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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철의 영화비평] 이유 없는 원혼이 존재하는가

소녀와 악령의 관계에 관해 <검은 사제들>이 놓치고 있는 지점을 짚다

<검은 사제들>

기억이 맞다면 엑소시즘이 등장한 첫 번째 한국영화는 <너 또한 별이 되어>다. 이장호의 1975년 작품으로 당시 전세계를 뒤흔든 <엑소시스트>(1973)의 영향 아래 있다. 멜로드라마를 결합해 차별화를 기하고 있으나 엑소시즘과 관련된 장면은 거의 카피 수준이다. ‘소녀에게 이상 증세가 생기자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설정, 소녀에게 깃든 악령이 행하는 해괴한 짓들, 외국에서 온 전문구마사가 치르는 최종 의식’ 등은 <엑소시스트>의 장면들을 그대로 본떠 만들어졌다. 다만 <엑소시스트>의 악령이 보편적인 성질의 것임과 비교해, <너 또한 별이 되어>의 귀신은 개인적인 원한을 지닌 원귀에 가깝다. 영화의 대사대로 ‘이승에서 한이 많았던 어느 처녀의 지박령이 소녀에게 빙의된 것’이다. 그녀의 한은 남성의 폭력에서 비롯된다. 사랑했던 남자는 돈과 인기를 좇아 그녀를 버렸고, 방송국의 권력자는 버려진 그녀의 몸을 다시 빼앗고, 종래엔 네명의 동네 건달들이 그녀를 집단으로 성폭행한다. 중산층 바깥으로 신분이 하락한 여자가 남성들의 폭력 때문에 살 희망을 잃고 자살을 하고 원귀가 된다는 설정은 그 자체가 공포다. 게다가 그녀의 영혼이 옮겨붙은 소녀는 순간적으로 남성의 육체로 화해 보모를 폭행한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남성의 폭력은 당연한 것인 양 전시된다. <너 또한 별이 되어>의 진짜 공포는 귀신이 아닌 폭력의 연쇄에 있다.

장재현의 <검은 사제들>, 정확하게 말하면 단편영화 <12번째 보조사제>(2014)는 드물게 엑소시즘을 끌어들인 한국영화다. ‘현전, 위장, 발화, 충돌’의 과정을 꼼꼼하게 묘사하는 데다 기술적 표현에도 모자람이 없다. 한국적인 요소를 곳곳에 삽입해놓는데도 <12번째 보조사제>는 <엑소시스트>에 근접해 있다. 한국형 원귀가 나오는 <너 또한 별이 되어>와 달리 <12번째 보조사제>에서 소녀에게 깃든 악령은 보편적인 악으로 묘사된다. 한국산이 아닌 것이다(과연 그런가가 이 글의 주제다). 40년 전에 만들어진 <엑소시스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점이 오히려 <12번째 보조사제>를 특별하게 만든다. 이야기와 스타일 면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요즘의 엑소시즘영화 추세와는 사뭇 다르다. 이러한 태도는 <12번째 보조사제>를 장편으로 확장한 <검은 사제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상한 건 <검은 사제들>이 단편의 줄거리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아서가 아니다. 악령에 사로잡힌 소녀가 간절한 표정을 짓는데도 영화는 따로 질문을 하지 않는다. 왜 악령이 그 소녀에게 들어간 것일까? 왜 악령은 소녀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일까?

주제의식의 의도적 실종

불과 3개월 전에 엑소시즘을 소재로 삼은 한국영화가 개봉한 적이 있다. 신진오의 <무녀굴>을 영화화한 <퇴마: 무녀굴>은 만듦새가 다소 떨어질지언정 그냥 잊히기엔 아쉬운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퇴마 의식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원혼의 성격이다. 제주도 김녕사굴에 붙어 있는 지박령이 원혼의 근간이 된 가운데, 가까이로 4•3항쟁과 얽힌 원혼이 저주를 내린다. 딸에게서 딸로 내려오는 원혼을 이야기하자면 다시 남성의 폭력을 불러내야 한다. 4•3항쟁 당시 뱀굴 근처에서 숨어 지내던 여성이 학살을 일삼던 토벌대의 일원에게 집단으로 폭행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녀의 원혼은 여성의 몸을 통해 이어진다. 광기가 초래한 원혼이 “그놈과 그놈의 자식들에게 복수하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에서는 한 여인의 슬픔을 넘어 역사적 고통이 느껴진다. 대를 이어 어린 소녀 앞에 도달한 복수의 다짐은 남도의 비극이 여전히 진행 중임을 암시한다. 나는 이러한 주제가 <검은 사제들>에 왜 없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허전하다고 생각했다.

