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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일방적 예산 책정에 반대하는 영화인회의 이춘연 이사장
2002-03-21

“자율성 죽이면 문화는 탈 난다”

최근 영화계는 ‘비상시국’이다. 3월에 들어서자마자 영화인회의, 스크린쿼터문화연대, 한국영화제작가협회 등을 비롯한 영화단체들은 수시로 연석회의를 열어야 했다. 문화관광부가 올해 영화진흥위원회의 예산을 승인하는 과정에서, 영진위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고압적인’ 자세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영진위는 토론회 등을 열어 이제는 한국영화산업에 대한 지원뿐 아니라 이제는 다양한 영상문화가 숨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영화계 여론에 귀기울였다. 그리고 이를 위한 방안으로 예술영화전문투자조합 결성, 예술영화전용관 운영 안을 내놓았고, 이에 대한 예산을 책정했다. 그러나 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문화부의 답변은 간단했다. “원금 보전이 어려운 소진성 예산이니 내줄 수 없다”는 것. 그런 이유로 승인된 예산안에서는 이와 관련한 항목들이 모두 빠졌다. 게다가 영진위의 위탁 사업으로 진행해오던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예산도 대폭 삭감했다.

이를 두고 영화인들 사이에서 “과거 영화진흥공사 시절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 “문화부가 2기 영진위 출범을 앞두고 사전 길들이기 작업을 하고 있다”는 등의 걱정의 목소리가 오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현재 영화계는 3월9일 문화부장관과의 비공식 면담에서 이러한 우려의 분위기를 전한 상태. 문화부의 공식적인 답신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문성근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이사장, 유인택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 등과 함께 면담에 참석한 이춘연 이사장을 찾아 향후 대책을 들었다.

지난번 면담은 문화부장관이 먼저 요청한 것으로 들었다. 정부가 먼저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장관이 보자고 한 건 쿼터제 때문이었다. 재정경제부 등 정부 내 타부서로부터 이 사안에 관해 압력을 받아왔고,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문화부가 뭘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중요한 일이다보니, 현재 영화계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를 듣고 싶었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쿼터제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했고, 특히 일회적인 행사가 아니라 상시적인 활동이 요구되는데도 쿼터연대에 관한 예산이 대폭 줄어든 것에 대해 따졌다.

면담중에 올해 영진위 예산책정의 문제 등을 포함한 영화계 현안에 대해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아는데.

맞다. 정부가 영진위를 만든 건 명실상부한 민간자율기구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른 해와 달리 금년 영진위의 예산편성 과정을 보면, 기구에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이렇게 해라"라고 지침을 내리는 식이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런 부분에 대한 항의와 건의였다.

제언에 대한 장관의 답변은 무엇이었나.

장관이 사안별로 구체적인 상황을 숙지하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일단 그 자리에서 관련 실무자에게 불편이 없도록 하라는 지시가 전해졌다.

한때 기자회견을 비롯해서 대응책을 준비한 것으로 아는데.

영화인회의의 경우 확대운영위원회와 정책위원회를 통해 논의를 거듭하면서 대책을 마련했다. 그 과정에서 영화계가 세부적이고 조직적인 대응책들을 내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기자회견도 그중 하나다. 영화인회의나 쿼터연대 모두 사단법인증을 문화부에 반납하자는 강성발언까지 터져나왔다. 감정적인 대응의 측면이 없지 않지만, 무엇보다 영화진흥공사를 민간자율합의기구인 영진위로 만든 것은 국민의 정부가 내세운 주요 영상정책 중 하나였는데, 최근의 사태를 보면 “잘 나가다 갑자기 왜 이러나” 싶은 일종의 배신감이 들어서였다. 보수로의 회귀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고. 일단은 며칠 동안 문화부의 변화된 움직임을 기대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려고 한다.

배신, 보수로의 회귀 등은 무엇을 의미하나.

‘간섭없는 지원’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소위 영화인들을 비롯한 문화계를 가장 흥분시켰던 카피다. 지금까지 영화계만 놓고보면 정부가 충분히 지원해왔고, 한국영화산업의 발전에 있어 큰 도움을 받았다. 물론 그 이전에 영화인들이나 관객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지원책을 마련해준 게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그게 고마웠던 거고. 그런데 왜 유독 금년에 와서는 그 모토가 간섭을 하겠다는 쪽으로 기우는 건지… 정권 말기라고 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날 장관 면담때도 영상정책에 있어서만큼은 좋은 점수를 받고 있는데 마무리를 잘해야 할 것 아니냐고 주문했었다. 사실 일사분란하게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간섭이 시작되고, 이해 당사자들의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기존과 달리 잡아야겠다고 나서는 건 퇴행이다.

올해 영진위 예산승인 과정에서 정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실책을 했다고 보나.

현재 자체정관에 따르면, 영진위는 예산편성에 있어 위원회 의결 뒤에 문화부의 승인절차를 받도록 되어있다. 또한 영화진흥법상에서도 영진위는 문화부의 산하기관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영진위 위원들의 경우 직무상 어떠한 지시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규정도 있다. 위원의 직무에는 영화진흥에 필요한 기본계획을 수립하거나 이를 변경할 수 있음이 포함된다. 전문성을 갖춘 위원회를 구성했다면, 문화부는 적어도 위원회가 제시한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사실 제작자들이나 영화인들이 시장에만 매몰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나서서 문화적이고 공공적인 시각들을 잃지 않도록 해줘야 하는데 지금 상황은 어떻게 된 게 그 반대다.

