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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가재와 금붕어
김혜리 2015-11-26

<시티즌포>

<시티즌포>는 에드워드 스노든의 미 국가안보국 민간사찰 내부 고발 사건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사건의 일부다. 폭로 현장의 녹취록이다. 스노든은 고발자의 인격에 대한 왈가왈부가 폭로 내용의 본질을 흐릴 웹 문화의 속성을 경계해, 정보공개 시점과 범위를 신뢰하는 언론인에게 전적으로 일임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영화 <시티즌포>는 스노든이라는 청년의 퍼스낼리티에 관객을 밀착시킨다. 일단 이 영화의 세팅 자체가 특정 감독과 기자를 지목해 접촉한 그의 작품이다. 스노든은 대학 동기 중 한명쯤 있을 법한 똑똑하고 수수한 청년이다. 강조하려고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으며 본인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는지 과연 아는 걸까 의심할 만큼 덤덤하다. 감시 카메라로부터 키보드를 가리려는 ‘마법 망토’ 안에서도 스노든은 우리의 시선을 붙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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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랍스터>는 짝짓기에 실패하거나 싱글로 복귀한 시민을 동물로 변신시켜 추방하는 사회의 이야기다. 인간을 동물로 바꾸는 바이오공학 기술이 존재한다는 설정을 제외하면 <더 랍스터>의 풍경은 현대와 특별히 다르지 않다. 영화의 주요 공간은 싱글들이 인간 자격을 잃기까지 45일간 ‘패자 부활전’을 치르는 호텔이다. 소설 <마의 산>에 등장하는 결핵환자 요양 호텔의 잔혹 버전이랄까. 체크인한 남녀는 45일 동안 투숙객 가운데 반려자를 찾든가, 근처 숲에서 전투적 단체 독신 생활을 하는 ‘반체제 분자’들을 마취 총으로 사냥해 머릿수만큼 체류 기간을 연장해야 한다. 로맨스와 섹스를 철저히 금하는 독신주의 게릴라들은 원래 짝짓기를 절대시하는 사회로부터 탈주한 사람들이다. 없는 감정을 억지로 지어내야 사는 제도에 항거하는 세력이, 있는 감정을 은폐해야 살아남는 집단으로 엇나갔다는 설정은, 근본주의가 큰 목소리를 내는 현실의 풍자일 것이다. 적의 멤버를 죽이는 행위가 곧 우리의 성장이며, 상대 진영에 속한 요소는 하나라도 공유하면 이적 행위로 간주된다. 커플의 ‘커’자만 꺼내도 ‘종커’ (從 couplism)의 딱지가 붙는 식이다. 그러나 실상 두 체제는 동일한 프레임 안에서 상대의 시스템에 구성원을 공급하고 이데올로기의 근거를 제공하면서 서로를 재생산하는 중이다. 두 근본주의 체제는 불분명한 감정과 사랑의 불확실성을 묵살해야 작동할 수 있다. 사랑하기에 헤어진다거나 개인으로서 독립성을 유지하는 커플이라는 개념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더 랍스터>에는 뉘앙스와 중간이 없다. 인물들은 다른 해석의 여지를 최소화한 간명한 문어체로 대화하고, 정작 깊은 감정은 코드화된 수화로 오간다. 일상 대화의 표리부동함에 적응하지 못해 암호에 매혹됐던 <이미테이션 게임>의 수학자 앨런 튜링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데이빗(콜린 파렐)이 호텔에 입실하는 날 관리자는 성적 취향을 질문하며 양성애는 고를 수 없다고 못박고, 구두 배급 담당자는 ‘1/2의 중간 사이즈는 없다’고 통보한다. 영화는 끝까지 이 프레임을 고수한다. 양쪽의 모순을 경험한 우리의 연인 데이빗과 근시 여인(레이첼 바이스) 역시 영화 속에서 제3의 세계를 찾을 가망은 희박해 보인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는 풍자라는 예술 범주의 정답으로 사전에 인용될 법하다. 란티모스 감독은 ‘초현실주의적’이라는 평자들의 표현에 주저를 표하며, “현실 속 인간들이 삶을 관리하는 패턴을 관찰해 극단화할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더 랍스터>의 풍자는 여느 때보다 쉽고 선명하다. 