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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릴 스트립] 상처마저 끌어안는 강인한 카리스마

<어바웃 리키> 메릴 스트립

<어바웃 리키>

영화 <어바웃 리키>(2015) <숲속으로>(2014) <더 기버: 기억전달자>(2014)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2013) <호프 스프링즈>(2012) <철의 여인>(2011) <줄리&줄리아>(2009) <다우트>(2008) <맘마미아!>(2008)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프라임 러브>(2005) <맨츄리안 켄디데이트>(2004) <어댑테이션>(2002) <디 아워스>(2002) <뮤직 오브 하트>(1999) <원 트루 싱>(1998) <사랑의 기도>(1997) <마빈의 방>(1996) <비포 앤 애프터>(1996)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 <리버 와일드>(1994) <영혼의 집>(1993) <죽어야 사는 여자>(1992) <영혼의 사랑>(1991) <헐리웃 스토리>(1990) <그녀는 악마>(1989) <어둠 속의 외침>(1988) <프렌티>(1985)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 <폴링 인 러브>(1984) <실크우드>(1983) <살의의 향기>(1982) <소피의 선택>(1982) <프랑스 중위의 여자>(1981) <맨하탄>(1979) <홀로코스트>(1978)

린다 브러멜과 리키 렌다조. <어바웃 리키>에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하는 록가수는 이름이 두개다. 린다는 이혼하기 전 가족들이 불렀던 본명이고 리키는 밴드 멤버들이 부르는 예명이다. 20여년 전 뮤지션의 꿈을 좇아 가족을 떠났던 리키는 린다라는 이름을 잊은 지 오래다. <어바웃 리키>는 그녀가 엄마 린다가 아닌 음악가 리키로 인정받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66살에 록가수라는 새로운 역할에 또 다시 자신을 내맡긴 메릴 스트립이 있다. 메릴 스트립에 관해 말할 때 역할에 따라 악센트부터 조정하는 섬세한 열정이나 오스카 최다 노미네이트 기록을 보유한 연기자라는 점부터 짚어가는 대신 그녀의 방대한 출연작 중에서 <어바웃 리키>를 보며 떠오른 몇몇 영화들을 그러모아 그녀에 대한 사적인 단상을 그려보고자 한다.

“나와 아이들 따윈 당신 안중에도 없어.” 리키 이야기가 아니다. <철의 여인>에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마거릿 대처가 상의 없이 선거 출마를 결정하자 남편이 화를 내며 쏘아붙이는 대사다. 물론 이 대사는 <어바웃 리키>에도 이질감 없이 녹아들 수 있을 것이다. 메릴 스트립이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마다 영화 속 그녀의 가정은 자주 삐거덕거렸다. 악명 높은 편집장 미란다를 연기했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물론이고, <프렌티>에서는 결혼 후에도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과거를 잊지 못해 방황하고, <맨하탄>과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서는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남편과 이혼한 뒤 집을 떠난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서는 직접적으로 “엄마가 되는 것”(being mommy)이 어렵다고 토로하는 대사를 통해 엄마 역시 후천적으로 노력하며 단련해야 하는 하나의 역할임을 상기시킨다. 물론 <어둠 속의 외침>처럼 강한 모성애를 연기한 작품도 있지만 앞서 말한 영화들에서 메릴 스트립 고유의 강인하고 냉정하며 지적인 아우라는 전통적인 어머니상에 부여된 온화하고 희생적인 이미지와 자연스럽게 충돌한다. 나아가 그녀는 <맨츄리안 켄디데이트>나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에서 자식을 휘어잡으려는 어머니 역시 그러한 아버지 못지않은 폭군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해당 영화 속 메릴 스트립의 자녀들은 몽고반점처럼 희미하게 남아 있는 심리적 흉터를 공유한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서 집 떠난 엄마의 사진을 보고 훌쩍이던 꼬마는 <마빈의 방>에서 반항적인 10대 소년이 되어 엄마 사진을 한데 모아 불태워버린다. 혹은 좀더 영악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쌍둥이는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대신 엄마의 지위를 역으로 이용해 <해리 포터> 시리즈의 미출간 원본을 당당히 요구한다. 성인이 된 후에도 엄마에 대한 애증을 숨기지 못하는 <어바웃 리키>의 세남매, 그중에서도 부모의 잦은 다툼이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소리치는 줄리는 엄마 없이 보낸 유년 시절의 흔적이 얼룩처럼 남아 있는 메릴 스트립가(家) 자녀의 계보를 이어간다.

