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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神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다, 우리처럼
박수민(영화감독) 2015-10-06

영화가 바라본 TV의 공포

<네트워크>

“텔레비전이 우리를 신으로 만든다고 생각해본 적 있어?” 영화 <파이트 클럽>(1999)의 원작자로 유명한 척 팔라닉의 처녀작 <인비저블 몬스터>(최필원 역, 책세상 펴냄)에서 한 캐릭터가 묻는다. 그에 따르면, ‘별별 인간들’이 다 나오는 TV 속엔 채널마다 ‘다른 인생’이 있고, 매 시간 바뀌는 인생들이 ‘생중계’되며, 우리는 그들 모르게 세상을 훤히 ‘들여다본다’. “신은 우리를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지켜보고 있다가 지루해지면 채널을 바꾸는 것뿐이야.” 그러니 TV 앞에 앉은 우리도 신과 다를 바 없다는 거다.

백남준의 설치미술 <TV 부처>(1974)가 언뜻 떠오르면서도, 지금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럴듯한 얘기 같다. 전지전능한 신은 그 전능함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세상이 지옥이 되어가는 꼴을 내버려두며 곤궁에 처한 인간들을 절대로 구하지 않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TV 뉴스 속 온갖 병폐와 부조리와 숱한 죽음을 들여다볼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거나 혀를 차고 나면 손에 쥔 전능한 리모컨(‘Remote Control’이라니, 정말 멋진 이름 아닌가!)으로 채널을 돌려 다른 인생을 보거나 혹은 전원을 꺼 무시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신 대신에 뭔가를 해야 하는 쪽은 인간이다. 그러나 TV가 제공하는 현실은 인간의 고유한 삶도 대체한다. 의식주부터 연애와 결혼, 출산과 육아, 이혼과 재혼까지도 TV만 보고 있으면 모두 대리체험할 수 있다. 이른바 ‘n포 세대’가 포기한 n을 현실에 잉여된 인간들 대신 ‘리얼 버라이어티’가 채운다. 현실 도피를 위해 보는 예능이 남의 현실이다. TV 속 셰프의 근사한 요리를 맛보고 감격하는 연예인들을 보며, 골방의 시청자가 편의점 도시락 혹은 라면을 입에 넣고 있는 모습은 <TV 부처>를 패러디한 퍼포먼스처럼 보일지 모른다.

언젠가 모처에서 열린 시나리오작가 세미나에서 방송국 PD와 의도치 않은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호기심에 참관을 왔다는 그는 겨우 영화 한편을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 시나리오만 붙잡고 있는 작가나 감독들의 노력이 너무 덧없는 모양이었다. 훨씬 거대한 시장에 더 많은 시청자가 있는 TV를 두고, 어째서 영화라는 허황되기 짝이 없는 일에 각자의 귀한 인생들을 거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영화는 결코 TV보다 대단한 매체가 아니라는 그에게, 그래도 영화가 더 의미 있다고 답하는 나는 요령부득의 답답한 영화 근본주의자로 보였을 거다.

실제로 영화의 ‘대중매체’적 기능은 생각보다 대단치 않다. 열린 매체인 TV에 비해 닫힌 텍스트인 영화는 단품의 그림이나 조각상, 소설, 교향곡에 가깝다. 영화는 관객에게 일방적이고, TV는 실시간으로 시청자와 상호작용한다. 영화가 픽션에 현실을 반영하고 방증하고 반성하려 한다면, TV는 현실 자체를 다루면서 현실에 직접 개입하거나 통제한다. 영화는 재해석한 현실을 보여주지만 TV는 계획한 현실과 계획 밖의 현실 사이에서 포착한 것들 중 보여줄 장면을 선택한다. 영화는 절대 세상을 바꿀 수 없는데 가끔 우연히 바꾸는 것처럼 보인다. TV는 능히 세상을 바꿀 수 있어도 돈이 되는 쪽으로 바꾼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지 모르겠으나, 이미 세상은 TV 속에 있다. TV에 영화는 프로그램 편성의 수고를 더는 ‘콘텐츠’일 뿐이다.