센티멘털리즘과 선정성이 범람하는 가운데 사랑은 드물어지는 현상, 연애와 결혼은 정상성의 증거이고 고독은 무능의 표식으로 간주되는 경향, 욕망하는 대상에게 적합한 파트너임을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를 왜곡하는 조바심, 외적 조건으로 짝짓기 등급과 맞춤 상대를 지정하는 매치메이킹 산업의 캐리커처가 모두 들어 있다. 감독이 보기에 그것을 두루뭉술하게 덮고 있는 말, 문화, 관습을 걷어내 파워게임의 뼈대를 드러내 관객으로 하여금 그 우스꽝스러움을 직시하고 웃게 만든다. 국내 개봉한 란티모스의 전작 <송곳니>는 외부로부터 차단된 가족의 기괴한 풍경으로 독재자가 미디어를 독점한 세계를 빗댔다. 가족의 큰딸은 바깥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어이없는 결단을 내린다. 다음 영화 <알프스>는 유족의 의뢰로 망자의 대역을 연기하는 극단(劇團) 배우들을 통해, 사회가 부여한 배역이 없으면 자기가 누구인지 실감하지 못하는 세태를 그렸다. <송곳니>가 가짜 세계에서 바깥에 존재하는 진짜 세계로 나아가려는 이야기라면, <알프스>는 진짜 세계에서 가짜 세계로 구태여 들어가려는 이야기라고 감독은 대비한 바 있다. <더 랍스터>는 두개의 거짓말이 대립하며 진실을 대체하는, 말하자면 가짜가 곧 리얼리티인 세계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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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티모스 월드의 공동 창조자는 각본가 에프티미스 필리포우다. <송곳니> <알프스> <더 랍스터>를 모두 같이 썼다. 몇해 전 역시 필리포우가 시나리오를 쓴 그리스 감독 바비스 마키리디스의 <L>을 볼 기회가 있었다. 자동차에 매혹돼 차 안에서 의식주를 몽땅 해결하는 남자의 이야기였다. 이 괴짜는 어느 날 바이크족들로부터 “(자동차 운전자들은) 차창 뒤에 숨어 음악 듣고 전화나 받으며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무책임한 살인자”라는 비난을 듣고 동요한다. 설상가상으로 개를 차로 치는 사고로 긍지를 완전히 상실한 그는, 오토바이로 ‘전향’하는 존재론적 결단을 내린다. 극중 인물들은 죽도록 심각한데 관객은 웃는다는 점에서 란티모스 영화와 상통한다. <알프스>에는 단원 중 한 여자가 친아버지에게 어머니 역할을 대신하려다가 맞는 대목이 있다. 관객은 웃고 인물은 서럽다. 이에 비하면 <더 랍스터>가 자아내는 웃음은 순한 편이다. 여기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자리는 극중 인물 곁이 아니라 관객쪽이다. 그의 풍자는 날카롭지만, 란티모스 감독이 자신의 인물을 인형 다루듯 움직이고 제거하는 매너는 어딘가 <송곳니>의 아버지, <알프스>의 극단장, <더 랍스터>의 권력자들의 태도와 닮아 있다. <더 랍스터>에는, 호텔에서 짝을 못 찾고 유예기간을 소진한 여성이 인간으로 사는 마지막 날에 영화 <스탠 바이 미>를 보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하! 나는 즉각 <스탠 바이 미>의 모닥불 장면에서 고디(윌 휘튼)가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파이 먹기 대회’ 이야기의 시퀀스를 떠올렸다. 이름 대신 ‘비곗덩어리’로 불리며 멸시당하는 뚱뚱한 소년이 마을 사람들이 운집한 파이 많이 먹기 경연대회에서 피마자기름을 먹고 일부러 구토해 역겨움을 전염시키고, 결국은 모든 사람이 서로의 토사물을 뒤집어쓰는 장관을 연출해 공동체 전체에 복수한다는 기괴하고도 통쾌한 일화다. 나는 란티모스 감독의 코미디에서 비곗덩어리 소년의 복수심과 비슷한 충동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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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풍자가 아니다. 반투명하게 드러난 현실이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택시>가 보여주는 이란은 실정법과 예술, 실정법과 도덕이 양립하기 어려운 사회다. 정권에 밉보인 영화감독은 자동차 실내에 카메라를 달고 도둑질하듯 영화를 찍어야 한다. 생활고로 인한 절도가 횡행하는데 현실을 외면한 법의 처벌은 지나치게 가혹일변도라 선량한 피해자 일부는 신고를 포기한다.

