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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삶의 극적인 순간들을 충격적이지 않게 보여주고 싶었다”
윤혜지 사진 백종헌 2015-12-10

<극적인 하룻밤> 하기호 감독

현실에서 을(乙)이라고 연애에서까지 을일 필요는 없지 않아? 하기호 감독이 <극적인 하룻밤>을 통해 그리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정훈(윤계상)과 시후(한예리)는 전 여자친구, 전 남자친구의 결혼식장에서 괴이하게 엮이게 되고 얼결에 열번의 섹스를 하기로 약속한다. 어른스럽고 잘나가는 과거 연인에게 차였다는 동질감 때문인지, 그냥 속궁합이 잘 맞아서인지 정훈과 시후는 자못 편안한 관계를 형성해간다. 극단 연우무대의 동명 창작극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공간과 인물이 확장되는 동안 하기호 감독의 솔직한 경험담도 은근하게 담겼다. <라듸오 데이즈>(2007) 이후 8년 만에 사랑스러운 로맨틱 코미디로 복귀한 하기호 감독과 만나 <극적인 하룻밤>의 극적인 비하인드를 들어보았다.

-<라듸오 데이즈> 이후 8년 만에 연출 복귀했다. 그간 어떻게 지냈나.

=<라듸오 데이즈>를 끝낸 뒤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 과정을 밟았다. 시나리오를 혼자 쓰면 너무 폐인이 될까봐 이창동 감독님 아래로 들어갔다. 젊은 친구들이랑 같이 학교 다니며 시나리오를 세편쯤 썼다. 졸업하고는 중국에도 잠깐 다녀왔다. 차승재 대표님과 함께 가서 인터넷영화 <남극유애>를 장편영화로 각색하는 일을 했다. 나는 시나리오까지만 썼다. 성별이 바뀐 중국판 <섹스 앤 더 시티> 같은 영화다. 2012년 대통령선거 땐 민주당 캠프에서 홍보 동영상을 편집했다. 연극 <극적인 하룻밤>도 그 무렵에 본 거다.

-연극의 어떤 점이 그렇게 재밌었나.

=개인적으로 와닿는 지점이 컸다. 내 경험과 엮어서 써볼 수 있겠더라. 연극 뒤풀이 가서 연우무대 유인수 대표님께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쳤고, 선뜻 그러라고 해주셨다. 자신도 영화를 배우는 입장이라며 각색은 내 자유대로 할 수 있게 살펴주셨다. 여러 번 고친 걸 우연히 CGV아트하우스 이상윤 담당에게 보여주고 잊고 지냈는데 이렇게 영화를 만들게 됐다.

-영화화하며 여성 캐릭터가 훨씬 살아났다. 현장에 여성 스탭이 많았는데 그들의 영향인가.

=오채진 프로듀서, 각색을 도와준 민예지 작가, 한예리씨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촬영 중엔 수시로 여성 스탭의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대관절 여자의 마음은 무엇인가. 민예지 작가는 시후가 “섹스 한번으로 광명 찾은 여자”라고 하더라. (웃음) 영화는 시후 캐릭터로 승부를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작에선 시후가 좀 청승맞게 나온다. 연극은 매체 특성상 황당한 설정도 관객이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주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현실감을 불어넣을 필요가 있었다. 막판엔 여성 동지들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였고 한예리씨와는 거의 신 바이 신으로 대본을 고쳤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남성 캐릭터들이 한번씩은 다 운다. (웃음) 전형적인 캐릭터로 보일지 모르지만 어른스러운 주연(박효주)은 내 이상형이다. 실제로 나도 전 여자친구의 결혼 소식에 우울해져서 고량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전화해서 “너 내일 결혼식 올 거지?”라고 한 적이 있다. 결혼식 갔다오고 나서 지금까지 좋은 친구로 지낸다. (웃음)

-바탕엔 청년세대의 고민이 짙게 깔려 있다. 특수학교 기간제 체육교사인 정훈은 자신의 미래를 비관하고, 이제 막 사회로 발을 딛는 시후는 여러 선택의 기로에서 갈팡질팡한다.

=<라듸오 데이즈>는 거의 SF 만들 듯이 찍은 영화다. 누구도 안 가본 1930년대가 배경이었기에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이번엔 영화를 바닥에 많이 붙이려고 했다. 다만 청년세대의 애환을 전면에 두면 프로파간다가 될 테니 그건 피할 생각이었고, 분위기만 슬쩍 깔아두어도 관객은 충분히 알아줄 거라 생각했다. 내 남동생이 나와 9살 차이가 난다. 오랫동안 취직을 못해서 괴로워했는데 동생이나 나나 삶이 칙칙한 건 마찬가지다. 그래서 일부러 밝게 설정한 것들도 있다. 극장에서마저 힘들 필요 뭐 있나.

