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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다큐멘터리를 항상 극장에서 보는 날이 오길
송경원 사진 최성열 2015-09-24

<춘희막이> 박혁지 감독

방송 다큐멘터리 PD들의 스크린 진출은 이제 낯선 풍경이 아니다. 유럽 등 서구권에선 방송과 영화 다큐멘터리의 경계가 허물어진 지 이미 오래고, 국내에서도 몇해 전부터 <워낭소리>(2008),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 등 드라마가 강한 다큐멘터리들이 호의적인 반응을 얻으며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시골, 노인, 감동 등 몇 가지 키워드로 압축되는 일련의 다큐멘터리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다큐멘터리를 대중친화적인 장르로 끌어올린 공은 분명해 보인다. 박혁지 감독의 <춘희막이>를 앞선 두 작품을 이을 기대작으로 꼽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전처와 후처의 40년 동거라는 이색적인 소재도 그렇거니와 두 할머니를 향한 따뜻한 시선은 소위 <인간극장>식 다큐멘터리를 닮았다. 하지만 <춘희막이>를 단순히 감성팔이 다큐로 폄하하는 일은 스스로 게으름을 자처하는 것에 불과하다. 두 할머니의 관계는 몇 마디 말로 정의할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박혁지 감독도 그걸 알기에 무려 2년이라는 정성을 들여 두 할머니의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다큐멘터리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는 박혁지 감독은 첫 스크린 데뷔작에서 만만치 않은 내공과 꼼꼼한 연출력을 선보인다. 이 다큐멘터리는 확실히 익숙한 듯 새롭고, 평범한 듯 아름답다.

-<춘희막이>는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의 화제작이었다. 엔딩이 다소 달라졌다고 하던데.

=3신 정도 추가했다. 흐름이 크게 달라진 건 아니고 조금 더 친절하게 마무리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2년 안에 모든 걸 담아낼 순 없었지만 두분의 사소한 변화라도 담고 싶었다. 정확히는 두 분이 이 작품을 통해 크게 변화하는 건 아니고 2주 정도의 짧은 방송 다큐멘터리에선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담아내려 했다. 동행이라는 키워드에 맞는 장면들, 예를 들면 집을 나설 때 춘희 할머니가 문을 잠그는 등의 사소한 변화들이 있어 마지막에 넣었다.

-2009년 방송 다큐멘터리로 먼저 선보였다. 영화화를 결심한 계기가 있나.

=지역 방송 휴먼다큐 프로그램으로 제작해 독립PD협회상까지 받았다. 그때 심사위원 중 한명이 <오래된 인력거>(2011)의 고 이성규 선배였는데, 여러 가지로 칭찬해주셨다. 촬영기법도 좋고 이야기도 좀더 들어보고 싶다고. 솔직히 그렇게 기분 좋은 칭찬은 처음이었다. 그때 선후배 독립 다큐 감독들에게 영화화 권유를 받은 후 가슴에 품고 있다가 2011년에 촬영을 시작했다.

-바로 시작하지 않고 시간을 둔 이유는 뭔가.

=물어 뭣하나. 제작비 때문이지. (웃음) 다행히 해외에서 반응이 좋아 제작비의 절반은 해외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사이 두분을 꾸준히 찾아뵈면서 관계를 쌓아나갔다. 방송 다큐에는 막이 할머니가 지적장애가 있는 춘희 할머니를 보살피는 관계로 소개됐는데 사실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무엇보다 춘희 할머니의 속마음을 더 알고 싶었다. 2011년 11월에 촬영을 시작해 꼬박 2년을 함께했지만 아직도 춘희 할머니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더 많은 것 같다.

-직접적인 의사표현이 서툴러서인지 춘희 할머니를 잡은 화면들이 좀더 공을 들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가능한 한 중립적으로 접근하려 했지만 내 마음속 주인공은 51 대 49 정도로 춘희 할머니에게 쏠려 있는 것 같다. (웃음) 막이 할머니는 전형적인 인물이지만 춘희 할머니는 예측 불가능하다. 주변 분들은 다들 7살 아이 정도의 지적 수준이라고 하지만 종종 다른 자아가 보일 때가 있다. 갑자기 허리를 펴고 일어나 또박또박 말을 걸 것 같은 기분이랄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들은 소품이나 구성 등 화면으로 표현하려 했다.

-전형적인 다큐멘터리와는 조금 다르다. 드라마도 강하고 장면 연출에도 상당히 힘을 기울였다.

