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비평
[안시환의 영화비평] 듣기의 예술

‘노동자 계급’의 리얼리티와 퍼포먼스가 만나야 했던 이유

<위로공단>

<위로공단>(2014)은 22명의 노동자가 자신의 일과 일터에 얽힌 사적 경험과 기억을 고백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그들의 사연 하나하나를 듣다 보면,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사연이 ‘노동자 계급’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마치 나무 하나하나를 보며 걸었는데 어느새 숲을 조망하는 위치에 서게 된 듯한 느낌. 임흥순은 자본주의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결과인 계급 갈등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도, 이 땅의 노동자(더 나아가서는 동남아 지역의 노동자까지) 계급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사람의 집단으로서 노동자 계급. 어쩌면 지금까지의 역사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미지이기도 한) ‘얼굴 없는 마네킹’처럼 노동자 계급을 다뤄왔는지도 모른다. <위로공단>은 노동자 개개인의 사연을 통해 마네킹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그렇게 노동자의 역사가 살아난다.

일터와 만나지 못한 목소리

노동은 누군가에게는 생계의 수단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는 자아실현의 길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고용되었다는 이유로 인간 존엄의 가치가 위협당할 때, 노동자의 일터는 생계나 자아실현의 터전이 아니라 투쟁의 장이 되곤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싸우기 위해 일터로 나가야 한다. 임흥순이 아무리 계급이라는 거시적 관점의 접근을 꺼려한다 해도, 노동자의 사연 속에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그림자처럼 달라붙는 것까지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위로공단>이 들려주는 사적 경험 속에는 개인의 힘과 의지가 무력해지는 순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YH무역에서부터 기륭전자, 한진중공업, 홈에버, 그리고 삼성전자에 이르기까지, 무력함이 개인의 삶을 덮쳐온다. 어쩌면 이 무력함의 경험이야말로 개인이 이 사회의 실체를 실질적으로 깨닫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개념으로서의 사회가 아니라 개인의 삶에 작용하는 거대한 힘으로서의 사회.

<위로공단>에서 (한국 현실을 고려할 때) 가장 당연하면서도 이상한 것은, 노동자가 ‘자신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의 일터’에서 말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22명의 노동자 중 자신의 일터에서 인터뷰를 진행한 이는 콜센터 직원이 유일하다. 마트에서 찍은 장면이 <카트>의 세트였으니, 노동자의 실제 일터에서 인터뷰한 장면은 다산콜센터가 전부다. 그렇게 일꾼의 목소리는 일터를 만나지 못한다. 이 땅의 노동자는 자신의 일터에서 일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할 권리를 잃었다. 사업장이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육체일 뿐, (일과 일터에 대한) 생각이 아니다. 부재하는 일터, 또는 일터와 만나지 못한 목소리,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 땅의 노동자가 처한 삶의 리얼리티, 그 자체다.

임흥순은 박찬경과 인터뷰하며 자신의 영화, 또는 미술 작업을 “미세한 것들이 모여가는 과정”이라 말한다. 실제로 <위로공단>의 카메라는 인터뷰이의 얼굴에만 머물지 않는다. 갑자기 시선을 돌려 버릇 같은 사소한 동작이나 옷차림을 바라본다. 이는 임흥순이 미세한 것들을 모아가는 과정이겠지만, <위로공단>이 노동자의 리얼리티에 더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은, 미세한 것들이 직접적인 의도(가령, 카메라의 자의식적인 움직임) 없이 우연히, 그리고 무심히 카메라에 담겼을 때이다. 스스로를 콜순이로 칭했던 다산콜센터 직원의 ‘떨리는 손’을 보았을 때,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서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대해 크레인 농성을 벌인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말을 빌리자면, 행인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연설하는 일은 그녀가 선택한 삶이 아니다. 연설의 내용보다 떨리는 손, 떨리는 목소리가 우리의 가슴을 더 후려치는 까닭은, 그 떨림이 그녀의 절박한 현실을 처절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로서의 개인의 삶, 달리 말해 이 땅에서 일하는 ‘노동자 계급’의 리얼리티.

잘 듣는 영화

<위로공단>의 ‘위로’라는 표현은 위험하다. 영화에 대한 가치 판단의 기준을 위로라는 단어가 미리 규정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위로하는 척하기는 쉬워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위로’가 ‘공단’을 만났으니… 표면적으로 보자면, 임흥순은 공단을 다큐멘터리로, 위로를 실험적 이미지와 퍼포먼스의 형태로 다가서려 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관객은 후자보다 전자에서 가슴의 울림을 경험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런데 혹 누군가는 눈물로 표출되는 인터뷰이의 내밀한 감정까지 카메라에 담아내는 이 영화의 태도에서 슬라보예 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의 한 대목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허락 없이 타인의 내밀한 감정까지 파고드는 다큐멘터리의 외설성에 대한 언급 말이다. 말 그대로 ‘진짜 눈물의 공포’.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는 삶의 내밀한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허구의 힘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것이 키에슬로프스키가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전환한 이유다. 허구는 ‘진짜 눈물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였던 셈이다.

임흥순은 <위로공단>에 등장하는 실험적 이미지나 퍼포먼스가 “여성 노동자들의 삶, 그들의 바닥에 깔린 심리, 그 내면을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이야기한다. 지젝의 언급을 단순하게 적용한다면, 임흥순은 실험적 이미지와 퍼포먼스를 통해 다큐멘터리의 외설성을 피하려 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위로공단>의 경우는 내밀한 감정의 표출을 다큐멘터리로 담는 장면보다, 실제 인물의 사연 ‘그 바닥에 깔린 심리’를 미학적으로 풀어내는 순간이 더 아슬아슬하다. 그들의 내면을 ‘미학적’으로 접근할 때, 그것은 다큐멘터리의 외설성보다 더 외설적인 욕망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미학적 욕망을 구현하기 위한 알리바이로서의 위로의 제스처. <위로공단>이 이 아슬아슬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인터뷰이와 카메라간의 사라진 거리감에 있다. 임흥순은 분주하다. 그는 과거와 현재, 여기와 저기, 그리고 육체노동자에서와 감정노동자, 한국 노동자에서부터 캄보디아 노동자를 오가며 그들의 웃음을, 한숨을, 눈물을, 울분을 듣고, 보고, 담는다. (캄보디아 노동자를 제외하면) 영화 속 노동자는 카메라를 기록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처럼 대한다. 임흥순의 카메라는 (수전 손택이 비판한 바 있는) 한발 떨어진 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부당한 특권을 포기한 채, 그들과 정서적으로 가까운 곳에서 귀를 기울인다. <위로공단>은 잘 찍은 영화가 아니라, 잘 ‘듣는’ 영화다. 역시, 위로는 입이 아니라 귀의 힘이다.

디지털 이미지 시대의 민중미술?

<위로공단>은 개인으로서의 노동자의 삶을 충실히 기록함으로써, 계급으로서의 노동자의 역사를 주인공으로 세운다. 이 작품을 두고 ‘디지털 이미지 시대의 민중미술’이라 불러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엉뚱할 수도 있는 생각이 따라붙었다. 과거, 민중미술의 전시관은 (미술관이 아닌) 광장이었다. 그렇다면 <위로공단>과 같은 디지털 이미지 시대의 민중미술의 전시장은 어디일까? 어두컴컴한 극장인가? 호화스러운 미술관인가? 그것은 과연 옳은 현상일까? 그 많던 광장의 미학은 다 어디로 갔을까?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