-그래서인지 불쑥불쑥 비현실적인 지점이 튀어나온다. 시후가 약을 한 보따리나 먹었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멀쩡할 수 있는 건가.

=약을 한 보따리 먹은 건 사실 내 경험담이다. 의사가 얼마나 먹었냐고 물어보기에 200알 먹었다고 했더니 2만알 먹어도 안 죽는다 하더라. 사실 죽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살 방법 중에서 약 먹는 건 그나마 소극적으로 보이잖나. (웃음) 시후와 정훈이는 좀 어수룩하고 서툰 데가 있어서 그 난리를 쳐도 해프닝처럼 넘어갈 수 있었다. 굳이 죽음을 무겁게 다룰 필요가 없는 것 같다. 결혼식장에서 만난 연인이 이별한 뒤 장례식장에서 또 만나게 되는 대구도 재밌어 보였다. 삶의 극적인 순간들을 바닥에 붙여서 충격적이지 않게 보여주고 싶었다.

-의사(김의성) 등장 장면은 환상 같기도 했다.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내가 약 먹고 병원 갔을 때 만난 의사가 그런 사람이었다. 약에 취해서 환각이 보였다. 나는 고양이를 무서워하는데 주변에 고양이들이 앉아 있었다.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 먼저 위세척을 하도록 들여보내고 나는 의사랑 앉아 있는데 의사가 김의성 선배처럼 꼭 그렇게 말을 해줬다. (김)의성 선배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얘기하고 그런 느낌을 요구했는데 자기에게 맡겨만 두라 하더니 딱 영화 속 그 캐릭터를 만들어오셨다.

-준석은 참 못난 남자인데 미워할 수가 없더라. 준석을 연기한 박병은이 묘하게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박병은씨와 (<라듸오 데이즈>에 출연한) 오정세씨가 무척 친해서 정세씨로부터 소개받고 친구가 됐다. 역할도 작고 자칫 악역으로 받아들일까봐 시나리오를 주기도 민망했는데 병은씨가 “인간의 욕망이 다 그런 거죠. 욕망 따라 사는 게 뭐가 어떤가요”라고 말하는 걸 보고 준석을 병은씨에게 맡겼다. 특히 주차장 장면은 원래 우는 장면이 아닌데 병은씨가 마음대로 울어버린 거다. (웃음) 꼭 안아달라는 느낌으로 받아들였다나.

-소품의 쓰임도 다양하더라. 커피쿠폰을 활용한 것도 아기자기하고 시후 집에 식물이 많은 것도 인상적이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한계를 줘야 할 것 같은데 뭘 넣어야 할까 고민하던 중에 민예지 작가랑 커피 마시러 갔다가 떠올린 아이디어다. 예전에 성승택 촬영감독 집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집 안에 화초를 어마어마하게 키우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그러더니 하는 소리가 술 먹은 날 식물들 사이에서 자면 머리가 맑다는 거다. 진짜 그렇더라. (웃음) 언젠가 영화에서 한번 써먹어야지 하다가 그 설정을 시후에게 줬다.

-정훈은 가끔 수화를 쓴다. 엔딩엔 휠체어농구 장면을 넣었다. 이런 설정이 영화 내적으로 큰 역할을 하지 않기에 오히려 기능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 부담이 있긴 했다. 하지만 앞서 죽음을 일상적으로 다루고 싶다는 얘기를 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장애인들도 그냥 주변에 평범하게 많으니까 자연스럽게 출연시킨 거다. ‘일부러 넣지 않는다’는 판단이 더 이상하잖나. 수화는 언젠가 영화에 넣고 싶은 설정이었는데 이참에 같이 엮어서 넣은 거다.

-공백이 무척 길었는데 차기작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나.

=<택시 드라이버>라는 심플한 스릴러를 써둔 게 있다. 나우필름의 이준동 대표님이 보시는 중인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누군가를 쫓아야 하는 사생팬이 반대의 상황에 놓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한 영화다. 카체이싱 영화이기도 한데 어떻게 찍어야 할지…. 다른 작은 영화도 하나 더 있는데 둘 중 뭘 먼저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마음만은 거친 영화를 한편 찍어보고 싶은데.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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