<퇴마: 무녀굴>에 “신병은 운명이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검은 사제들>에서 구마의식을 치르는 사제들에게는 침대에 누워 있는 그것- 사령이 깃든 육체- 이 운명이다. 그들은 그것을 선택한 게 아니므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냅다 달리는 것밖에 없다. 그래서 <검은 사제들>은 한편의 슈퍼히어로영화처럼 보인다. 외면하고 지나치면 그만인 것을 향해 그들은 운명을 대하듯 달려간다. 임무를 완성한 끝에 최 부제가 짓는 야릇한 미소는 이 영화의 성격을 대변하고도 남는다. 흡사 그는 다음 목표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것 같다. 순서대로라면 강동원이 맡은 최 부제는 ‘13번째 보조사제’다. ‘13번째’라는 이름에 새겨진 어떤 뒤틀린 사명감과 허무함, 그것을 지닌 잘생긴 신부의 액션 판타지. 과연 그것뿐일까?

몇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 <12번째 보조사제>에서 보조사제의 정신적 상처는 군대와 관련된 것이었다. 신병 시절 그는 선임병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검은 사제들>은 그것을 여동생의 죽음으로 바꿔놓았다). 그는 군인(과 군인 차림의 헛것)을 볼 때면 경직된 표정을 짓는다. 둘, <검은 사제들>에서 최 부제가 찾은 ‘정의구현사제단’의 건물 한쪽 공간에서는 시위용 피켓 제작이 한창이다. 그런데 영화는 절대로 그 문구를 가까이에서 보여주지 않는다. 지척에서 쓰고 말하는데도 그들이 쓰고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 정도만 가능할 뿐이다. 이렇듯 <검은 사제들>은 민감한 것들을 의도적으로 제거해놓았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에서 그 이유를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관심이 가는 것은 사라진 의미들이 내가 상상하는 것들과 대충 일치하느냐다. 어떤 중요한 것은 영화 바깥에서 구할 수 있되 절대 망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감추고 싶은 우리의 추함을 되비추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소녀와 악령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구마사는 미친 인간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인간 안에 들어 있는 게 나쁜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검은 사제들>에서 그 ‘나쁜 것’이란 무엇인가. 소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녀는 자동차가 좁은 골목길로 그렇게 빨리 달려올 줄 몰랐을 것이다. 단지 조금 부주의했다는 이유로 소녀는 차에 치이고 만다. 그녀를 친 사람은 두명의 외국인이었다. 그들은 소녀를 차에 실고 병원으로 달려갔어야 옳다. 그런데 그들은 사명을 수행한다는 이유로 소녀를 구하지 않는다. 대신 소녀를 길가에 슬쩍 방치한 채 가버린다. 그런데 이건 어디서 들은 이야기 아닌가? 바로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다. <검은 사제들>에서 소녀가 악령과 마주하는 과정은, 2002년에 미군 장갑차가 여중생을 압사했던 사건과 똑 닮았다.

장재현 감독이 그것을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소녀들의 죽음과 관련된 세편의 호러영화가 올해 개봉했다는 사실이다.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퇴마: 무녀굴> <검은 사제들>에서 폭력적으로 희생당하는 소녀들은 직간접적으로 공히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통증을 불러낸다. 이건 일종의 징후일까. <엑소시스트>에서 젊은 카라스 신부가 “왜 이 소녀인가요, 말이 안 되잖아요?”라고 묻자 머린 신부는 “우리를 절망하게 하려는 거야. 우리 자신이 짐승처럼 추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거지”라고 답한다. <검은 사제들>은 소녀의 구원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그건 영화의 영역이 아니다. 대신 소녀가 그렇게 움켜쥔 채 놓지 않은 것, 그래서 끝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당신들의 추악한 얼굴’이 아니었을까. 신부복을 입은 강동원의 긴 기럭지를 보다 나는 못된 상상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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