다시 메릴 스트립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어느새 얼음여왕(ice queen)이라는 수식어가 라벨처럼 따라붙게 되었다”(<가디언>)는 표현처럼 그녀는 필요한 경우 상대방과 팽팽한 공방전을 벌이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초기작 중 하나인 <맨하탄>에서 우디 앨런이 졸졸 따라다니며 속사포로 쏘아대는 잔 잽을 메릴 스트립이 도도하게 받아치는 모습은, 이후 작품들에서 펼쳐질 숱한 설전의 앙상블들을 예고한다. 언쟁을 벌이는 장면에서 종종 메릴 스트립이 하던 말을 멈추고 안경 너머로 상대를 빤히 응시할 때가 있는데, 잠시 뒤 그녀는 상대의 수를 읽어내기라도 한 듯 묘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거둔다. 우리는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이 제스처가 나오면 승세가 이미 그녀에게로 기울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메릴 스트립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 화려한 말솜씨뿐 아니라 무언의 카리스마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살벌하고 매서운 대결구도를 가장 잘 살린 작품은 의심의 여지 없이 <다우트>이고 이와 대척점에 있는 연기 톤을 선보인 작품은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이다. <다우트>에서는 주로 엄격하고 단호하며 절제된 방식으로 상대역의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을 공격했다면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에서는 “과장된 제스처와 억양, 안면 경련 등 다양한 무기를 곡예 부리듯 화려하게 사용”(<필름 코멘트>)한다. 가령 두 영화의 식사 장면에서 메릴 스트립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테이블의 좌중을 압도한다. <다우트>에서 무거운 침묵이 식탁의 공기를 짓누르는 가운데 그녀는 차가운 눈빛만으로 제임스 수녀(에이미 애덤스)가 접시에 뱉어낸 음식을 다시 먹게 만드는 반면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에서는 약에 취한 괄괄한 목소리로 딸 바바라(줄리아 로버츠)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할 때까지 사정없이 독설을 퍼붓는다.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긴 하지만 <어바웃 리키>의 만찬 테이블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세 남매는 엄마의 빈자리에 먼지처럼 내려앉은 묵은 감정을 털어버리려는 듯 얼굴을 보자마자 서로 날선 대화부터 주고받는다. 하지만 이는 전초전일 뿐이다. 세 남매에게 한바탕 신고식을 치르고 나면 남편과, 남편 다음에는 남편의 새 부인과, 그다음에는 애인과의 실랑이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메릴 스트립은 자신의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 중에서도 말싸움 카테고리 안에 얼마나 다양한 표정과 몸짓과 악센트가 들어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듯 크고 작은 소란들을 매번 다른 방식으로 소화해낸다.

가녀린 이미지와 거리가 먼 때문인지 메릴 스트립이 가장 안쓰러워 보이는 순간은 눈물을 펑펑 쏟을 때가 아니라 예기치 못한 순간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가까스로 삼킬 때이다. 물론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처럼 정통 멜로영화의 여주인공이 되어 흐느껴 울 때에도 그녀의 연기는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하지만 눈시울과 코끝이 빨개지는 순간 그녀가 대사를 멈추고 시선을 피한 뒤 입을 살짝 매만지고는 다시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 보일 때 더없이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 아마도 언제나 당당하게 우뚝 서 있을 것 같은 사람이 들키고 싶지 않은 연약한 부분을 가리기 위해 말없이 주섬주섬 허리를 굽히는 광경을 훔쳐본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그 유명한 민낯 장면이 안겨주는 심리적 파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창백한 맨얼굴은 별다른 표정 연기 없이 그 얼굴만으로도 메릴 스트립이 나약해진 순간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변주되며 사용되었다(<철의 여인>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 <어바웃 리키>).

메릴 스트립은 “마흔살이 되던 해 마녀 역할이 세개나 들어왔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되풀이했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손에 들어온 시나리오를 통해 나이 듦을 실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노파나 마녀’ 역할만이 그녀를 기다린 건 아니다. <디 아워스>에서 세 여배우의 열연 행렬에 동참했고 <다우트>라는 명작을 만났으며 <철의 여인>으로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품에 안았다. <어바웃 리키>에서는 록가수를, 차기작 <서프러제트>에서는 여성 참정권을 위해 투쟁한 실존 인물 에밀리 파크허스트를 연기한다고 하니, 20여년 전 그녀가 세편의 마녀 시나리오를 받고 우려했던 일은 여전히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

<실크우드>

담배가 필요한 순간

메릴 스트립이 영화에서 담배를 섹시하게 피우는 경우는 드물다. 그녀는 지금 당장 담배 한 개비가 없으면 안될 사람처럼 담배를 피운다. <마빈의 방>에서 백혈병에 걸린 언니를 만나러 가서 담배를 피울 때도 그렇고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에서 구강암을 앓으면서도 담배를 찾을 때 그렇다. 초기작으로 거슬러 올라가 거대 기업에 맞섰던 실존 인물 캐런을 연기한 <실크우드>에서도 마찬가지다. 로저 에버트와의 인터뷰에서 메릴 스트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드류는 캐런이 담배를 많이 피웠다고 알려줬다. 그래서 나도 캐런이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것처럼 느끼는 장면에서는 순간적인 위안이 필요해 담배를 피웠고 아이들을 만나러 전남편의 집에 갈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절망적인 손길로 테이블을 더듬으며 담배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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