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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아이젠버그] 21세기 영화가 절실하게 원하는 모습
장영엽 2015-08-25

<아메리칸 울트라> 제시 아이젠버그

<와이 스톱 나우>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2016) <라우더 댄 밤즈>(2015) <아메리칸 울트라>(2015) <어둠 속에서>(2013) <더블: 달콤한 악몽>(2013) <나우 유 씨 미: 마술사기단>(2013) <로마 위드 러브>(2012) <털기 아니면 죽기: 제한시간 30분>(2011) <소셜 네트워크>(2010) <좀비랜드>(2009) <어드벤처랜드>(2009) <오징어와 고래>(2005) <로저 닷저>(2002)

“넌 4번 타자감은 아니구나.” 제시 아이젠버그의 첫 주연작 <로저 닷저>에서, 사기꾼 로저 삼촌(캠벨 스콧)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로저 닷저>는 뉴욕에 대학 면접을 보러온 고등학생 닉이 현란한 말발로 사람들을 등쳐먹고 살아가는 삼촌에게 휘둘려 뉴욕의 이곳저곳을 헤매며 총각 딱지를 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영화다. 아이젠버그가 연기하는 닉은 뉴욕에서 만난 몇몇 여자들과 교감을 주고받는가 싶지만 늘 결정적인 순간에 기회를 놓치고, 능수능란한 삼촌은 그의 어리바리한 모습을 안타까워한다. 그런데 <로저 닷저>의 이 대사는 첫 주연작 이후 제시 아이젠버그가 배우로서 선택한 배역에 어떤 이정표 같은 역할을 하게 된 것 같다. 공을 가까이 갖다줘도 홈런을 치기는커녕 ‘스트라이크’라는 말이 들리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남자의 애처로운 모습. <로저 닷저>에서 첫선을 보이고 <오징어와 고래> <좀비랜드> <어드벤처랜드>에서 발전됐으며 <소셜 네트워크>에서 완성된 딱한 남자의 초상은 어느새 제시 아이젠버그라는 이름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연상하게 되는 이미지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결코 온전한 ‘4번 타자’가 되지 못한 이 남자가 최근 할리우드를 사로잡고 있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로 분한 <소셜 네트워크>로 주목받기까지, 제시 아이젠버그는 주드 아파토우 사단의 배우 마이클 세라(그를 모르는 독자라면 인터넷에서 ‘마이클 세라’를 검색해보길. 둘은 놀랍게 닮았다)와 종종 혼동되곤 하는 배우에 불과했다. 하지만 최근 몇년 새 그의 활동 반경은 전방위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선댄스에서 화제가 된 <홀리 롤러스>, 블루스카이의 애니메이션 <리오> 시리즈, 우디 앨런의 <로마 위드 러브>와 흥행에 성공한 <나우 유 씨 미: 마술사기단> 등 상업영화와 예술영화, 극영화와 애니메이션, 영미권과 해외의 경계를 가르지 않는 그의 폭넓은 행보는 그만큼 제시 아이젠버그의 이미지를 소비하길 원하는 곳이 많다는 방증이다.

“그는 지독하게 똑똑하지만 감정적으로는 무심한 괴짜를 연기하는 데 능하다.” <가디언>은 제시 아이젠버그의 연기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소셜 네트워크>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그가 연기하는 마크는 여자친구에게 처절하게 차인 뒤, 분풀이로 하버드에 재학 중인 여학생들의 사진을 해킹해 그들의 외모를 비교하는 ‘페이스 매시’ 프로그램을 만들 정도로 영악하다. <어드벤처랜드>의 제임스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여행 경비를 ‘센트’ 단위로까지 계산해 부모에게 청하는 영리함을 보이지만 “우리 그만 만나자”며 이별을 통보하는 여자친구의 마음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지성과 감성의 불균형이 낳은 이 괴짜 캐릭터들은 한편으론 SNS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이 친숙하게 느낄 법한 모습이기도 하다. 슈트보다 후드티와 청바지가 어울리고, 주변의 시선 따위는 상관없는 듯한 무심한 표정과 상대방을 압도하는 빠른 말투를 지닌 제시 아이젠버그가 주목받는 건 그가 21세기적인 아이콘인 ‘너드’의 개성을 지금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배우이기 때문일 거다.