<택시>에는 영화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관련해 특별히 빛나는 에피소드들이 있다. 파나히 감독의 조수석에 올라탄 조카딸(하나 사에이디)에게 영화는 숙제다. 선생님은 배급 가능한 영화를 만들라며 지침을 줬다. 남녀의 접촉, 폭력은 없어야 하고, 선한 캐릭터는 이슬람 이름을 가져야 하며, 정치•경제적 주제와 ‘추악한 리얼리즘’은 피해야 한다. 마지막 조건의 핑계는 “그런 문제는 스스로 판단해야지 영화가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스스로 판단한 것을 영화로 찍으면 안 된다. 즉 영화는 언론과 표현의 영역이 아니라 프로파간다에 속한다. 그런데 삼촌이 볼일을 보러 간 사이 차에 남은 하나는, 신혼부부가 흘린 돈을 주운 넝마주이 소년을 우연히 카메라로 찍는다. 가엾은 삼촌과 달리 배급할 수 있는 영화를 찍겠다는 결의에 불타는 어린 감독은, 소년을 불러 주인에게 돈을 돌려주라고 간절히 부탁한다. 그래야 영화가 된다고. 하지만 그러마 했던 가난한 소년은 쭈뼛거리며 돈을 길바닥에 내려놓았다가 신혼부부가 못 알아채고 떠나자 슬그머니 지폐를 챙긴다. 카메라를 든 소녀는 거의 울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차마 돈을 포기하지 못한 소년의 망설임이 교훈적 일화보다 수백배 아름다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을 안다. 영화는 현실을 뜻대로 할 수 없고 그 긴장을 견뎌야 예술이 된다. 한편, 파나히 감독의 승객 가운데에는 테헤란 시내 ‘생명의 샘’에서 데려온 금붕어를 정해진 날짜에 방생하고 새 물고기를 데려와야만 한다고 믿는 노자매가 있다. 이것은 마치 새 영화를 끊임없이 찍어야 생을 이어갈 수 있는 필름메이커의 운명에 관한 은유처럼 보인다. 마침내 <택시>는 빈 차를 급습한 강도들이 여태 이 영화를 찍은 카메라를 뜯어가는 느닷없는 ‘절도’로 끝난다. 그러나 그들은 메모리 카드를 빠뜨린다. 도구는 도둑맞았지만 영화는 남았다. 누구도, 어떤 폭력도 영화를 훔칠 수 없다.

<사일런트 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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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살필 차례

<사일런트 하트>는 2박3일의 가족 모임 이야기다. 느리고 굴욕적인 죽음을 앞둔 어머니(기타 노비)는 가족의 동의를 구해 안락사를 계획한다. 그러나 모범적인 언니와 대조적으로 우울증과 방황을 겪느라 엄마와 긴 시간을 나누지 못한 둘째 산느(다니카 쿠르시크)는 마음을 잡지 못한다. 산느는 걱정을 끼친 자식이지만 그만큼 부모에게 자기 존재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던 어여쁜 자식이기도 하다. 난 아직 미숙한 아이라고, 버리지 말라고, 쇠약해진 엄마를 때리며 발버둥치는 산느에게 엄마는 “네 언니도 훌륭했지만 네 반만도 못해. 너는 쓰러졌다 일어선 적이 있잖니?”라고 깨우쳐준다. 몰랐던 자신의 힘을 깨달은 산느는 하룻밤 사이에 강해진다. 그리고 누구보다 의연하게 엄마가 원하는 배웅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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