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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친일’이라는 직업

<암살> <모던보이> 등에서 보는 친일파의 도(道)

<암살>

석사과정에 있던 선배에게 불행이 닥쳤다. 갑자기 지도 교수가 일년 반의 시간을 쏟은 논문(과 더불어 선배가 그 논문에서 도맡았던 온갖 허드렛일)을 버리고 나서 세상이 억울해진 나머지 책장을 덮고는 날마다 신경질로 소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예민 교수는 원래 신경질 대마왕이잖아.” “그게 오십배쯤 늘었다고 생각해봐.” 그렇다면… 애도를. 설마 못 먹을 걸 먹는다거나 맞고 산다거나 허공으로 사라진 연구비 벌어오라며 파견 노동 나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선배의 교수가 논문 발표를 포기한 건 쓰다 보니 이상한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경제에 밝은 (다시 말해 돈이 많은) 부친의 강요로 선택한 학부 전공 경제학이 싫어서 사학과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자네 같은 인재를 기다렸네! 우리가 경제사 연구자가 없어, 허허허”라며 기뻐하는 교수들 덕분에 도로 경제사를 전공한, 시작부터 억울했던 교수는 식민지 시대 조선 경제에 일제가 미친 영향을 연구하다가 의도치 않게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하게 된 거야, 하”. 선배는 깊은 탄식을 뱉었다. “거기다 유서 깊은 부호 가문 자식이잖냐. 그 시절에 부자면 조상이 어땠겠어?” 친일파였겠지. “조상이 독립운동가였다면 차라리 당당했을 텐데, 휴우.” 일년 반을 헛되이 노동한 선배의 탄식은 길고도 깊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생각한다, 교수가 논문을 10년만 늦게 썼더라면 새로운 사관을 정립할 학계의 지도자로 칭송받으며 타고난 짜증을 극복하고 맑고 고운 심성의 당당한 친일파 자손으로 거듭났을지도 모르는데. 그 교수, 파일까지 버렸나? 그녀의 임기가 아직도 3년이나 남아 있다고.

비록 친일파의 자손은 아니라지만 우리 또한 역사 앞에 그리 당당할 수는 없었다. 2006년 영화 <한반도>가 개봉한 이후 (영화를 보진 않고 소문만 들었던) 우리는 모두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날짜를 몰라서. 직함은 국사학자지만 직업은 국새를 찾아 헤매는 보물 사냥꾼인 그 영화의 최민재 박사(조재현)께서는 부르짖으셨다, 밸런타인데이는 알면서 어찌 명성황후 시해일을 모르느냐! “넌 알았냐?” 우리 할머니 제삿날도 모른다. “혹시 경술국치가 며칠인지는 알아?” “… 나 고대사 전공이잖아.”

그런 열혈 사냥꾼 최민재의 후배지만 일본하고 친하게 지내자고 주장하는 고급 공무원 이상현(차인표)은 친일파라기보다는 일본을 무서워하는 공일파에 가깝다. 스파르탄 근육이 무색하게도 그는 자기한테 해가 되는 건 무섭다고 고백하는 솔직한 남자다.

<모던보이>

사실 무심코 생각하면 친일파는 겁이 많은 사람들이었을 것도 같다. <암살>의 염석진(이정재)만 해도 나타날 때는 <모래시계>에서 보디가드하던 시절 ‘가오’가 부럽지 않았지만, 종로경찰서 한번 들어가더니 비 맞은 개가 되어 살려만 주시면 뭐든 다 할게요, 자세가 된다. (물론 돈은 줘야 하지요.) 하지만 과연 친일파는 겁쟁이들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검사 출신으로서 다년간의 범죄 수사 경험을 바탕으로 <필적은 말한다: 글씨로 본 항일과 친일>을 쓴(왠지 연결이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기분 탓이다) 구본진은 항일운동가와 친일파 필적의 특징을 이렇게 정리했다. “항일운동가, 절약 정신이 있음, 보수적이고 공손함. 친일파, 용기와 사회성이 있음, 낭비적 성향, 외향적임, 말이 많고 표현하는 것을 즐김.” 총알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총독을 소중하게 옆구리에 끼고 달리는 <암살>의 강인국(이경영)처럼, 그렇다, 친일파는 용감했다. 그리고 지금도 용감하지. 그래서 슬픔.