기묘한 첩보물 <아메리칸 울트라>에서도 제시 아이젠버그의 개성은 이 영화의 흐름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여자친구 피비(크리스틴 스튜어트)에게 청혼하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던 마이크(제시 아이젠버그)는 어느 날 그가 일하는 편의점으로 찾아온 한 여자의 미스터리한 메시지를 듣고 CIA 요원으로서의 기능이 발동된다. 하지만 에단 헌트나 제이슨 본처럼 프로페셔널한 요원의 모습을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을 받고서야 비로소 요원으로서의 면모를 선보이는 마이크의 주요 무기는 컵라면과 숟가락, 그리고 프라이팬이다. 훈련받은 몸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여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하지만, 살인자를 앞에 두고도 총의 위치를 서슴없이 말해 여자친구에게 핀잔을 듣는 마이크의 어설픔은 이 영화의 ‘병맛’ 코드를 이끄는 핵심적인 기질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메리칸 울트라>는 제시 아이젠버그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니마 누리자데 감독은 “스스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자신을 멍청하게 보이게 하는 것”이 이 영화에서 아이젠버그가 이뤄야 했던 목표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마이크는 동네 유치장을 밥먹듯이 드나드는 마약 중독자이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서 단번에 1급 요원으로 거듭나는 드라마틱한 성장을 보여줘야 하는 인물이다. 때문에 그는 언제나 상대배우들보다 몇 박자씩 앞서나가곤 했던 속사포 대사의 향연을 선보이는 대신, 대개의 장면에서 다소 나른하고 굼뜬 모습으로 관객을 만난다. <아메리칸 울트라>에서 그의 빠른 말투를 대체하는 건 ‘액션’이다.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세계에서 사투를 벌이는 소년을 연기한 <좀비랜드>에서조차 아이젠버그에게 할당된 액션이란 그저 장총을 엉겁결에 발사한 뒤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가 무에타이와 필리핀, 인도네시아의 무술을 결합한 ‘진짜’ 액션을 선보이는 <아메리칸 울트라>는 할리우드의 남자배우라면 누구나 한번쯤 거치게 되는 액션영화라는 통과의례를 비로소 완수했다는 점에서 아이젠버그의 또 다른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언젠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을 묻는 질문에 제시 아이젠버그는 “감정적으로 극적인 분투를 겪는 인물들에 마음이 간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건 그 스스로가 걸어온 삶의 행적과도 무관하지 않은 답변이다. 강박증과 불안은 유년 시절부터 늘 아이젠버그를 따라다녔다. “손끝을 만지는 특유의 방식이 있으며, 갈라진 땅을 걷지 않는” 등 스스로 만든 불편한 규칙들을 엄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장애(OCD)를 경험했다는 그를 두고 영미권 언론은 ‘우디 앨런의 후예’라고 불렀다. <뉴요커>에 글을 연재하고, 자신이 집필한 희곡을 오프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리는 등 명석한 지성으로 무장했지만 늘 자신이 “모든 것을 망치게” 될 거라는 자기파괴적인 생각에 시달리는 아이젠버그의 기질은 운명처럼 그를 배우의 길로 이끌었다. “정해진 역할을 연기하는 동안만큼은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란다. 그러므로 당분간은 안심해도 좋겠다.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제시 아이젠버그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캐릭터와 캐릭터, 작품과 작품 사이를 오가며 스스로의 불안을 해소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 보이니까. 그런 그의 차기작은 내년 공개될 블록버스터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다. 아이젠버그의 역할이 무엇이냐고? 슈퍼맨의 숙적 렉스 루터다. 고루한 대머리 악당을 기대하진 말길. 워너브러더스가 공개한 스틸컷에 따르면, DC 유니버스의 서막을 알릴 이 작품에서 제시 아이젠버그의 렉스 루터는 마블의 토니 스타크를 연상케 하는 테크 악동의 이미지와 비슷한 모습이니까. 왜 아니겠는가. 세계가, 또는 21세기 영화가 절실하게 원하는 모습이 제시 아이젠버그에게 있다.

<더블: 달콤한 악몽>

사이먼이 제임스에게

사이먼 제임스와 제임스 사이먼. 한쪽은 숙맥에 무기력하고, 다른 한쪽은 교활하고도 자신만만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분신>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더블: 달콤한 악몽>에서, 제시 아이젠버그는 달라도 너무 다른 도플갱어를 연기한다. “이 영화는 나를 이루는 모든 것에 대해 질문하도록 만들었다”고 말하는 제시 아이젠버그에게, 이 작품은 무척 중요한 의미로 다가왔던 듯하다. <더블: 달콤한 악몽>에 출연하는 동안 그는 <뉴요커>에 이 영화에서 영향을 받은 <마브 앨버트는 내 치료사>(Marv Albert is my therapist)라는 글을 기고했고, 역시 이 작품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더 스포일스>라는 오프브로드웨이 연극의 각본을 썼다고 말했다. 특히 아무도 없는 지하철에 앉아 사이먼이 제임스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난 피노키오야. 그게 날 숨막히게 해.” 유약한 분신과 그 분신의 고백을 가만히 듣고 있는 또 다른 제시 아이젠버그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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