍한 세상에 대해 분노를 한 것이다. 다음날 소년에게 만화책을 돌려주니 만홧가게에서 <외투>라는 만화를 보고 너무 감동을 받아서 자신도 흉내내 그려본 것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질투에 휩싸인 나는 당장 문방구에서 갱지를 사 실로 묶어 당시 최고의 만화 <도전자 허리케인/내일의 죠>를 표절한 <도전자 사이클론>이란 만화책을 만들었지만 이야기란 것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란 것에 절망을 했다.

그리고 일년 후. 모래내로 흘러가는 좁은 하천 위에 기둥을 세우고 너덜너덜한 판자를 이어 집을 지은 판잣집들이 늘어선 동네 초입에 만홧가게가 생겼다. 그 만홧가게에서 나는 소년이 그린 만화의 원작을 만났다. 김민 글•그림 <외투>.

<마지막 인간>

핵전쟁으로 인한 멸망을 그린 <마지막 인간>

러시아의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어두운 밤길. 너무나 많이 기워 누더기가 된 외투를 걸치고 초라한 사내가 걷고 있다. 아무도 없고 온기 하나 없는 좁은 단칸방에 들어간 사내는 외투를 벗어 벽에 걸고 식어버린 시큼한 양배추 수프를 먹고 오들오들 떨면서 잠자리에 든다. 아직도 기억나는 고골리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김민의 만화 <외투>의 한 부분이다. 1970년대 한국 소년만화의 가장 어둡고 기괴한 작가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주먹코에 덩치만 큰 어리바리한 남자가 있다. 그는 머슴이다. 자기 이름도 쓸 줄 몰라 동그라미를 그려넣고 남자는 징용에 끌려간다. 난생처음 동네 밖을 나와 낯선 길을 걸으며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소를 끌고 일을 나가 소가 풀을 뜯어먹는 동안 시원한 나무그늘에 앉아 낮잠을 자는 평화로운 순간이다. 남자는 총이라는 살인도구를 억지로 쥐고 동남아시아의 어느 정글에서 전투와 독충, 무더위, 배고픔, 구타의 고통 속을 어리둥절한 채로 살아간다. 제목을 기억할 수 없는 김민의 또 다른 만화이다. 아마도 <0시의 탈출> 시리즈 중 하나인 것 같다. 게오르규의 <25시>와 영화 <25시>를 원작으로 하는 만화였다. 아침에 엄마 심부름으로 구멍가게에 콩나물을 사러 바가지를 들고 가는 내 앞으로 입에 거품을 물고 괴성을 지르며 파자마 바람으로 뛰쳐나가는 간질병 환자 아비와 그 아비를 붙잡으려고 깨끗하게 다린 하복 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아버지를 부르며 쫓아가는 여고생 딸의 새하얀 양말이 눈에 선한 천변 판자촌의 만홧가게에서 나는 김민의 만화들을 읽었다.

하나님보다 더 무서운 할아버지의 눈을 피해 교회를 땡땡이치던 내게 김민의 신과 악마의 대결을 그린, 제목을 기억할 수 없는 만화는 그동안 의심을 하던 기독교에 대한 나의 의심을 더욱 부채질해주었고, 위선과 위악이란 단어를 알게 되었다.

