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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의 경사기도권] 별일이 다 있다니까요!
허지웅(작가) 일러스트레이션 민소원(일러스트레이션) 2015-10-15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누군가의 사연을 ‘별일’로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과정

살다보면 별일이 다 있어요.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참 좋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가장 좋은 말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그 어떤 말보다도, 이 말은 가장 어른스럽게 세상을 포용하고자 하는 태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별일이’까지는 그것 참 내 기준에서는 도무지 용납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젓는 듯하지만, 이내 ‘다 있어요’라며 어찌됐든 앞의 말을 껴안아 어루만지며 화해하려 애쓰는 것 말이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그렇다고 내가 경험해보지 않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곧 비정상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살다보면

별일이 다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 참 좋은 말이 가장 아름답게 쓰인 영화 가운데 하나를 골라보았다.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2007)다. 라이언 고슬링이 주연을 맡지 않았다면 훨씬 현실적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 속의 라이언 고슬링은 대단히 망가져 있으니 대충 용납해보기로 하자.

라스는 형과 형수와 함께 작은 마을에서 산다. 라스는 남들과 어울리는 데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그는 타인이 접근하는 걸 두려워한다. 아니, 두려워하는 걸 넘어 누가 만지거나 안으면 말 그대로 ‘아파한’다. 형과 형수가 집에 살고 자신은 헛간을 개조해 살아간다.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라스를 부부는 안타까워한다.

그러던 어느 날 라스가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온다. 외국에서 와서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이 불편해 휠체어를 타야 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여자니까 자신과 함께 헛간에서 머무는 것보다는 빈방 하나를 내어주는 게 어떻겠냐고 형과 형수에게 묻는다. 그들은 뛸 듯이 기뻐한다. 그리고 그녀를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 라스가 데려온 여자친구는 리얼돌이었다.

맞다. 리얼돌 말이다.

짐짓 태연한 척하지만 형과 형수는 크게 당황한다. 당연한 노릇이다. 식사 자리에서 라스는 리얼돌 ‘비앙카’와 아무도 듣지 못하는 대화를 나누며 즐거워한다. 형은 괴롭다. 라스가 급기야 이제는 미쳐버린 거라며 자책한다. 부부는 비앙카가 외국에서 왔고 몸이 좋지 않으니 아무래도 의사의 진찰을 받아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며 라스를 회유한다. 그를 진찰받게 하기 위해서다. 라스와 비앙카를 만나본 의사는 최대한 그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일단 최선의 조치임을 설명한다. 형과 형수는 마을의 목사와 어르신들을 만나 도움을 요청한다. 비앙카를 실존 인물처럼 받아들여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요즘 젊은이들은 도무지 약해빠졌단 말이야.

그만해요. 샐리 삼촌은 고양이한테 옷을 입히죠. 헤이즐 조카는 UFO클럽에 돈을 쏟아부어요.

당신 죽은 부인은 도벽이 있었어요.

무슨 말이야, 그런 일 없어.

당신 부인 장례식 때 내 귀걸이를 하고 있더군요.

흠.

살다보면 별일이 다 있기 마련이에요.

그래도… 설마 교회에는 오지 못하게 하실 거죠 목사님?

글쎄요, 이럴 때일수록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게 있지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한국의 대형 교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들은 라스와 비앙카의 관계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비앙카는 이 마을의 일원이 된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해하던 사람들도 이내 비앙카를 자연스럽게 대하기 시작한다. 인사를 하고 파티에 초대하고 심지어 공동체를 위해 일을 부탁한다. 의상 모델이 되어달라고 하고 소아암 환자들을 위해 책을 읽어달라고 하는 식이다(물론 실제 책을 읽는 건 녹음된 목소리다). 그렇게 거짓말처럼 비앙카는 ‘마을 사람’이 된다. 그냥 이웃이 아닌, 없어서는 안 될 공동체의 일원 말이다.

라스는 불만에 가득 찬다. 비앙카가 마을의 대소사에 불려다니느라 자신이 그녀와 어울릴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화가 잔뜩 난 라스에게 형수가 외친다. 마을 사람들이 비앙카에게 신경을 쓰는 건 당신을 염려하고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어요?

그러는 와중에 라스는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갖는 자신을 발견하고 당황한다. 그녀는 늘 라스에게 관심을 갖고 잘 대해줬던 직장 동료다. 비앙카가 없는 틈을 타 라스는 그녀와 데이트를 한다. 그들은 볼링을 친다. 나오는 길에 라스는 죄책감을 느끼며 그녀에게 말한다. 저는 비앙카를 배신할 수 없어요. 알아요, 나 그런 나쁜 여자 아니에요.

라스는 그날 밤 비앙카와 함께 자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비명을 지르며 형과 형수를 찾는다. 비앙카가 아프고 죽어간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라스는 비앙카를 떠나보내기로 결정한 것이겠지만.

이 영화는 라스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는 타인을 두려워한다. 사실은 누군가를 잃는 게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언젠가는 무엇이든 잃게 마련이다. 라스는 부모를 일찍 잃었기 때문에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애초 누구와도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라스가 비앙카를 찾는다. 비앙카에게 누군가가 꽃을 주자 라스는 말한다. 이건 조화라서 시들지 않아 좋아.

그런 라스가 비앙카와 관계를 맺고,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고, 질투하고 징징대고, 안기고 치유받다가, 급기야 이별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 그게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다.

나는 그 무엇보다 이 영화 속에 그려지고 있는 공동체의 선함에 관심이 갔다. 나는 그것이 애초 선함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손해볼 일 없는 관심이고 가십이다. 그것에 참여하는 건 어느 정도의 오락거리다. 아마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일탈이 생겨서 더욱 적극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그들이 비앙카를 찾고 그녀를 필요로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비앙카의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볼 때 나는 비로소 엉엉 울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다.

타인의 정상성을 의심하고 억지로 분류할 때 공동체의 정상성은 훼손된다. 반대로 타인의 정상성을 의심하거나 분류하지 않고 그럴 수 있는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을 때 공동체의 정상성은 굳건해진다. 부끄러운 벌칙 같은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다. 내게도 일어난다. 그러나 내 고통을 내가 별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의 사연을 별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훨씬 더 힘들고 어렵다. 한국에서는 특히나 말이다. 극중의 누군가를 진심으로 응원하게 되는 영화는 드물다. 나는 라스를 응원하고 싶었다. 저 공동체는 염려되지 않았다. 저런 공동체는 알아서 잘 굴러갈 수밖에 없다. 라스는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가! 그가 정말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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