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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 cross] 17살 배우가 연기하는 17살 알런

연극 <에쿠우스>의 서영주

지난 8월24일, 대학로 나온씨어터에서 <에쿠우스> 배우들이 실전 같은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극단 실험극장 대표이자 <에쿠우스> 연출자인 이한승 감독은 “알런과 같은 나이의 배우가 알런을 연기하는 것은 세계 최초”라면서 서영주의 가능성과 재능을 칭찬했다. 그의 연기적 재능이야 그가 열다섯살에 출연한 <범죄소년>(2012)을 통해 입증된 것 아닌가 싶지만, 서영주에겐 <에쿠우스>가 첫 연극이다. 그리고 아직 서영주는 만으로 열일곱살이다. 광신도 어머니와 보수적인 아버지에 의해 길러진 알런에게 말과의 교감은 억압된 욕망을 해소시켜주는 창구로 작용한다. 말과 하나됨을 바라는 알런은 그러나 말의 눈을 찌르고 정신과 의사인 다이사트에게 치료를 받는다. 열정만으론 소화하기 힘든 <에쿠우스>의 알런을 서영주는 어떻게 표현할까. 연습이 없다는 다음 날, 서영주와 마주 앉았다.

-첫 공연이 10일쯤 남았다. 현재의 솔직한 심정은.

=오늘 (연습) 쉬어서 좋다? (웃음) 이젠 부담이나 긴장감을 많이 버렸다.

-한창 대학 입시 준비할 시기에 중요한 공연을 준비하게 됐다.

=오히려 예민한 시기에 <에쿠우스>를 만나서 안정감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나름 연기를 한다고 했지만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에쿠우스> 하면서 연기의 기초부터 새로 배워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입시준비도 되고.

-연극영화과를 희망한다고 들었다. 어릴 때부터 연기를 했으니 다른 학문에 대한 호기심도 가질 법한데.

=연출을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다. 연기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질 것 같아서. 그외엔 글쎄 딱히 없다.

-<에쿠우스>의 한 대목을 연극영화과 실기 시험으로 준비하던 중 극단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오디션을 보게 된 것으로 안다.

=<에쿠우스>와 알런은 너무도 하고 싶은 작품이고 캐릭터였다. 합격 여부를 떠나서 오디션을 보는 것 자체가 정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운이 좋아 무대에까지 서게 됐는데, 주위에서 많이 도와준 덕이다.

-17살의 알런을 17살 배우가 연기하는 건 세계 최초라고 하더라. 게다가 본인의 첫 연극이다. 부담감과 함께 자부심도 클 것 같다.

=처음엔 부담감이 엄청 컸다. 사람들이 나를 알런으로 봐줄까 싶었다. 게다가 국내에서도 조재현, 최민식 선배님 등 훌륭한 배우들이 알런을 연기했다. 그런데 10대 배우가 연기한 알런은 지금껏 한번도 없었다고 하더라. 그럼 내 나이대의 알런, 진짜 10대의 알런을 보여줄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내 식대로 해석한 알런을 오디션 때 선보였는데, 많이 혼났다. (웃음) 알런은 그렇게 연기하는 게 아니라고. 사춘기 시절에 무언가에 확 꽂히면 그것만 보게 되곤 하잖나. 알런 역시 순수하게 말을 사랑한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런에겐 좀더 아픔이 있어야 한다고 하더라. 그 아픔을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은데,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다.

-자신이 사랑한 말의 눈을 찌른 알런의 내면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처음엔 그 행동이, 그 고통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지난해 <에쿠우스> 공연에서 알런을 연기한 배우 전박찬 형을 만났다. 형이 그러더라. 알런을 받아들이고 힘들어하면 되지 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냐고. 힘들어하지 말고 즐기면 된다고.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무대에서 자유로워지더라. 좀더 연극이란 매체에 맞게 즉흥적으로 상대에 반응하고 연기하게 되는 것 같다. 요즘엔 기왕 하는 거 제대로 나만의 알런을 보여주자는 마음이다.

-서영주만의 알런은 어떤 알런인가.

=순수한 소년처럼 보였으면 좋겠다. 그 순수가 전부는 아니겠지만, 나도 너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고 그저 순수할 뿐이라는 것, 그런 모습들이 전달됐으면 좋겠다.

-<에쿠우스>에는 알런이 알몸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지난해 국내 공연에서도 알런의 전라 노출이 있었는데 이번 공연은 영주씨의 나이 때문에 전라 노출은 하지 않는다고.

=(관객에게도 연출진에도) 정말 죄송한 마음이다. 알런이 옷을 벗는 것은 자유로움과 해방감의 표현이다. 그 모습이 결코 외설적이지 않다. 그런데 내 나이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는 게 모두에게 미안하다. 그런데 공연장인 충무아트홀 무대가 객석과 진짜 가깝다. 다 벗으면 정말 부담스럽겠다는 생각도 들더라. (웃음)

-노출을 연기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기까지 분명 스스로 넘어야 할 벽이 있을 것 같다. 이번에도 팬티 한장 걸치고 연기하는 건데.