1975년. 긴급조치란 무시무시한 것이 차례로 선포되고, 베트남이 패망한 그때. 만홧가게에서 나는 만화를 읽고 있었다. 교회와 극장의 <대한뉴스>에서는 전쟁의 무서움보다는 공산당의 무서움에 대해 입에 침이 튈 정도로 설교를 해대고 있었고, 밤마다 베트남처럼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기도를 하고서야 잠에 들던 그 시절. 나는 김민의 <마지막 인간>을 만났다. 어처구니없는 권력자들의 야욕 때문에 핵이 쏘아 올려지고, 지구 최강국이었던 두 나라는 핵폭탄으로 불바다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대한민국. 아직 핵전쟁으로 인한 영향이 없지만, 하루하루 먼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어린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먼 하늘에서 불길한 구름이 몰려오고, 크리스마스이브에 온 세상 사람들이 소리 없이 다가온 핵 방사능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을 김민은 특별한 주인공 없이 20여 페이지를 이끌어간다. 미친 사람, 발악하는 사람, 우는 사람, 결혼하는 사람. 핵전쟁으로 인간이 멸망하는 순간을 김민은 별다른 대사 없이 냉정하게 그려간다. 그리고 만화의 3분의 1이 지나간 지점에서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핵 방사능으로 죽어가는 순간,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들은 어느 항구에 있다. 과학자인 주인공과 해군 장성, 그리고 조수, 이렇게 세 사람은 잠수함에 올라탄다. 그들은 인류의 어리석음을 후세에 경고하기 위해 일단은 죽음을 유보한 것이다. 그들의 항해는 시작되고, 시간이 지나가도 좀처럼 방사능은 지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바닷속 깊은 곳을 유령처럼 떠돌며 핵전쟁 이후 지구의 모습을 관찰, 기록한다. 어느 도시의 환경을 관찰하러 갔던 해군 장성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이불에 누워 잠자듯 죽어 있는 가족들을 보고 임무를 포기하고 아내와 딸 옆에 누워 죽음을 선택한다. 조수 역시 선장에게 반발해, 살아남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도대체 누구에게 이 기록을 전달하려 하느냐며 그 역시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홀로 남은 선장은 자신만이라도 기록을 완결해야 한다며 고집스럽게 버티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의 종소리를 따라갔다가 나무 기둥이 물살에 떠밀려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 물속에 잠긴 도시의 교회 종이 소리를 낸 것임을 알고 허탈해한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커다란 성당 안에 빼꼭하게 들어찬 물속에 떠다니는 수많은 죽음이다. 그는 아무도 살아남지 않은 이곳에서 기록을 남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마지막 순간 자포자기하고 만다. 이 만화를 본 이후 나는 핵전쟁의 공포에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베트남이 패망하자 우리도 핵을 가져야 북한의 도발을 막을 수 있다며 핵이 무슨 최고의 무기라도 되는 양 떠들던 어른들도 있었지만 <마지막 인간> 같은 만화를 그린 어른도 있었다.

<길>

<길>

김민의 모든 캐릭터가 등장한 <길>

만화가 김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처음 떠올리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일대기를 중국의 전국시대로 옮겨와 각색해 그린 <불나비> 시리즈가 있다. 처음 <불나비> 시리즈를 보고 무슨 무협 만화가 싸움은 안 하고 만날 “‘강한 것은 무엇인가?’ ‘검의 길에 궁극은 무엇인가?’만 찾아?” 하면서 신경질을 냈지만 긴 대화 신 끝에 폭발적인 한두컷의 액션 신 때문에 <불나비> 시리즈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고지로의 대결에 김민은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죽은 이들의 망령에 사로잡힌 미야모토 무사시가 밭을 일구고, 불상을 조각하고, 삶이란 무엇인가에 고뇌하던 원작 소설의 일부분이었다. 김민은 시리즈 만화의 한편 한편마다 검의 길은 사람을 살해하는 길인데,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검의 길의 궁극으로 갈 수는 없는 것인가를 고뇌하는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다. 너무나 관념적인 이야기였고, 지금 봐도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하는 구석이 많지만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자칫하면 빠지는 파시즘의 그림자가 <불나비> 시리즈에는 없다. 주인공 불나비는 항상 권력에 반대하는 아나키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파시즘에 빠지기보다는 차라리 나르시시즘이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그의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난 <불나비> 시리즈 중 하나가 <야망>인데 변방의 조그마한 성. 아니 성이라기보다는 장원에 가까운 곳에서 밭을 일구고 사는 불나비와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수하려는 왕과의 대결을 그린 만화이다. 말이 대결이지 왕과 불나비는 만화에서 두번밖에 만나지 않는다. 천하통일을 위해 자신을 거스르는, 한점의 영토도 허락하지 않는 왕은 불나비가 거주하는 장원을 내놓고 항복하라고 한다. 성 사람들을 대표로 왕의 군대와 혼자 맞선 불나비는 우리는 그 어떤 왕도 섬기지 않는다, 그냥 이 코딱지만 한 땅에서 우리끼리 조용히 살게 내버려달라는, 어떻게 보면 소박하고 어떻게 보면 반역적인 말을 한다. 왕은 불나비를 용서할 수가 없고 그를 치려 한다. 그러나 불나비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그가 아끼는 장수 서넛이 불나비의 칼에 쓰러진다. 결국 왕은 자신의 부하들을 더이상 잃지 않기 위해 불나비가 사는 마을을 지나쳐버린다. 난해한 만화였지만 김민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명백하다. 권력에 유린당하는 힘없는 자들에 대한 연민과 냉혹하고 무자비한 권력자에 대한 혐오와 분노.

