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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잘 보이나요?
김혜리 2015-09-17

<지아장커: 펜양에서 온 사나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될 <지아장커: 펜양에서 온 사나이>는 월터 살레스 감독이 지구 반대편 동료 시네아스트를 취재한 다큐멘터리다. 극장에서 못 튼다는 사실만 빼면 오늘날에는 디지털 촬영 복제 기술로 누구나 영화를 만들고 볼 수 있으니 정부의 상영 금지도 무의미하다고 인터뷰하던 지아장커는, 문득 다른 기억에 사로잡혔다. “어느 카페에서 개봉하지 못한 <플랫폼>을 틀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막상 가보니 빛이 그대로 들어오는 통유리창이라 영화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랴부랴 검은 천을 구해 가리고 나니 비가 새기 시작했어요. 정상적 영사로, 진짜 의자에 앉아, 불 꺼진 방에서 볼 수 없는 내 영화가 슬펐습니다. 극장에서 틀 수 없는 내 영화가 정말 슬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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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 명동. <침묵의 시선>을 알리기 위해 서울을 찾은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을 만났다. 그의 첫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을 보고 다들 놀랐던 점은 대량 학살을 저지르고도 카메라를 전혀 꺼리지 않는 가해자들의 감수성이었다. 이 행태의 원인은 물론 정치적 패배의 기억이 전무해 미디어가 자신들에게 적대적일 수 있다는 상상도 못하는 인도네시아의 특정한 역사적 환경에 있다. 그런데 오펜하이머 감독을 본 나는 <액트 오브 킬링>의 그들이 어째서 경계하지 않았는지 부차적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아무도 긴장시키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높은 음색으로 상냥하게 말했고, 일화와 체험을 결론에 앞세웠고, 관심의 사각지대부터 살폈다. 일행이 무심코 낮은 안락의자에 둘러앉아 있는 동안 목발을 쓰는 한명이 로비 건너 높은 의자에 혼자 걸터앉은 걸 본 감독은, 모두를 그쪽으로 부드럽게 이끌었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며 다가온 열일곱 소녀에게는 자서전을 구술할 기세로 응했다. 유년 시절에 대한 대답 중 한 대목이 솔깃했다. “뭘 하고 놀았냐면… 산책을 다녔는데 차도에 달팽이가 보이면 치일까봐 길 바깥으로 치워놓느라 늘 바빴다.” 10년 가까이 타국에서 권력의 위협을 감수하며 한 사건에 관한 다큐멘터리들을 만든 끈질긴 기록자에 대해 뭇사람들이 떠올릴 터프한 초상과는 꽤 다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달팽이를 이유 없이 괴롭히는 사람에게 누구보다 서슴없이 맞서는 아이도 곧장 떠올릴 수 있었다.

<액트 오브 킬링>과 <침묵의 시선>이 어떤 관계라고 딱 꼬집어낼 단어를 고르기는 어렵다. <액트 오브 킬링>은 권력의 비호로 50년 동안 특권층으로 무난히 살아온 학살자들의 인식을 찍은 다큐멘터리였다. 기만, 환상, 악몽의 성분으로 이뤄진 이 ‘인식’은 가해자들의 자발적 퍼포먼스로 시각화되어 관객을 흔들어놓았다. <침묵의 시선>은 <액트 오브 킬링>의 제작에 협력하는 과정에서 형을 죽인 당사자를 알게 된 유족이, 방조한 친척부터 군 책임자까지 다양한 위치의 가해자를 찾아가 묻는 여정이다. 편집된 영화에는 일곱 차례의 대면이 담겼다. <액트 오브 킬링>의 중심은 학살 주체 판차실라 청년단의 안와르 콩고와 동료들이고, <침묵의 시선>의 축은 형과 아들을 살해당한 아디 루쿤과 노부모다. <액트 오브 킬링>이 오페라적이라면 <침묵의 시선>은 실내악에 가깝다. 톤으로 보면 두 영화는, 한 주제 아래 이질적인 사운드로 2장의 CD를 프로듀싱한 더블 앨범 같기도 하다. 카메라가 질문자 뒤를 따라다니는 방식을 주로 취한 <침묵의 시선>은 “세상에 이런 영화가!”라는 파란을 부른 <액트 오브 킬링>에 비하면 익숙한 형식의 다큐멘터리다. 아디는 가해자를 직면해 직설적으로 묻고 반문한다. 하지만 <침묵의 시선>은, 갤러리에서 영사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이미지와 사운드가 조율된 영화이기도 하다. 몇몇 숏은 유명한 회화와 사진의 구도를 연상시킬 정도다. 음향 역시 정갈히 다듬어져 있다. 귀뚜라미 울음이 통주저음으로 영화 내내 깔리며 일관된 ‘무드’를 유지하는 가운데 아디와 가해자의 문답에 끼어드는 소음은 꼼꼼히 깎여 있다. 오펜하이머 감독은 여기에 더해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믹싱을 언급했다. “아디의 방문을 받은 한 학살자의 딸이 아버지의 잔혹 행위를 처음 알게 된 순간, 집 밖에서 뛰어노는 자녀들의 소리를 가깝게 들리도록 했다. 그녀는 이 남자의 여생을 돌보며 같은 지붕 아래에서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이 주석으로도 짐작되는 바지만, 오펜하이머 감독은 <침묵의 시선>이 <액트 오브 킬링>에 비해 관습적(conventional) 다큐멘터리라는 상대 분류에조차 동의하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사운드가 선을 넘어 관객에게 따로 의식되면 안 되지만, 아디의 내면과 가해자와 유족, 원혼이 함께 사는 마을의 공기를 표현하도록 매만지는 것은 다큐멘터리 연출의 정당한 영역이다. 요컨대 다큐멘터리의 진실은 있는 그대로를 찍는 게 아니라 보이거나 들리지 않았던 것들을 보이고 들리게 하는 작업에 있다는 것이 오펜하이머의 입장이다.

