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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내 앞에 있는 사람
김혜리 2015-10-06

홍상수 감독 인터뷰

홍상수 감독

시드니 루멧 감독은 저서 <영화 만들기>(Making Movies)에서 “신은 감독에게 매일 아침 소피아 로렌을 보는 기쁨 대신 믹싱이라는 지루한 벌을 주었다”고 한탄한 적이 있다. 홍상수 감독이라면 “하늘은 감독에게 영화라는 환상적 작업을 허락한 대신 인터뷰라는 수난을 주었다”고 고쳐 쓰지 않을까? 물론 과장 섞은 우스개였지만, 홍상수 감독으로부터 영화에 대한 질문의 답을 말이나 글의 형식으로 받을 때마다 나는 “조금 전까지는 완전했었는데”라고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함춘수처럼) 유감스러워하는 그의 표정을 그려보곤 한다. 그러나 불완전한 것에는 불완전한 대로의 쓸모가 있으리라. 현재 홍상수 감독은 올여름 서울에서 촬영한 제목 미정의 신작을 편집 중이다.

-예고편이 특별히 재미있습니다. 보통 영화를 거꾸로 돌리는 것은 모종의 ‘역전’ 효과를 주는 것이 목적인데 예고편의 함춘수(정재영)와 윤희정(김민희)은 원래 영상의 처음부터 끝까지 맑고 개운한 감정을 갖고 있어서, 거꾸로 돌려도 여전히 감정이 순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오히려 신비로웠습니다. 원래 대사는 전혀 다른 내용이지만 궁극적으로 본편의 대사와 예고편 자막이 말하는 바가 같다는 깨달음도 즐거웠습니다. 이 예고편에 어떻게 착안하셨나요?

=제목을 짓고 나니 헷갈려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때, 맞다, 틀리다, 란 말들이 이렇게 저렇게 섞여서 튀어나오는 거 같았습니다. 영상을 거꾸로 틀어봤는데 인물들이 진짜 말을 하는 것 같았고, 그 말들에서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감정에 대강 맞추는 식으로 제목을 이런저런 조합으로 돌리면서 자막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시제와 시비(是非)를 나타내는 네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2부의 제목을 지을 때 이 네 단어를 다른 순서로 조합해보신 적도 있나요?

=아뇨, 처음부터 그렇게 나왔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의 제목은 ‘그때는맞고지금은틀리다’이고 두 번째 이야기의 제목은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입니다. 후자가 영화 전체의 제목인 이유는, 두 여정 중 뒤의 이야기가 더 행복한 결과에 도달한 사실과 관계가 있나요? 혹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느끼는 세상의 표면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도 영향이 있을까요?

=2부가 1부보다 더 “성숙해진 것” 같은 함춘수의 태도와 더 “뭔가를 겪어온 것” 같은 윤희정의 태도를 담고 있기 때문에 2부가 자연스럽게 영화 전체의 제목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두 이야기의 진행 방향 때문에 영화가 교훈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고, ‘지금’은 어떤 이상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에겐 영화가 우리에게 주어진 무한히 많은 “다른 세계들”의 가능성을 느끼게 하는 경험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지금’은 이 순간에 대한 충실함을 얘기하는 게 될 겁니다.

-보통 2~3회차 촬영을 마치고 영화 전체 구성을 떠올리고 확정하시는 걸로 압니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이를테면 아주 비슷하되 미세하게 다른 ‘메이크와 리메이크’식의 2부 구성으로 가보자는 결정은 어떤 장면을 찍은 후에 내려졌나요? 두번 반복되는 이야기라는 큰 결정과, 유사하되 미세하게 다른 여정이라는 선택은 동시에 이루어졌습니까?

=미세한 차이를 배우들의 몸을 통해서 보여주고 영화가 그 힘에 많이 의존한다, 란 구상은 촬영 직전에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진짜로 찍을지는 1부 끝날 때까지 고민을 했습니다. 결국은 원래 구상대로 2부를 찍었습니다.

-박홍열 촬영감독에 의하면 이번 영화를 찍는 도중, “쉬운 길과 어려운 길 어느 길로 갈지 고민이다”라는 말씀을 한 적 있다고 합니다. 기억나신다면 어떤 결정을 두고 한 고민이었는지 들려주실 수 있나요?

=1부 끝나고 강릉 같은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이야기 방향을 크게 틀어볼까, 처음의 구상- 아까 말씀드린 미세한 차이의 힘에 많이 의존하는- 을 버릴까, 고민한 것을 말하는 거 같습니다. 어려운 길이 수원에서 계속 찍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영화에는 인물의 동일성, 시간의 흐름에 관련된 구조적 트릭이 없습니다. 감독님 영화에서는 촬영 당일에 시나리오가 나오기까지 배우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번에는 기본적으로 같은 여정이되 아무것도 모르는 원점으로 배우들을 다시 데려가야 했으니 설명이 필요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1부 편집본을 함께 보며 이야기하셨는지요? “다르게 간다” 정도만 공유하셨는지 아니면 “어떻게 다르게” 간다에 관한 대화도 두 배우와 오갔는지 궁금합니다.

=1부 편집본을 보여주고, 아주 짧게 얘기를 했습니다. “더 외롭다, 아마 이래서, 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더 솔직하다, 아마 이래서, 라고 생각하고 하면 어떨까?” 그런 정도 얘기를 했습니다.

-김민희 배우에 대해 어떤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고 시작하셨습니까?