필체가 보여주는 특징에 기반해보면 가장 전형적인 친일파는 낭비가 심하고 외향적이고 말이 많고 표현하는 것을 즐기는 자, 바로 <모던보이>의 해명(박해일)이다(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뺀질이 친일파라고 부르면 듣는 친일파가 몹시 화를 낸다). 미쓰코시 백화점도 드나들어야 하고 여자 가슴에 지폐 몇장 넣어주어야 하고 머리도 곱게 말아야 하는 해명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친일파는 낭비벽 때문에 조국과 민족을 배신한 슬픈 짐승이 아니었을까. 아껴 쓰면 항일할 수 있었을지도.

그것도 아니라면 몸이 너무 힘들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독립운동가는 알바 뛰면서 작전 두개를 동시에 수행하는 초과 노동에 시달리는데 친일파는 어쩐지 한가해 보이는 멜빵바지 입고 어슬렁거리는 <원스 어폰 어 타임>을 보면 게으름을 타고난 나로서는 문득 부러워진다. 나는 실업자인데 야근은 왜 하고 있는 걸까, 사는 게 아이러니야.

내가 가보지 못한 직업의 세계는 한없이 광대하여 <친일파는 살아 있다>라는 책에는 이런 제목을 가진 장(章)이 있다, 신념을 넘어 직업이 돼버린 친일파. 아, 옛날엔 이런 직업도 있었구나, 옛날이 좋았네. <암살>의 염석진이 40대 중반에 재취업에 성공하는 걸 보면서(근데 독립군 할 때는 대장이었지만 지금은 그냥 수사관) 참으로 부러웠다. 청년 실업만 문제가 아니야, 중년 실업은 어쩔 거야.

<필적은 말한다…>에 나오는 친일파의 특징으로는 이런 것들도 있다. 즉흥적임, 의지가 약함, 변덕스러움, 조심스럽지 못하고 사려 깊지 못함. 그렇다면 나는 어느 모로 보나 나무랄 데 없는 친일파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셈인데, 나도 훌륭한 친일파로서 한 시대 풍미할 수 있었을… 리가.

나에겐 결정적인 한 가지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성, 다른 말로 적응력. 영혼은 친일파이나 신분은 독립운동가이며 조상은 친일파이나 자손 보기엔 항일운동가이셨으니, 일본 군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어도 국군의 모범으로서 역사에 길이 남는, 그런 복잡한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매우 뛰어난 사회성을 지녀야만 할 것이다. 그런 자질이 필요한 직업이라고 하면, 그러니까, 정치가라든가….

총독부 근무가 항일운동?

친일파라면 이 정도는 갖추어야 할 두세 가지 자질

<2009 로스트 메모리즈>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한 지조

초밥이라면 자다가도 달려들지만 김치를 주면 울어버리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친일파 사카모토(장동건)는 일생을 항일 조직 타도를 신념으로 불태운 경찰이었지만, 과연 친일파, 변덕스럽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 시간여행 운운하며 과거로 가라는데, 고분고분 네, 알겠습니다. 아무리 김구를 닮았다지만 저 사람을 언제 봤다고. 과거로 가서는 아무리 똑같이 생겼다지만 애인 죽은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냉큼 새 여자의 손을 잡는다. 이것이 진정 친일파의 길이다.

<아나키스트>

벽지 취급을 당해도 굴하지 않는 기개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 했던가, 그렇다면 <아나키스트>만큼 친일파를 홀대하는 영화도 다시 없을 것이다. 제목의 업보인지 이 영화는 도대체 뭐하자는 영화인가, 보는 이의 정신을 무정부 상태의 혼란으로 몰아넣었던 <아나키스트>에는 친일파가 나오긴 나오는데, 얼굴하고 이름만 나온다. 하는 일도 없고, 대사도 없고, 거들떠보는 항일운동가도 없어 슬픈 친일파. 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주어진 러닝타임에 충실하게 이따금 외마디 맥락 없는 대사를 외치다 스러져간 친일파 구보다상에게 애도를 보냅니다.

<모던보이>

세상만사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유연함

원작 소설에서 <모던보이>의 해명은 소극적인 항일운동가였다. 손만 댔다 하면 만사 엉망으로 만드는 데다 점괘에 의하면 향후 10년은 재수가 없으니 네가 총독부에서 일하면 그것이 조국 독립을 위하는 길이다, 라고 아버지가 시켰다는 것이 해명의 해명이었다. 무위도식으로 일제의 공금을 갈취하는 동시에 원활한 식민 통치를 방해하면서 총독부의 권력도 누리고 최신 정보를 빼내 땅 투기에 응용하여 자산을 불림으로써 일제의 식민 자본 증식을 막는, 이것이야말로 친일파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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