<길>

내가 마지막으로 그의 만화를 본 것은 중학생 때 무협영화 <십대제자>를 보러 피카디리 극장에 갔다가 상영시간까지 시간이 남아 근처의 만화 도매상에서 샀던 <길>(김민은 나병 환자가 주인공인 <길>이라는 같은 제목의 만화도 그렸다)이었다. <길>에는 김민 만화의 모든 캐릭터들이 다 등장한다. 불나비의 캐릭터인 오하라, 그의 명랑만화에서 항상 조금 더 과격한 게으름과 조금 더 과격한 조증으로 웃기기는 한데 읽고 나면 뭔가 광기가 느껴져 기분이 썩 개운치 않았던 백수 삼촌 허떨이, <1시의 탈출>에서 머슴으로 나와 온갖 시련을 겪는 뚱보 모모, 임창 문하의 만화가라는 징표와 같은 <외투>에서 아까끼 역을 했던 소심한 맹이, 그외의 모든 캐릭터들이 나와 망해서 사라지는 곡마단의 운명을 그린다. 이 만화의 인상적인 대목은 수전증 때문에 곡마단을 떠났던 마술사 오하라가 여백을 먹으로 단호하게 칠해버린 김민 특유의 겨울밤에 다시 곡마단을 찾는 오프닝이다. 그는 곡마단을 찾기 전 포장마차에 들러 우동을 주문하는데 김민은 우동 사리를 뜨거운 물에 데워 우동을 만드는 과정을 세심하게 컷으로 나눠 보여준다. 우동을 마는 과정을 그리는 것이 이 만화에서 너무나 중요하다는 듯이. 그뿐이 아니다. 곡마단이 마을 공터에 들어와 꽁꽁 언 흙 위에 장작을 올려놓고 불을 지펴 언 땅을 녹이고 기둥을 박고 각목을 세우고 곡마단의 천막을 치는 행위를 하나하나 그려내고, 그들이 마을을 떠날 때 남자 단원들과 일꾼들은 천막을 철거하여 트럭에 짐을 싣고, 여자단원들은 단장에게 기차표를 받고 다음 목적지로 먼저 떠난다. 그 와중에 근처 술집 주인들이 몰려와 벌이는 외상값을 달라는 소동까지 세세하게 묘사한다. 나중에 최인호의 소설 <지구인>의 곡마단 에피소드를 읽으며 김민의 곡마단 묘사가 최인호의 그것에 뒤지지 않으며 그의 애정 어린 취재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짐작을 했다. 곡마단 사람들의 비애를 가장 잘 표현한 장면이 있다. 접시돌리기를 하는 여인에게 여섯살 정도의 아들이 있다. 소년은 커서 곡마단원이 되고 싶다고 엄마에게 말한다. 그러나 곡마단원인 엄마는 화를 내며 곡마단원은 훌륭하지 않으며 심지어 나쁜 것이라 한다. 훌륭한 사람들은 곡마단원 따위는 하지 않는다며 너는 커서 선생님, 학자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소년은 이해가 안 된다. 공중곡예를 하는 형과 누나, 마술사 오하라 아저씨 모두 훌륭한 사람들인데 왜 그들이 훌륭한 사람이 아니냐는 것이다. 소년은 곡마단원들을 붙잡고 형들은 왜 훌륭한 사람이 아니냐고 묻는다. 단원들은 소년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그저 씁쓸하게 웃으며 소년을 피한다. 자신들은 가난하고 세상에서 밀려나는 길 위의 인생들이기 때문이다.

중3 때 청계천의 만화 도매상에서 샀던 <길>과 <야망>을 꺼내 읽었다. 거의 35년 만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종잇장이 삭아서 부스러진다. 다 읽고 나서 든 생각. 김민은 길 위의 인생들을 가장 잘 그린 만화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