=처음 만난 시점의 인상을 말로 제대로 옮길 수 없을 거 같습니다. 처음 만남을 갖고 나오면서 옆의 PD에게 “하는 말이 하나도 거슬리지 않는다. 참 좋지 않니?”라고 말했던 기억은 납니다. 나중에 작업을 하게 되면서 그 사람이 가진 힘이나 재능, 천진함 같은 것들을 직접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2부 처음에는 말투와 자세 때문에 두 배우 중 윤희정이 1부의 그녀와 더 달라 보이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함춘수가 취하는 솔직함의 정도가 다른 전개의 키를 쥐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또, 함춘수가 하는 말과 행동의 옳고 그름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윤희정의 반응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테면 2부에서 카페 ‘시인과 농부’에서 함춘수를 만난 여자들이나 그를 동경하는 연출지망생 보라(고아성)에게 함춘수는 1부보다 덜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겠지만 “맞고 틀리다”를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함춘수가 사랑한다고 선언한 윤희정 한 사람 같았습니다. 삶에서 옳고 그름, 맞고 틀림과 사랑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모두에게 맞고 선이 되는 독자적 어떤 것이란 것은 환상입니다. 어떤 지혜도 그것을 구현할 수 없습니다. 그 상황이나 그 앞의 사람과의 “서로 맞음”만이 모든 가치를 뛰어넘는 빛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작들에서 남자가 기혼자라는 사실은 여자와의 만남에서 언급되지 않거나 당사자들 사이에서 묵인됐습니다. 어쨌든 스토리 전개의 전환점으로 작용한 기억은 없는데 이번 이야기에서는 중요한 분기점입니다(그래서 더 천진한 연애- 스쳐간 완전한 사랑- 의 느낌이기도 합니다). 이번 영화의 인물(배우)이나 이야기 성격과 이 문제가 관련된 부분이 있을까요?

=두 배우 때문에 그렇게 된 거 같습니다. 두 배우들에 대한 제 느낌이 그런 식의 이야기를 해도 괜찮다고 설득한 거 같습니다. 중간에 몇번 다르게 가볼까, 하고 다른 진행을 생각했다가도, 그 배우들을 떠오르면서 지금의 이야기 진행이 맞다고 생각을 고치는 식이었습니다.

-관객으로서 1부와 2부의 차이는 함춘수의 보이스 오버 유무에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2부의 함춘수가 더 직관적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2부에서는 보이스 오버가 있을 법한 자리를 음악이 대체하면서 일이 더 조화롭게 흘러가는 인상을 받은 대목들도 있었고요. 1, 2부에서 보이스 오버에 대한 판단을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2부가 조금 객관적인 듯해야 2부와 1부가 달라붙어서 서로간의 질문과 답으로 영화가 다 완성되는 형태가 안 될 거 같았습니다. 2부는 1부와 짝인 듯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무한히 많은 “다른 세계들”을 상상할 수 있는 지렛대의 받침점 같은 것이 되길 바랐습니다.

-영화 속에서 절의 종이 세 차례 울립니다. 같은 종의 소리입니까? 셋 중에 우연의 개입도 있었나요? 우연과 관련해 2부에서 함춘수가 주워서 윤희정에게 선물하는 반지의 경우는 어땠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네, 같은 절입니다. 한번은 우연히 찍을 때 울렸습니다. 두번은 제가 종 치는 횟수와 간격을 조절한 것이지만 의미보다는 그냥 느낌으로 한 것입니다. 반지는 1부 때 그냥 남자가 자기의 감정을 표현할 뭔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욕구를 그런 대사로 표현한 건데, 2부 때 “같은 신”을 찍기 하루 전 진짜 반지를 등장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행궁의 단청을 연상시키는) 윤희정의 그림은 화실을 촬영장소로 제공한 김은영 화가의 작품입니까? 1부에서는 관객에게 이 그림을 보여주고 2부에서는 윤희정의 그림 자체를 보여주지 않은 채 함춘수의 비평만 들려줍니다. 순전히 카메라앵글이 달랐기 때문인지 다른 생각도 연출에 담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예. 그 작가의 그림이고 화실을 정할 때에 그림도 이유가 되었을 겁니다. 2부에서도 진짜 그림을 보여주면 두 번째인 데다 함춘수의 평이 너무 다르니까, 그 구체적인 그림에 대한 관객 자신의 감수성을 테스트하게 될 거 같았고, 그게 쓸데없이 방해가 될 거 같았습니다. 그리고 2부의 함춘수의 말이 그냥 우스갯말처럼 묻혀버릴 거 같았습니다.

-예기치 않은 눈이 내려 마지막 신이 바뀌었다고 이제한 조감독님께 들었습니다. 이 우연이 영화에 더해준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함춘수의 영화가 상영되는 박물관에서 나온 윤희정이 원경으로 멀어져가는 동안 같은 영화를 보고 나온 다른 관객이 전경에서 지나가는데 이 편이 더 예쁘겠다고 판단하신 느낌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흩날리는 눈이 갑자기 내려서 주차장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신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건물 안에서 도시락을 먹고 나왔더니, 하얀 눈 세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삼십분 정도 지났는데. 함춘수가 극장 안으로 잠깐 들어가 윤희정과 인사만 하고 나오는 걸로는 (눈이 쌓인 두께의) 시간 경과가 맞지 않아서 찍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늘이 그렇게 찍으라고 하는 거 같아서 그렇게 찍었습니다. 다른 관객과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윤희정이 좋았습니다.

-다음 영화를 8월에 연남동에서 촬영 완료하신 것으로 압니다. 새 영화에 대한 현재 감독님의 기분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냥, 그때 할 수 있는 걸 했습니다. 나중에 보여주게 되면, 어떤 사람들에겐 좋은 영화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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