=별로 걱정되는 건 없다. 지난해에 공연한 배우들도 다 벗고 했는데 뭘. 김기덕 감독님의 <뫼비우스>(2013)를 하면서 연기는 연기일 뿐이라는 선이 딱 그어진 것 같다. 그때 같이 연기한 선배님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건 연기인데 뭐가 부끄러운 거지? 부끄러워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연극 연습하면서 무릎에 무리가 생겨 병원도 갔다던데.

=생각보다 연극 진행 속도가 빠르더라. 다이사트 박사 역의 안석환, 김태훈 선생님도 그렇고 지난해에 공연했던 배우들이 올해도 다시 무대에 서는 거라 알런만 제대로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처음엔 그 속도를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무릎을 꿇는 장면도 많고 점프하는 장면도 있는데 요령 없이 쾅쾅 무릎을 찍으며 했으니 무릎이 성할 리 없었다. 결국 무릎에 물이 좀 차고 힘줄도 파열되고 관절염에…. (웃음) 지금은 재활치료를 계속 받아서 괜찮아졌다.

-실제 성격은 어떤 편인가. 소속사 대표의 얘기로는 굉장히 바르다던데.

=대표님 앞에선 바른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게 맞는 거니까. (웃음) 공부할 땐 공부하고 연기할 땐 연기하고 놀 땐 놀아라, 이게 아버지한테서 배운 건데, 그렇게 살려고 한다. 그리고 어둡고 심각한 연기를 많이 해서인지 사람들이 날 굉장히 어둡게 보는 경향이 있다. 눈도 짝눈이어서 날카롭게 보고.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잘 웃고 말도 잘한다.

-짝눈이면 바람둥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아니다. 여자친구 생기면 한 여자만 바라볼 자신 있다. (웃음)

-<범죄소년>의 지구는 어쩌면 지금의 서영주를 있게 해준 캐릭터가 아닌가 싶은데, 돌아보면 <범죄소년>은 어떤 작품이었나.

=연기를 제대로 시작하게 해준 작품이다. <범죄소년> 하면서 많은 걸 깨달았다. 주인공으로서의 책임감도 많이 느꼈고, 내 연기에 사람들이 공감하고 좋아해주는 것을 보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범죄소년> 덕에 해외영화제에도 처음으로 가봤다. 다른 언어를 쓰는 관객이 박수 쳐주고 질문 해주는 것도 신기했다.

-엑스트라 경력까지 치면 초등학생 때부터 연기를 했다. 아역배우라는 타이틀 때문에 10대의 생활을 즐기지 못해 후회되는 것은 없나.

=오히려 연기를 했기 때문에 또래보다 자유롭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연기가 하고 싶어 난리인데 나는 원하는 연기를 하고 있으니 행복했고. 또 10대 때 못 논 건 20대 돼서 놀아도 되는 거니까.

-롤모델이 배우 김윤석이라고 들었다. 어떤 작품을 보고 좋아하게 됐나.

=사실 아직은 보면 안 되는 작품들이긴 한데, 영화 <추격자>와 <황해>를 보면서 좋아하게 됐다. 물론 극장에서 본 건 아니다. TV로 봤다. 김윤석 선배님을 보면 캐릭터에 맞게 외적으로, 내적으로 항상 변화하시더라. 그리고 내가 <도둑들>에서 마카오박(김윤석)의 아역을 연기했다. 그때 현장에서 잠깐 김윤석 선배님을 봤는데 연기할 때의 모습과 연기를 하지 않을 때의 모습이 또 다르더라. 스탭들 챙겨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사람들을 위하는 배우가 돼야지 하고 생각했다. 좋은 배우는 카메라가 돌아가건 아니건, 무대 위에서건 아래서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위하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20대는 어땠으면 좋겠나.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대신 연기할 때만큼은 진지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연기하는 날 봤을 때 진정성이 느껴졌으면 좋겠다.

-연극은 계속 하고 싶은가.

=좀더 성숙해진 뒤에 다시 하고 싶다. <에쿠우스> 하면서 스스로 부족함을 많이 느낀다. 생각도 더 깊어지고 준비도 더 됐을 때 다시 도전하고 싶다. 지금은 알런이니까, 무척이나 연기하고 싶었던 알런이니까 연기할 수 있는 것 같다.

이한승 감독, 박서연, 서영주(왼쪽부터).

한국 초연 40년 기념 <에쿠우스>

극작가 피터 셰퍼의 작품으로, 자신이 사랑한 말 여섯 마리의 눈을 찌르고 법정에 선 17살 소년 알런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연극은 소년 알런과 알런의 치료를 맡은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를 통해 신과 종교, 사랑과 섹스, 정상과 비정상, 욕망과 억압 등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국내에선 1975년 9월 극단 실험극장이 <에쿠우스>의 첫 공연을 올렸다. 이번 공연은 초연 이후 40년을 기념하는 공연이다. 알런 역에 서영주, 남윤호, 다이사트 역에 안석환, 김태훈이 더블 캐스팅됐다. 9월4일~11월1일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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