문화부 관계자들은 예산안과 관련, 영진위와 몇 차례 사전협의를 나눴다는 답변을 내놓던데.

면담 끝나고 실무자와 차를 마시는데도 그런 말을 하더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지적을 해야한다. 무엇보다 영진위가 자율기구라고 하지만 문화부에 감시나 감독권한이 있는데, 사무국 등과 진행된 몇 차례의 협의가 대등한 위치에서 그것도 충분하게 진행됐을 리 없다. 지난 99년에 정지영, 문성근, 안정숙 위원 등이 사퇴를 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문화부가 영진위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심하게 축소하는데 대해 엄중 항의하는 뜻이었던 게 아닌가.

최근 일부 문화부 관료들이 영진위 위원들을 상대로 ‘두고보자’는 식의 발언을 했다고 들었다. 이를 두고 문화부가 제2기 영진위 구성 이전에 사전 길들이기 작업에 들어갔다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길들이겠다고 해서 길들여지나. 지금 현재 젊은 위원들의 경우 자율성과 독립성을 확보하려고 무던히 애쓴 것으로 알고 있고, 또 직접 보아왔다. 막말로 그 사람들이 영진위에 들어갔지만, 무슨 먹을 것이 생겼냐고. 자기 시간과 돈 쓰면서 지난 2년 동안 일해왔고, 또 기왕 시작한 일이니 어떻게든 책임지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걸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욕을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문화부 입장에서는 그동안 부위원장 불신임, 제작지원 사업과 관련 영진위 안팎으로 불협화음이 높았으니 아무래도 골치가 아팠을 법도 한데.

사실 영진위로 간판을 바꿔달긴 했지만, 이후에 도와준 이는 많지 않다. 다 발목잡기만 했지. 일부에서 저 XX들이 다 헤쳐먹는다고 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 그건 과도기에서 나올 수 있는 시행착오인데, 6인의 위원들 실컷 부려먹은 것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사실 위원들이 행정적으로 미숙할 수 있다. 학교 선생님이거나 제작일선에서 일하다가 의욕과 전문성만으로 거기 들어갔으니까. 아쉬운 점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관료들 입장에서 어떻게든 통일된 의견을 원하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그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그런 게 민주주의가 영글지 않은 사고 아닌가. 의견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대신 조금 더 좋은 정책, 더 많은 사람이 원하는 정책, 한발 더 앞서는 미래지향적인 정책을 세우고 선택할 수 있도록 정부가 뒷받침해줘야 한다. 그런데 이제 영진위가 배울 건 배우고 일을 좀 할 만하니까 못 참겠다고 나서는 건 문제가 있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한다고 보나.

일단은 정부관료들의 마인드의 문제다. 좀 조용했으면, 가능하면 별일 없이 지나갔으면 하는 게 속성이지만, 이제 그런 것도 바뀌어야 한다. 진짜로 맘 열어놓고 현장에서 어떤 것이 좋은지 직접 눈으로 봐야 하는데 소수의 인원으로 담당자를 통해서 큰 판을 보려고 하니까 그런 일이 발생한다. 당장 귀찮고 소리나는 게 싫고, 지금 당장의 이익에 부합해서 움직인다면 나중에 후회할 일이 또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번 사안과 관련하여 정부의 변화가 없다면 어떻게 할 셈인가.

끝장을 보겠다, 뭐 그런 것은 아니고. 계속 독촉할 생각이다. 설득하지 못하면 우리가 능력이 없는 것이 되니까 그렇게 되면 아예 자기 생업에 종사해야겠지. 그만큼 어려운 일들은 정부가 잘할 거라고 판단하는 외부인들을 데려다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영화인회의에서도 자체적으로 영진위에 대한 평가를 준비중인 것으로 안다.

3월 하순경에 진흥사업에 대한 공개적인 평가의 장을 만들려고 한다. 현재 정책위원회를 중심으로 자료조사를 하고 있다. 그 자리에서 잘한 점과 못한 점이 드러날 것이다. 향후 2기 위원들이 지난 시기의 공과를 짚어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다고 무슨 청문회를 여는 것은 아니다.(웃음) 위원들이 무슨 죄인도 아닌데. 다만 잘못한 것을 덮어두고, 잘한 것만을 부각시키는 그런 자리는 아니다.

덧붙여 최근 스포츠신문 영화기자들에 대한 촌지수수가 사실로 드러났다. 이와 관련해서 영화인회의도 어떤 입장을 밝혀야하지 않나.

확대운영위원회에서 자정선언을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다만 무관한 영화인들이 더 많은데, 마치 영화계 전체가 다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어 수사결과를 좀 더 지켜보고 자성의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물론 영화인의 한 사람으로 우리 관객들에게 마치 영화계가 돈 주고 기사를 산 것처럼 비쳐서 송구스럽다. 다만 이번 일을 계기로 오히려 능력과 실력으로 인정받는 풍토가 조성될 것이라 기대한다. 글 이영진 anti@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