<트루먼 쇼>

TV 매체의 강력함은 선점하고 있던 ‘볼거리’의 자리를 위협당한 영화의 세계에서 가공할 공포의 대상으로 그려졌다. TV 프로그램이 스폰서의 자본과 대중의 선정주의에 휘둘려 섹스와 폭력, 죽음을 파는 쇼가 될 거라는 예측은 SF 액션의 명분으로 삼기에 좋았다. 제임스 칸이 분투하는 노먼 주이슨의 이색작 <롤러볼>(1975)로부터 국가간 전쟁 대신 기업 주최의 살상 스포츠가 개막하자, 이탈리안 익스플로이테이션의 마왕 루치오 풀치는 거대 방송국이 지배하는 미래 로마에서 콜로세움의 검투사들이 마차 대신 모터사이클을 타고 싸우는 <뉴 글래디에이터>(I Guerrieri Dell’anno 2072, 1984)를 만든다. 스티븐 킹 원작,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연 <런닝 맨>(1987)의 인간사냥 쇼 포맷이 이어져 일반인들끼리 생존 경쟁을 벌이는 <시리즈 7>(Series 7: The Contenders, 2001) 같은 영화에 이르면 이런 상상은 실제 TV에서 하고 있던 ‘서바이버’ 같은 리얼리티 게임 쇼보다 시시해진다.

좀더 영민한 작가들은 네트워크와 채널로 이루어진 TV 매체의 형식에 주목했다. 웨스 크레이븐의 <영혼의 목걸이>(1989)에서 악마를 숭배하는 연쇄살인마는 스스로가 TV 전파로 변해 송신탑의 거대 안테나로 뻗어나가면서 “이제 공중파로 진출한다!”고 외친다. 결말부 TV 속으로 들어가 리모컨을 무기로 채널과 채널을 오가며 악마와 싸우는 아이디어는 피터 하이엄스의 가족 코미디 <스테이튠>(1992)의 Hell TV와 666개의 채널로 확장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먼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1983)이 있었기에 가능한 상상들이었다. 마셜 매클루언의 <미디어의 이해>(1964) 시청각 교재로 손색없는 이 영화에서 TV는 현실이고 현실은 TV보다 덜 현실적이다. 실제의 폭력을 넘어 가상과 현실의 본질적인 차이마저 흐리게 만든 미디어는 인간 육체와 기계 기술을 말 그대로 ‘융합’해버린다.

로버트 레드퍼드의 <퀴즈쇼>(1994), 피터 위어의 <트루먼 쇼>(1998), 론 하워드의 <생방송 에드TV>(1999) 등 TV 속 조작된 현실을 다룬 영화의 계보 맨 앞자리에는 시드니 루멧의 걸작 <네트워크>(1976)가 있다. 오랫동안 UBS TV의 간판 뉴스앵커였던 하워드 빌(피터 핀치)은 시청률 저조를 이유로 해고를 통보받자 생방송 도중 다음 뉴스 시간에 권총 자살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오랜 동료인 보도부장 맥스 슈마커(윌리엄 홀든)의 비호 속에 마지막 방송에서 사과 대신 내뱉은 푸념이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자, 시청률 반등에 주목한 프로그램 기획자 다이아나(페이 더너웨이)는 하워드를 진실의 예언자로 내세운 새로운 컨셉의 뉴스 쇼를 사장 프랭크 해켓(로버트 듀발)에게 제안한다. 영화는 시청률과 이윤 창출을 위해서라면 가능한 모든 것을 돈벌이로 삼는 미디어 산업과 그 종사자들의 비인간성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기업과 자본주의의 본질에까지 도달한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낡지 않는 영화. TV를 소재로 한 영화 중 단 한편을 꼽는다면 단연코 이 작품이다.

위대한 작가 패디 차예프스키가 쓴 시나리오의 모든 대사가 훌륭하지만, 그중에서도 최고는 UBS를 합병한 거대 기업 CCA의 회장 아서 젠슨(네드 비티)이 하워드에게 일장연설하는 내용이다. 그 속엔 알 건 다 안다고 생각하는 지금의 우리도 감히 인정하기 두려운, 태초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도 영영 이어질 이 세계의 진짜 진실이 밝혀져 있다. 진실 앞에 큰 충격을 받은 하워드는 “나는 신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한다. 천상에 있다는 유일한 신은 TV 앞의 우리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지상에 존재하는 어떤 신은 TV 뒤에서 온갖 일을 하느라 바쁘다.

TV 속이 세상에 존재하는 현실이고 실제 나의 인생은 모호한 환상이 된 우리를 위해 <심슨 가족>의 호머가 오열하며 했던 말을 마지막으로 인용해야겠다. 그는 그가 아무것도 안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TV 때문이야. 고품격의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 다른 건 할 수가 없어. 새로 나오는 것마다 더욱 신선하고 기발해. 한번이라도 실수해서 우리에게 30분만 준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절대 실수하지 않아! 내가 살아볼 기회를 안 줘!” 어떤가? 남 얘기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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