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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 cross]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김현수 사진 백종헌 2015-11-30

<오르부아르>로 공쿠르상 수상한 프랑스 작가 피에르 르메트르

피에르 르메트르의 소설은 하나같이 벽돌 같다. 문체가 딱딱하다는 뜻이 아니라 물리적인 책의 두께가 두껍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방대한 분량의 활자로 이뤄진 소설은 어느 한 페이지의 빈틈도 없이 치밀한 사건과 추리로 구성되어 있다. ‘뤼팽’과 ‘매그레 경감’의 후예라고 평가받는 형사 베르호벤 시리즈로 이미 유수의 유럽 문학상을 휩쓸며 명성을 얻은 그는 2013년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신작 <오르부아르>로 공쿠르상을 수상하며 장르소설 작가의 경계마저 허물고 있다. 공교롭게도 <오르부아르>의 국내 출간과 함께 홍보차 방한한 그와 만난 날은 비극적인 파리 테러 비보가 전해지기 이틀 전인 11월11일, 그러니까 1차 세계대전 종전기념일이었다. 한국을 처음 방문한 그는 팬이 선물한 것으로 보이는 초코막대과자를 옆에 두고 자신의 소설 쓰기 방식에 대해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솔직한 생각을 들려주었다.

-한국을 처음 방문한 소감이 궁금하다.

=과거와 현대가 뒤섞여 있는 도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프랑스에 번역, 출간된 한국문학이 많지 않아 거의 접하지 못했지만 한국영화는 종종 봤다. 일본영화도 마찬가지인데 언어가 다르니 보긴 해도 금방 잊어버린다.

-형사 베르호벤 시리즈인 <이렌> <알렉스> <카미유> 3부작과 외전 격인 <로지와 존>, 그 사이에 발표한 <웨딩드레스> <실업자>까지 6권 대부분 스릴러와 추리에 기반한 장르소설이었다. 그런데 2013년에 발표해 공쿠르상을 수상한 <오르부아르>는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어느 상이군인의 사기 행각을 다룬 블랙코미디의 성격이 짙다.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오르부아르>도 처음엔 추리소설로 구상했다. 반드시 이전과 다른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닌데 무의식 중에 새로운 것을 원했나 보다.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추리소설은 업계 내에서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한번쯤은 작품으로 명성을 얻고 싶어 할 여느 소설가들처럼, 나 역시 작품으로 명성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오르부아르>는 사회에서 버려진 주인공 알베르에 관한 이야기다.

=최근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유럽의 실업자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다. 전쟁 이후 많은 사람들이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수십년 동안 일자리를 지키고 아파트를 사고 아이를 낳으며 살았다. 그런데 한순간에 실업자가 되어 내쫓긴다. 이 소설에서도 전쟁을 겪은 상이군인이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려진다. <실업자>에서도 실업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긴 했지만 일부러 <실업자>와 연관성을 고려해서 소재를 선택하지는 않았다.

-프랑스 독자들은 <오르부아르>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던가.

=알베르가 전사자 추모기념비 사업을 이용해 대국민 사기극을 벌인다는 점을 재미있게 봐주더라. 얼마 전에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11월11일에 열리는 종전기념식에 와달라기에 정중하게 거절했다. 소설 출간하고 종전 관련 행사에 계속 불려다녀 지겨울 정도다. (웃음)

-당신이 작가로서 전세계에 이름을 알린 계기는 형사 베르호벤 시리즈 2부인 <알렉스>가 영미권에 번역되어 추리소설 문학상인 ‘CWA 대거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하면서다. 영화화 작업도 진행 중이라고 들었다.

=예전에 <알렉스>를 읽은 한국 감독이 영화화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온 적이 있었다. 아쉽게도 할리우드에서 먼저 영화화가 진행 중이라 성사되지 못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과 주로 작업했던 제작자 겸 감독인 제임스 해리스가 <알렉스>의 영화화 판권을 구매했다가 제작비를 모으지 못해 다른 스튜디오에 재판매된 상태다. 현재 두 가지 버전의 시나리오 초안을 써서 보냈고 캐스팅 제의가 오가는 중이다. 2016년 초 촬영을 목표로 여러 문제를 해결 중이다. 참고로 내가 쓴 모든 소설의 영화화 판권이 팔렸다. <웨딩드레스> <실업자> <오르부아르>는 프랑스에서 영화화가 진행 중이다.

