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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치유의 영화”
정지혜 사진 백종헌 2015-10-27

<혼자> 박홍민 감독

박홍민 감독

2015 <혼자> 2011 <물고기> 2010 단편 <괴롭히는 여자> 2009 단편 <88, 세대들> 2008 단편 <가위바위보> 2007 단편 <> 2007 단편 <내안의 나에게> 2006 단편 <연애하기 좋은 날> 2006 단편 <아프게 살아가기>

다닥다닥 붙어 있는 오래된 집들과 미로처럼 이어지는 골목길의 신당동 제5 재개발지역. 그곳을 마주하고 있는 작은 원룸이 박홍민 감독의 아지트다. 창문만 열면 손에 잡힐 듯 훤히 내다보이는 건너편 달동네와 자신이 발붙이고 사는 비좁은 작업실이 <혼자>의 아이디어가 출발한 곳이자 영화 전체의 배경이기도 하다. 5년간 이곳에 살며 박홍민 감독은 혼자 무슨 생각을 했기에 <혼자>라는 미스터리한 심리 스릴러물이 만들어진 걸까. 영화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대낮의 달동네. 다큐멘터리 감독인 수민(이주원)은 우연히 건너편 건물 옥상을 보다 자기 눈을 의심한다. 여자가 복면을 쓴 괴한들에게 둘러싸여 살해되는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수민은 들고 있던 카메라로 현장을 기록하지만 이를 알아챈 괴한들은 즉시 수민이 있는 원룸으로 들이닥쳐 망치로 사정없이 그의 머리를 내리친다. 이어서 수민은 꿈에서 깨지만 그는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할 수 없다. 그의 악몽은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러니 박홍민 감독을 만나기 위해 그의 작업실로 들어섰을 때, 어쩐지 괴한들과 사투를 벌인 수민의 현실 혹은 악몽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4년간 번번이 투자가 안 돼 영화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연히 마땅한 수입조차 없었고. 현실적인 어려움에 비록 내 손발은 묶여 있지만 소리라도 질러야겠다는 심정이었다. <혼자>는 답답했던 내 속내를 토해내듯 써내려간 자전적 이야기다.” 첫 번째 장편 <물고기>로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상을 수상하고 로테르담국제영화제 공식경쟁부문에 초청됐을 때만 해도 두 번째 장편 제작은 수월하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혼자>를 완성하기까지 무려 4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그는 조바심이 났고 절박했다. “원래는 불법 다단계판매에 관한 영화 <황사>(가제)를 준비 중이었다. 근데 투자 때마다 말을 이리저리 바꾸는 사람들을 몇 차례 만나면서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고 시간만 보냈다. 내 모든 걸 쏟아부었는데도 아무 성과가 없다보니 정말 괴롭고 힘들더라.” 그때 감독 곁에서 끝까지 영화를 만들어보라고 격려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선배인 이광국 감독이 그중 한명이다.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 때 처음 알게 됐다. 편찮으신 아버님 간호까지 하면서 어려운 제작 여건에 쉽게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유지하며 끝내 <꿈보다 해몽>(2014)을 완성한 광국 형을 보면서 자극을 많이 받았다. 형이 ‘너도 꼭 끝까지 영화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응원해주셨고 <꿈보다 해몽>에 출연한 이주원 배우를 수민 역에 소개해주기도 했다.” <물고기>를 좋게 본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도 한국을 찾을 때마다 박홍민 감독과 밥 한끼를 같이하며 “어떻게든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 영화를 만들 자본이 없던 그가 당장 할 수 있는 이야기란 결국 그가 지금 사는 공간을 배경으로 지금의 고민을 말하는 것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불안증을 안고 살아오면서 트라우마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래서 부모에 대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여자친구에게 변변한 것도 못해주면서 결국 그녀에게 상처만 주는 남자 수민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괴로운 상황에 처해서야 자신을 되돌아본다는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혼자>는 나를 위한 치유의 영화다. 한 발짝 떨어져서 나의 현재를 바라보고 싶었다.”

<혼자>

주인공의 내면에서 시작해 점점 더 자신을 객관화하고 싶어 감독은 <혼자>의 구성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영화가 수민의 시점숏에서 시작해 그의 꿈속에 등장하는 달동네의 전경으로 끝나는 것이나 수민의 꿈과 현실의 경계가 애매모호하게 이어지게끔 한 게 대표적이다. “관객이 수민의 의식의 흐름을 좇아가게끔 했다. <물고기> 때도 그랬고 현실과 환상을 구분해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꿈도 내 고민의 반영이고, 꿈을 꾸는 그 순간도 내가 존재하는 지금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어쩌면 그 모든 게 저마다의 리얼리티를 갖는 게 아닐까. 이건 꿈, 저건 현실 하는 식으로 명확하게 구분 짓기보다는 ‘과연 그럴까?’라고 의심해보는 쪽이 내겐 더 익숙하다.” 한겨울 꿈에서 깬 수민이 알몸으로 달동네 골목길을 이리저리 헤매며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촬영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를 위해 감독은 촬영 두달 전부터 배우, 스탭들과 함께 리허설을 수십번씩 진행하기도 했다. “이주원 배우가 영하 9도의 추위에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연기하는 투혼을 펼쳐줬다. 특히 그가 수민의 마음을, 수민에 투영돼 있는 내 절박한 마음을 이해해주며 나와 많은 대화를 스스럼없이 나눠준 데 대한 고마움이 크다.”

<혼자>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시민평론가상과 남자배우상(이주원)을 받게 된 건 그간 막막하기만 했던 박홍민 감독에게는 상당히 큰 의미가 되었다. “뭔가 희망이라는 걸 찾은 것 같다. 마침 오늘 아침 서울독립영화제로부터 경쟁부문 본선에 올랐다는 연락까지 받았다. 뭔가 풀리려나? (웃음) 긴장을 늦추지 말고 차분히 다시 글을 써야겠다. 빨리 다음 작품을 만들고 싶은 마음뿐이다.” 스스로를 다잡으며 그는 ‘농부의 마음’에 대해 덧붙인다. “오직 영화가 좋아서 지금까지 영화를 찍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제작사 ‘농부영화사’를 차린 것도 그래서다. 이번 해에 풍년이 났다고 다음 해에 씨 안 뿌릴 것도 아니고 흉년이 들었다 한들 슬프긴 해도 씨는 또 뿌리는 게 농부가 아닌가.” 지극정성의 농심으로 그가 뿌릴 <혼자> 그다음의 씨앗이 건강히 움트길 기다려본다.

요즘 꽂힌 것

<엘러건트 유니버스> <만들어진 신>

10년 전부터 하나둘 모아온 보드게임 레어 아이템들을 잠시 뒤로 하고 요즘 그가 손에 잡고 있는 건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등의 책들이다. “세계를 미시적 차원에서부터 거시적 차원으로 두루 살피는 데 흥미가 있다”는 그의 책장에는 물리학 서적부터 사회과학서까지 빼곡히 들어차 있다. 로베르트 비네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과 고흐의 그림은 언제 봐도 늘 그를 자극하는 고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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