<액트 오브 킬링>만 관람한 시점에서 나는 “당신의 기억대로 살인을 재연해 달라”라는 감독의 요청에 응한 안와르 무리의 롤플레잉을, 가해자들의 마비 상태에 균열을 내기 위한 일종의 일회적인 예술적 ‘계책’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는 좀더 원칙적인 오펜하이머의 다큐멘터리관과 맞닿아 있었다. 감독은 자신의 다큐멘터리 속 인물들은 스스로를 연기하는 셈이라는 표현을 썼다. “영화를 찍는다는 사실이 실존 인물들로 하여금 안전지대를 벗어나 행동하는 상황을 부여하고- 안와르의 경우 재연, 아디에게는 대면-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인물이 실제로 변화한다. 컨셉이나 스크립트는 전혀 없지만 다큐멘터리가 불가피하게 리얼리티에 개입한 것이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아직 상세히 소개할 수 없는 차기작도 “다른 종류의 리얼리티”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라고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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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선>은, 살인의 추억을 자랑스레 늘어놓는 가해자들의 영상을 보는 유족 아디 루쿤의 클로즈업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이해할 만한 선택이다. 조심스럽게 쓰자면, 아디는 어느 픽션의 영웅 못지않게 영화적인 ‘캐릭터’다. 이 남성은 힐문할 자격이 있는 당사자일 뿐 아니라 현명한 해석자다. 가해자들의 뻔뻔한 추억담을 본 그는 울화를 터뜨리는 대신, 저들은 두렵기 때문에 더욱 호기롭게 떠벌리고 있다고 관찰한다. 가해자들의 닫힌 문을 노크하는 질문자로서, 아디는 놀라운 평정심과 침묵을 다루는 기술을 보여준다. 그의 얼굴은 관객의 분노와 혼란까지 흡수한다. 합리화하는 상대방에게 돌려주는 아디의 침묵과 시선은 종종 가해자들을 ‘더’ 말하도록 압박하고 회의(懷疑)를 깨운다. 영화제목이 갖는 의미는 삼중이다. 책임을 회피하는 자의 침묵, 그리고 인도네시아 정부와 국제사회의 침묵이 만든 참담한 광경(look)이 있고, 거기 던져진 아디의 말없는 시선(look of silence)이 세 번째다. 게다가 그의 직업은 세상을 더욱 잘 보게 돕는 검안사다. 만약 <침묵의 시선>이 극영화였다면 너무 노골적인 설정이라는 거부감을 샀을 테지만 이 경우엔 함축적인 말과 이미지를 낳는다.

아디의 고요함은 그의 특수한 입장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그는 형 람리가 끔찍하게 살해당한 2년 후 애통함으로 폐인이 되어가던 부모 사이에서 망자의 환생처럼 태어났다. 그는 형을 모르지만 스스로 곧 형이기도 했다. 망각 속으로 잠겨든 아버지, 지독히 세세히 기억하는 어머니가 각자의 방식으로 50년간 견딘 것은 아들의 죽음이고, 아디가 평생 견딘 것은 형의 생생한 부재다. 내장이 흘러나온 채 끌려가는 아들을 목격한 100살 넘은 부모에게는 용서를 위한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 어머니는 단언한다. “내 아들을 죽인 자의 자손들까지 고통받길 바란다.” 아디의 말은 다르다. “그들이 후회하면 용서할 수는 있을 거예요.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이니까.” 이 관용은 직접 학살의 고통을 체험하지 않아서일까? 우월한 도덕성일까? 그런 것 같진 않다. 단지 아디의 시간이 달라서다. 그에게는 여생이 있고 삼촌이 빨갱이라 죽어 마땅했다고 학교에서 배워오는 어린 남매가 있다. 어머니는 복수를 말하지만 실상 가해자들은 인정조차 하지 않았다. 사죄는커녕 아디의 가족은 여전히 간수인 그들로부터 죄수의 굴욕과 공포를 강요받는다. <침묵의 시선>을 찍기로 한 아디의 결단은, 이 감옥을 아이들에게 상속하지 않는 첫 단계로서 가해자에게 자신과 가족의 진짜 ‘지위’를 천명하는 선언적 행동으로 보인다. 누가 죄를 지었냐고. 용서받아야 할 쪽은 당신들이고 용서할 수 있는 쪽은 우리라고.

<앙: 단팥 인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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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될지도 몰라, 배우

2011년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개봉 무렵 방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배우의 꿈을 좇기로 결정하는 소녀 메구미 역의 우치다 가라에 대해 “캐릭터의 생각과 느낌을 이해하고 싶다며 내게 대화를 요청하기도 했다. 찍는 동안 장래에 배우가 되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고 인터뷰에서 들려줬었다. 소녀는 4년 만에 <앙: 단팥 인생 이야기>(이하 <앙>)에서 실제 할머니 기키 기린과 다시 공연했다. 워낙 배우 집안이지만 장래에 대해서는 여전히 “창의적인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은 보탬이 되니까” 정도의 신중한 입장이다. <앙>의 우치다 가라는 받아 마땅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중학생으로 분해, 타인을 보살피고 싶어 하지만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70대 도쿠에(기키 기린)와 마주 본다. 언뜻 한국 배우 신세경의 느낌도 스쳐가는 <앙>의 그녀는 이를테면, 버스 안의 모든 승객이 눈길을 빼앗기진 않지만 우연히 내 옆자리에 앉게 된다면 틀림없이 말을 걸게 될 것 같은 소녀다. 행여 대꾸라도 해준다면 비밀스런 고민까지 털어놓을지도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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