-형사 베르호벤 시리즈의 주인공 카미유 베르호벤 형사는 145cm라는 작은 키의 남자로 묘사된다. 이런 설정을 영화에서도 유지하려면 캐스팅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나.

=영화에서도 카미유의 외모 설정을 유지할 것인지 고민 중이다. 배우 캐스팅이 어려우면 설정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데 그러면 기존의 형사영화와 차별점이 없어진다. 마침 미드 <왕좌의 게임>을 보고서 피터 딘클리지가 카미유 역을 맡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더니 스튜디오에서도 좋아하더라. 그가 캐스팅될 것을 염두에 두고 그에 맞는 시나리오 초안을 두 가지 버전으로 각색했다. 원래 시나리오는 프랑스가 배경인데 미국을 배경으로 한 버전을 다시 쓴 셈이다. 과연 어떤 감독이 나서서 피터 딘클리지와 작업할지, 혹은 다른 배우를 캐스팅해서 찍을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소설을 직접 시나리오로 각색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지점은 무엇인가.

=꼭 영화로도 보고 싶은 장면이 있다. 카미유 형사와 범인에게 납치된 알렉스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그러니까 두 사람이 한 화면에 동시에 등장하는 유일한 장면이다. 두 사람이 키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서로 지나치게 되는 장면인데 과연 어떤 연출자가 내 마음을 알아줘서 구현해줄지 모르겠다. 소설에서는 독자들이 대체 이 두 사람이 언제 만날지 기대를 갖는다. 관객 역시 그 장면에서 대단한 서스펜스를 느끼게 해주고 싶다. 결국 카미유가 알렉스의 발자취만을 뒤쫓는 것은 미학적인 측면을 고려한 전개이기도 하다. 소설을 쓸 때도 두 사람이 겹치지 않도록 상당히 공들여서 썼다.

-어떤 감독이 연출을 맡기를 바라는가.

=카미유의 작은 키 때문에 감독은 카메라의 위치를 어디에 놓을지 고민할 것이다. 그게 바로 시점이니까. 처음 소설을 구상할 때는 보통 사람들은 볼 수 없는 시각을 지닌 형사 캐릭터가 중요했고 그래서 카미유라는 인물이 탄생했다. 이를 영화화할 감독은 화면을 로앵글로 구상할 수도 있고 오히려 반대로 부감숏을 활용해 찍을 수도 있다. 이런 카메라의 위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감독이었으면 좋겠다. 소설에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될 거다.

-<알렉스>를 구상할 때부터 3부작을 염두에 두었나.

=처음부터 3부작을 구상하지는 않았다. <알렉스>를 쓸 때쯤 3부까지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러려면 연결성이 중요하니까 1부인 <이렌>을 다시 들춰보며 등장인물을 연결시켰다. 3부인 <카미유>는 의식적으로 영화화되기 어렵겠다고 생각하며 쓰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알렉스> 이후 가장 영화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소설이 <카미유>다. (웃음) 지금 <알렉스>를 만들고 있는 제작사가 <알렉스>의 흥행을 전제로 <카미유>를 우선적으로 영화화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소설을 쓸 때 캐릭터와 이야기, 문체 등의 요소 중 가장 우선시하는 부분이 있나.

=나는 소설을 쓸 때 구조의 틀을 먼저 잡는다. 그다음에 구조에 맞는 이야기의 흐름을 잡고 흐름이 완성되면 과연 어떤 인물이 이 구조를 설명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이런 과정에서 찾아낸 인물이 바로 ‘알렉스’다. 알렉스나 카미유는 추상적인 아이디어에서 시작해서 점점 구체화된 경우다. 그런데 <이렌>은 반대로 문학적인 카피캣 살인마라는 캐릭터를 먼저 정해놓고 그에 맞는 이야기와 구조를 나중에 고민하는 순서로 썼다. 살인마를 먼저 정한 이유는 책이라고는 일절 읽지 않는 캐릭터로 설정한 카미유가 책을 모방한 살인사건을 과연 어떻게 수사해나갈지 그 충돌지점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알렉스>는 충격적인 반전, 즉 소설의 구조 자체가 중요한 장치다. 많은 사람들이 앨프리드 히치콕의 <싸이코>와 비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천재이기 때문이다. (웃음) 농담이고, 책을 쓰는 과정에서는 특정한 가치를 부여하거나 독창성을 염두에 두고 서술하지 않는다. 그건 모두 출간된 이후 독자 혹은 평론가들이 부여해주는 것이다. 일례로 많은 사람들이 <오르부아르>의 첫 번째 챕터가 문학성이 뛰어나다고 칭찬을 해주는데 내가 보기엔 다른 소설의 서두와 별다를 바 없어 보인다. 다른 소설가들은 어떻게 작업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냥 쓴다. 겸손한 천재라고 써달라.

