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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덕호의 시네마 애드리브] 우리는 공포에 떨 수 있을까

<굿나잇 앤 굿럭> 그리고 재즈

<굿나잇 앤 굿럭>

이번 달에는 어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되나 고민고민하던 중에 황송하게도 대한민국 방송계 고위직 한분이 아이템을 직접 정해주셨다.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조지 클루니 감독의 <굿나잇 앤 굿럭>(2005).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영화는 1953년부터 이듬해까지, 매카시즘이 미국에서 막바지 기승을 부리던 때부터 급격한 몰락을 겪던 시기를 다루고 있다. 그 과정에서 <CBS>의 시사 프로그램 <시 잇 나우>(See It Now)의 제작진은 광풍의 주인공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을 상대로 두려움 없이, 집요하게 싸움을 걸었고, 결국 그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시 잇 나우>의 간판이었던 전설의 진행자 에드워드 머로(데이비드 스트레이션)의 논리 정연한 논평은 이 영화를 통해 민주주의와 개인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새삼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21세기의 미국이 이 영화를 필요로 한 이유

매카시즘과 별 상관없는 21세기 미국에서 이 영화가 만들어진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공포의 마녀사냥 시대에도 자신의 본분을 다하려는 언론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현재 미국 언론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조지 클루니의 진단 때문이다. 언론은 더욱더 철저하게 자본의 힘에 갇혀 있고 사람들은- 머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요하지만 골치 아픈 문제로 안락한 삶을 방해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결국 시청률과 돈이다. 정치권력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던 <시 잇 나우>의 프로듀서 프레드 프렌들리(조지 클루니)와 머로가 화요일 밤 프라임타임에 오락 프로그램을 만들면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CBS> 최고 경영자 윌리엄 페일리(프랭크 랑겔라)의 주장에 밀려(<시 잇 나우>는 매일 프로에서 일요일 오후 프로로 밀렸다) 쓸쓸하게 사장실을 나오는 장면은 이미 그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세상을 지배하던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를 잘 말해준다.

이 논지는 이미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시각적으로 제시되었다. 매카시즘이 끝난 뒤 4년이 지난 1958년. 라디오-TV 뉴스감독협회가 에드워드 머로에게 공로상을 수여하는 시상식장이 이 영화의 첫 장면이다. 부드러운 재즈 색소폰 연주로 <내가 사랑에 빠졌을 때>(When I Fall in Love)가 마치 뮤직비디오처럼 화면 전체를 뒤덮을 때 카메라는 정장을 근사하게 차려입고 담소와 웃음을 나누는 방송가 사람들의 모습을 근접 촬영한다. 고급 와인을 담은 크리스털 글라스, 여성들의 귀와 목, 손목에 걸린 장신구들이 1950년대 전성기를 맞이한 미국의 모습처럼 우아하게 반짝인다. 하지만 정작 이날의 주인공 머로는 수상 소감에서 우아한 이들에게 쓴소리를 뱉는다. 우리는 정작 중요한 사회적 문제를 직시하기에는 너무 부유하고 안락하다고. 그래서 우리는 TV를 한낱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바보상자로 만들고 있다고. 그래서 우리의 후손은 TV 자료화면을 통해 냉소와 회의와 도피주의에 빠진 우리 세대를 발견할 것이라고.

맞는 말이다. 이미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뉴스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영화 내용처럼 공군 중위 라둘로비치가 별 증거도 없는 아버지의 좌파 경력 때문에 군에서 쫓겨나는 사건, 대량해고에 내몰린 노동자들이 고공 장비에 매달려 시위하는 현실을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둔다. 오로지 사람들은 이번 주말에 놀러갈 여행지, 파티에 입고 갈 옷,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올릴 셀카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공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 미국 수뇌부에 공산주의자들이 숨어 있다는 매카시의 발언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지만 그 위력에 취한 매카시가 이 문제로 3~4년을 끈 것은 이러한 공포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부유한’ 대중의 심리를 전혀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굿나잇 앤 굿럭>에 쓰인 재즈는 매우 적절했다. 매카시즘과 언론이라는 꽤 심각한 문제를 다룬 이 영화에서 재즈가 전적으로 쓰인 것은 분명히 의외다. 하지만 권력의 공포에 맞서려는 사람들의 긴장 사이에 흐르는 재즈는 한편으로 권력을 비웃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를 적절한 이완 속에서 제대로 표현했다. 명재즈가수인 고 로즈메리 클루니의 조카인 조지 클루니는 어린 시절부터 고모의 노래를 들었고 그래서 언젠가는 재즈가 듬뿍 담긴 영화를 한편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꿈이 시사 문제를 다룬 이러한 종류의 영화에서 이뤄지리란 생각은 정작 본인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CBS>와 같은 계열사였던 컬럼비아 레코드는 미국 메이저 레이블 음반사 중에서 유독 재즈에 열의를 갖고 있었는데, 영화에서 <시 잇 나우>가 생방송되던 같은 건물의 스튜디오 안에서는 늘 재즈가 녹음되고 있다(이 장면이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시 잇 나우> 방송이 끝나면 스튜디오의 재즈 사운드는 늘 화면 전체를 뒤덮는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공군 중위 라둘로비치가 군에서 해임된 것은 부당한 연좌제이며 심각한 인권 탄압이라는 머로의 일갈이 생방송을 통해 나가고 스튜디오에 불이 꺼지자 곧이어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 주연인 다이앤 리브스의 부드러운 음성은 <난 당신을 지켜보고 있어요>(I’ve Got My Eyes On You)를 노래한다.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는 이 사랑의 노래는 이 대목에서 언론은 늘 권력을 감시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멋지게 변신한다. 방송국 간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시 잇 나우>가 매카시의 주장은 근거 없는 협박이며 자유를 압살한다며 직격탄을 날리자 역시 리브스가 부르는 사랑 노래 <넌 날 미치게 해>(You Drive Me Crazy)는 이 방송을 본 매카시의 ‘돌아버리는’ 심정이 되어 관객을 미소짓게 만든다.

예술이 인간 위에 군림할 때…

1950년대 미국인들은 매카시즘을 비웃는 데 3~4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분단 이후 최소한 50년 동안 그 공포에 시달려온 지금의 한국인은 그런 주장에 기껏해야 헛웃음 혹은 쓴웃음을 짓거나 대부분 무관심할 뿐이다. 저들도 그 점을 알기에 부담 없이 툭툭 한마디씩 던지고 ‘잠시 주목’이라는 이득을 챙기는 정도에 그친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당시의 매카시는 상원의원이었지만 한국의 매카시는 방송을 좌지우지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냉소하지만 동시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 있게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교과서를 밀어붙이려 한다. 교과서는 공부하는 것이지 종교적 진리처럼 받드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만들었다고 해서 전 국민이 따라 부르던 노래가 얼마나 촌스러운지 우리는 잘 안다. <굿나잇 앤 굿럭>의 재즈처럼 음악은 노동 뒤의 여가이며 휴식이다. 그것이 사람들 위에 군림할 때 그 음악은 음흉하고 촌스러워진다. 교과서도 마찬가지다. 굿나잇 앤 굿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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