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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키 기린] 어머니/독설가

<앙: 단팥 인생 이야기> 기키 기린

<앙: 단팥 인생 이야기>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뛰어드는 여자와 뛰어나가는 남자>(2015) <앙: 단팥 인생 이야기>(2015)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쓰나구>(2012) <내 어머니의 연대기>(2011)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마루 밑 아리에티>(2010) <악인>(2010) <걸어도 걸어도>(2008)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2007) 외 다수

한국에 김수미가 있다면 일본에는 기키 기린이 있다. 알다시피 김수미가 MBC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노인으로 분장하고 일용 엄마 역을 처음 맡았던 때 나이가 고작 스물여덟. 아들 일용은 탤런트 선배이자 네살 연상인 박은수가 연기했다. 1974년, 당시에는 유우키 지호라는 예명을 썼던 기키 기린이 <TBS> 드라마 <데라우치 간타로 일가>에서 머리를 탈색하고 노모 역할을 맡았을 때가 불과 서른세살. 아들 간타로 역의 고바야시 아세는 그녀보다 열살이 많았다.

스즈키 세이준, 나카시마 데쓰야,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리고 최근작 <앙: 단팥 인생 이야기>(2015)의 가와세 나오미까지, 필모그래피만 볼 때 기키 기린은 우리에게 아트하우스 내지 다양성영화의 든든한 안주인 같은 이미지다. 그러나 김수미가 이후 숱한 배역을 거쳤음에도 대표 캐릭터는 일용 엄마인 것처럼, 일본의 대중에게 그녀는 <데라우치 간타로 일가>의 어머니이자 1980년 후지필름 광고 속 감초 노파라는 두개의 ‘연예인’ 이미지로 기억된다. “아름다운 사람은 더 아름답게, 그저 그런 사람은… 그저 그렇게 나온다”는 말에 빈정 상해서 현상소를 떠나는 기모노 차림의 할머니. 상투적으로 명품조연이라든가 국민엄마 같은 타이틀이 어울리는 이미지다. 거기에 연예인 캐릭터와는 상당히 괴리가 있는 ‘자연인’으로서의 모습들까지 더해 기키 기린이라는 의외로 문제적인 인물의 이미지 총합이 완성돼온 것이다.

그러니까 자연인 기키 기린의 파란만장한 연대기와 당시 그녀의 배역은 늘 묘한 엇박자를 이뤄왔다는 말이다. 열여덟살 때 명문극단 분가쿠좌에 입단했으나 주어지는 역할은 기껏해야 행인1 정도의 단역 일색이었다. 10여년의 무명 생활 끝에야 변두리 목욕탕을 배경으로 한 <TBS> 코미디 드라마 <시간 됐어요>(1971)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 여기서 사카이 마사아키와의 콤비 개그로 주목받았던 그녀는 2년 후 일본 록계의 수령이라 불리는 뮤지션 우치다 유야와의 결혼 발표로 파란을 일으켰다. 감초연기의 꿈나무에서 한순간에 록스타의 연인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인데, 그 화려함의 잔상이 채 사라지기도 전인 이듬해에 기키 기린은 <데라우치 간타로 일가>에서 할머니로 변신했다. ‘일본의 어머니상’ 같은 배역을 소화한 직후 아이러니하게도 기키 기린과 우치다 유야 부부는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기나긴 별거에 들어간 한편, 그녀는 당대 최고의 아이돌 가수인 고 히로미와 함께 듀엣곡 <사과 살인사건>을 발표하여 대단한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 말은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즉 돌직구 독설가 캐릭터는 자연인인 기키 기린의 또 다른 대중적인 이미지 중 하나다. 요시다 슈이치 원작의 <악인> 제작발표회는 2010년 남아공월드컵 조별예선으로 축구 열기가 최고조이던 시기에 열렸다. 대표팀에 응원의 메시지를 전해달라는 사회자의 말에 그녀는 “축구하면 머리에 공을 많이 맞아서 뇌세포가 죽는다. 손자에게는 축구를 시키고 싶지 않다”는 답변으로 좌중을 난감한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말하자면 의례적이거나 괜한 인사치레 따위는 절대 사양인 인물로, 그 대상에는 자신이 출연한 작품이나 함께 작업한 감독들도 예외가 아니다. 출연작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2005)에 대해서는 “릴리 프랭키의 훌륭한 원작을 폭넓게 살리지 못한 연출”이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가 하면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가리켜 “여배우 보는 눈이 없는 감독”이라며 일침을 놓기도 했다. 원래 <걸어도 걸어도>(2008)의 노모 역할은 다른 배우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기키 기린이 자신만큼 적합한 배우는 없다고 강력히 주장해 배역을 따낸 것은 유명한 일화다. 연기에 대해서도 엄격한 편이라 현장에서 젊은 여배우들의 눈물을 쏙 빼놓은 일도 적지 않다고 하니 이쯤 되면 <앙: 단팥 인생 이야기>의 가와세 나오미 감독에 대해 “내 의견은 아무것도 받아주지 않는다”고 툴툴댄 것은 노인네의 귀여운 애교로 보일 지경이다.