=‘전형적’이라는 게 예를 들어 핸드헬드, 포커스 아웃 같은 화면을 말하는 거라면 확실히 비전형적이다. 다큐멘터리가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매체라는 것도 일종의 고정관념이다. 이야기에 직접 개입하거나 조작하진 않겠지만 화면을 극적으로 구성하고 일상 안에서 스토리를 찾아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여느 드라마에 비해 굴곡이 덜할지언정 상영시간 안에서 관객이 편하게 따라올 수 있는 기승전결을 구성하고 싶다. 다큐멘터리도 정확하고 정제된 프레임 안에 담을 수 있다. 선명한 이야기와 적절한 연출이 있다면 대중적으로도 재미있게 접촉면을 넓혀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미장센에 공들인 장면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유모차 세대가 일렬로 서 있는 오프닝에서 한대가 움직이다가 넘어지는 장면은 여러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원래 촬영에 애정이 많아 더 집착하는 것 같다. (웃음) 그렇다고 극적인 구성을 만들겠다는 게 직접 개입해서 연출을 하겠다는 건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찍되 여러 가지로 고민해서 좀더 좋은 화면을 잡아내겠다는 거다. 오프닝의 그 장면 역시 따로 연출하지 않았다. 경운기가 지나가는 장면을 찍으려고 했는데 우연히 걸린 거다. 오래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결국 원하는 장면들이 카메라에 담기기 마련이다. 유럽에서 상영했을 때 넘어지는 유모차를 보고 할아버지의 죽음을 상징한 거 아니냐는 등 해석이 분분했다. 그것은 그것대로 좋다. 내 안에 의미는 있지만 해석은 열어두고 싶다. 그럼으로써 이야기가 풍성해질 수 있다.

-음악도 과감하다. 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의 곡들을 사용했는데, 종종 낯설기도 하다.

=내가 워낙 그의 팬이라 편집할 때부터 김광민 연주곡에 맞춰서 구성했다. 그래도 진짜로 이렇게 흔쾌히 수락해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너무 감사하다. 여백이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일상을 관찰한 드라마가 다소 평면적이라 음악으로 고조시키고 싶었다. 서사적이라기보다는 서정적인 접근이다. 음악이 무겁고 어둡다는 평도 있어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은데, 적어도 나는 너무 좋다. (웃음)

-2년 동안의 동행이라지만 결국 일상의 반복이다. 서사적인 구성점을 찾기 어려웠을 텐데 의외로 선명한 스토리가 있는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막이 할머니가 춘희 할머니에게 돈 세는 법을 알려주려 할 때 그 순간이 영화의 터닝 포인트가 되리라 느꼈다. 죽음과 이별을 준비하는 막이 할머니의 모습과 돈 세는 법 배우는 걸 끝내 거절하는 춘희 할머니의 모습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다들 막이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남겨진 춘희 할머니가 어떻게 살까 이야기하지만 내가 보기엔 반대다. 춘희 할머니는 막이 할머니가 없어도 어떻게든 사실 것 같다. 그런데 춘희 할머니가 안 계시면 막이 할머니는 버티기 힘드실 것 같다. 어쩌면 막이 할머니가 춘희 할머니에게 훨씬 의지하고 계신지도 모른다.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의지하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는 게 두분의 세월을 특별하게 한다.

-방송 다큐멘터리 PD들의 스크린 진출은 이제 중요한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방송 제작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는데.

=그런 측면이 없다고는 말 못한다. 촬영 환경, 저작권 문제와 수익 등 방송의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방송 PD들의 영화 작업 자체가 고무적인 현상이라 본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방송 PD들은 영화에 대한 로망이 있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영상언어에 익숙한 데다 스토리텔링 훈련이 되어 있으니 조건은 충분한 셈이다. 물론 지금처럼 진출이 활발한 것은 선배들이 성공적인 사례를 만들어준 덕분이다. 암스테르담국제다큐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박봉남 감독의 <아이언 크로우즈>(2009)를 시작으로, 이성규 감독의 <오래된 인력거>, 이승준 감독의 <달팽이의 별>(2012) 등 좋은 작품들이 가능성을 보여줬다.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좋은 반응을 내어, 언젠가는 다큐멘터리가 극장에 상시 걸릴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이뤄지면 좋겠다. <춘희막이>가 그 징검다리 중 하나가 될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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