-카미유의 수사 방식은 최근 유행하는 탐정소설이나 스릴러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과학적 수사를 추구하지 않는다.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방식을 고수하는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카미유는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한 화가 엄마의 영향으로 유년 시절을 그림과 함께 보냈다. 이유를 묻는다면 내가 과학적인 지식이 없어서다. 나 역시 카미유처럼 문학이나 회화 등 예술분야를 더 좋아했고 자주 접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 같다. 만약 내가 생물학을 좋아했다면 그에 기초한 특성을 지닌 형사로 설정했을 것이다. 최근 화두인 드론과 같은 기계 장치가 내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신 소설의 중요한 특징으로는 주인공이 슈퍼히어로처럼 모든 난관을 헤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는다. 각각의 인물 묘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기도 하고 읽다 보면 인명사전 같은 소설이란 생각이 들 정도다.

=어떤 의도를 갖고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엔 그리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나는 부차적인 인물에 집중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역사를 끌고 나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주변 인물들의 성격이 사건 해결에 굉장한 도움을 주기도 한다.

=히치콕 감독의 <새> 각본을 쓰기도 했던 ‘경찰소설’의 대가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를 즐겨 읽는데 그 소설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에드 맥베인은 형사들의 활약을 그린 50권 분량의 방대한 소설 안에서 여러 권에 걸쳐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인물에 페이지를 할애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 인생과도 닮아 있다. 살면서 누군가 끊임없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하지 않나. 그런 영향을 생각하면 되겠다.

-각각의 소설마다 신분 위조 모티브가 자주 등장한다. 거의 모든 소설 제목이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쓰다 보면 자꾸 신분증 바꾸는 설정을 쓰게 된다. 소설 제목의 경우에는 프랑스어 원제와 영어 원제가 다르다. 제목은 하나의 전략인데 영문판을 출간한 미국의 출판사에서 먼저 이름으로 제목을 지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듣고 보니 너무 환상적인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어판도 그렇게 지을걸. (웃음)

-형사 베르호벤 시리즈의 주요 사건은 대부분 여성들이 처한 사회문제에서 기인한다. 이를테면 성폭력 문제가 중요하게 다뤄지며, 하다 못해 주인공의 아내나 엄마의 사연까지도 종종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작용한다.

=내 소설은 거의 대부분 여성 폭력을 소재로 삼고 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극단적인 여성 폭력 사례가 너무 많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현실도 고발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싶었다. 특히 <알렉스>의 ‘알렉스’는 가정폭력에 시달린 인물인데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이 처한 상황에서 그들이 견뎌내고 기어이 벗어날 수 있는 지점이 있음을 설명한다. 회복력이라고 할까, 그녀들에게서는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진다. 남성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혹은 남성들은 잘 모르는 여성들만의 특질이라고 생각한다.

-문학 이외의 관심사가 궁금하다.

=여자. (웃음) 미술인 것 같다고? 아니다.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는데 그녀가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 나이 들었음을 실감한다. 결코 느끼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당신의 책이 세상을 움직이는 데 일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책은 세상을 바꿀 수 없을지라도 문학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을 통해서 우리의 여러 행동 양식이 바뀌고 주변 환경이 바뀌고 있다. 문학이 없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배반에 대한 이야기 <오르부아르>

전쟁의 참상을 겪고 돌아온 알베르와 그의 친구 에두아르는 자신들을 쓰레기 취급하며 내버린 사회에 환멸감을 느끼고 대국민 사기극을 벌인다. 돈과 명예와 같은 헛것에 눈이 먼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그들의 엉성한 사기극에 속아넘어가고 만다. 소설 <오르부아르>는 절망적인 상황을 유머와 아이러니로 헤쳐나가는 블랙코미디로서 지구를 뒤흔드는 자본과 권력의 결탁, 그리고 그 지배논리에 의해 희생당하는 인간 개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소설이다. 제목인 ‘오르부아르’는 헤어질 때 나누는 프랑스의 인사말로 우리말의 “다시 보자”에 해당한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쓸쓸하고 진한 우정 사이를 해학적으로 묘사한 인사말의 의미를 되새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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