배우이자 연예인 기키 기린과 자연인 기키 기린 사이의 괴리. 이것은 상당수 영화에서 그녀가 맡은 배역의 의외성과도 맥을 같이한다. 많은 경우 그녀의 캐릭터들은 작품의 공기를 거스르는 인물이었는데, 이를테면 초현실적 무대에서 킬러들의 살육전이 펼쳐지는 스즈키 세이준의 <피스톨 오페라>(2001)에서도, 살수집단의 넘버3 ‘도둑고양이’를 보필하며 그저 살림만 하는 역할이었다. 장차 <앙: 단팥 인생 이야기>에서 점장과 알바생으로 다시 만나게 될 나가세 마사토시와 ‘도둑고양이’ 에스미 마키코가 일촉즉발의 신경전을 펼치는 와중에 비염으로 고생하는 넘버1 나가세 마사토시에게 티슈를 건네는 일상연기는 영화의 긴장을 일순 무너뜨린다. 그저 그런 도라야키 가게를 맛집으로 변화시키는 <앙: 단팥 인생 이야기>에서 팥소의 달인인 도쿠에는 영화의 표표한 정서를 순식간에 전복시킬 비극적 비밀을 숨기고 있다. 비범 속의 평범, 아니면 평범 속의 비범. 요컨대 많은 감독들에게 기키 기린이라는 선택지는 서사의 저울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한 최상의 추 역할을 해왔다고 할까.

그런 한편, 2000년 이후로는 괴리 또한 메워지기 시작했다. 우치다 유야와의 별거 이후 팩스로만 안부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유지해온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배역에서 어느새 남편은 자취를 감추었거나, 있어도 중병을 앓는 식으로 짐만 될 뿐이다. 예외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와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정도인데, <걸어도 걸어도>에서는 젊은 시절 남편의 외도를 오랜 세월 마음에 담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게다가 이미 갑상선암으로 수술을 받았으나 차후 재발하여 결국 기나긴 투병에 들어가는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에서의 배역처럼, 기키 기린 역시 2005년에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2013년에 암이 전신으로 전이되었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했으며 항암치료 끝에 다행히도 2014년에는 완치를 선언했다. <걸어도 걸어도>에서 자신의 실제 틀니를 공개했던 것에 대해서도 “모처럼 치과에서 만들어준 건데 쓰지 않으면 손해잖아”라고 대수롭지 않게 언급한 것처럼, 그녀의 독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데는 늘 자신부터 객관화하는 태도가 버티고 있었다.

나무와 나무, 숲을 꿈꾸다. 그녀의 예명 기키 기린(樹木希林)의 의미다. 예명에도 그녀다운 히스토리가 존재한다. 1977년 스타 애장품을 기부하는 생방송 출연 당시 “팔 물건이 없다”는 이유로 이전까지 쓰던 예명 ‘유우키 지호’를 경매에 내놓았던 까닭. “되는 대로 살자”는 그녀의 좌우명다운 사건이었다. 그러니 “인수분해 같은 건 왜 배우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하는 여학생들에게 “너희가 학교를 재미있게 바꿔 봐. 다 내버려두고 논다든지”라고 말하는 <앙: 단팥 인생 이야기>의 도쿠에는, 인생이라는 숲속에 이런저런 나무들이 다양하게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자연인 기키 기린과 어쩌면 가장 닮은 캐릭터인지 모른다.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

첫 주연, 첫 주연상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

주인공 엄마 배역이 주연이기도 한 경우는 좀처럼 드물다. 그 드문 기회를 통해 일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영예까지 안은 것은 기키 기린에게도 분명 각별했을 터. 비록 그해 시상식에서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가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2006)를 제치고 상을 독식한 것에 대해서는 잡음이 적지 않았으나, 그녀의 연기력에 대해선 이견이 없었다. 에세이스트인 딸 우치다 아야코가 자신의 젊은 시절 캐릭터를 연기한 것 또한 각별함을 더했다. “절반밖에 출연하지 않았는데 상을 받아서 미안합니다”라는 수상 소감과 달리 자칫 상투적인 신파로 흐를 수 있는 영화의 감정선을 붙들어 맨 건 오롯이 그녀의 공이었다. 아들 사랑은 극진하되 술, 담배, 화투라면 사족을 못 쓰는 비관습적 모성을 연기한 기키 기린은, 항암치료에 따른 고통을 호소할 때를 제외하면 철저히 감상의 과잉을 배제하고 절제된 연기를 펼쳤다. 그리고 그 절제가 오히려 결말의 비극성을 강화했다는 점은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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