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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주의 영화비평] 우리는 돈을 벌고 싶다

도박판에 앉아야 하는 우리에게 <빅 쇼트>가 보여주는 네 가지 선택지

<빅 쇼트>

벤 리커트는 월가의 은둔 고수다. 제이미(핀 위트록)와 찰리(존 마가로)는 시골의 초짜다. 친구 사이인 제이미와 찰리는 부모의 차고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소액 투자를 거듭한다. 겨우겨우 약간의 자본을 축적하는 데 성공한다. 두 사람은 월스트리트에서 큰 판에 끼기를 원해 벤 리커트에게 도움을 청한다. 초짜는 고수 앞에서 주름을 잡는다. “미국 부동산이 폭락한다는 쪽에 걸어보려고요.” 고수는 초짜의 투자 설명을 경청한다. “판을 제대로 봤군. 도와줄게.” 결과적으로 미국 부동산 시장은 붕괴된다. 덕분에 제이미와 찰리는 대박난다. 영화 <빅 쇼트>의 한 장면이다. 믿지기 않지만 실화다. <빅 쇼트>는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를 다룬 영화다. 미국 경제와 세계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뻔한 사건이다. 제이미와 찰리처럼 하늘이 무너졌을 때 솟아날 구멍을 찾아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마이클 버리이고 마크 바움이고 자레드 베넷이다.

지금껏 월스트리트 금융계를 다룬 영화는 많았다. 대표적으로 올리스 스톤의 <월스트리트>(1987)가 있다. 고든 게코(마이클 더글러스)는 말한다. “탐욕은 좋은 것이야.” 마틴 스코시즈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3)도 있다. 조던 벨포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야말로 월가가 낳은 탐욕의 사생아다. 정작 두 거장 감독은 영화를 통해 월스트리트를 단죄하려고 든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는 월스트리트에 대한 할리우드와 대중의 부정적 인식을 더욱 강화시켰다. 리먼 브러더스 부도 사건을 모티브로 한 <마진콜: 24시간, 조작된 진실>(2011)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탐욕의 도둑들이다. 같은 이야기를 생생한 증언이 담긴 다큐멘터리로 풀어낸 작품이 <인사이드 잡>(2010)이다.

<빅 쇼트>는 다르다. 꼰대 거장들처럼 도덕적인 단죄를 하려고 들지도 않는다. <마진콜…>이나 <인사이드 잡>처럼 고발의 쾌감에 기대지도 않는다. <빅 쇼트>는 월스트리트 안쪽으로 훨씬 더 깊숙하게 들어간다. 미국 부동산 붕괴라는 대참사 속에서 엄청난 대박을 터뜨린 인물들의 선택에 주목한다. 그들처럼 대박을 꿈꾸라고 부추기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빅 쇼트>는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시장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되묻는다. 우리 모두는 돈을 벌고 싶다. 최소한 돈이 필요하다. 싫든 좋든 간에 시장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도박판에 앉아야 한다는 얘기다. 누군가가 돈을 잃으면 그만큼 누군가가 돈을 벌어가는 제로섬 게임이다. <빅 쇼트>는 각각의 주인공을 통해 우리에게 네 가지 선택지가 있다는 걸 말해준다.

완벽하지 않은 시장

제이미와 찰리는 <빅 쇼트>의 주인공들 중에서도 가장 보통 사람들에 가깝다. 시장에 대한 정보도 별로 없고 투자 경험도 전무하다. 그러나 그들은 전문가들도 몰랐던 부동산 시장 붕괴를 예측했다. 제이미와 찰리한테는 원칙이 하나 있었다. “나는 시장이 어디로 흘러갈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시장이 완벽하지 않다는 게 틀렸다는 건 안다.” 제이미와 찰리는 미국 부동산 가격이 언제까지나 상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크리스천 베일이 연기한 마이클 버리의 길도 있다. <빅 쇼트>의 원작자는 <머니볼>로 유명한 마이클 루이스다. 마이클 루이스의 동명 원작은 난해하고 지루하다. 다만 인물들 하나하나는 무척 흥미롭다. 그중에서도 주인공 격은 마이클 버리다. 미국 부동산 시장이 붕괴된다고 맨 처음 주장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마이클 버리는 월가 투자 은행들이 체결한 모든 부동산 대출 서류를 하나하나 다 읽어본다. 대출 담당자도, 대출 당사자도 읽어보지 않았을 서류들이다. 마이클 버리는 미국 부동산 시장은 사상누각이고 반드시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이게 마이클 버리식이다. 시장을 이기려면 시장보다 똑똑하거나 부지런해야 한다. 시장보다 똑똑하긴 어렵다. 마이클 버리는 시장보다 부지런했다.

라이언 고슬링이 연기한 자레드 베넷은 도이치뱅크에서 일하는 트레이더다. <빅 쇼트>에서 자레드 베넷은 징가 게임을 통해 부동산 대출 시장의 구조를 설명한다. 부실채권투성이인 아래쪽이 위쪽을 위태롭게 지탱하고 있는 모양새다. 자레드 베넷은 마이클 버리나 제이미나 찰리처럼 직접 판에 뛰어들지는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누군가를 도박판에 앉히고 얻는 수수료다. 따지고 보면 자레드 베넷이야말로 영원한 승자다. 부동산 시장이 붕괴되든 지탱되든 간에 돈을 버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시장을 이길 수 없다면 자레드 베넷처럼 시스템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코미디언 스티브 카렐이 연기한 마크 바움이 있다. 원작에서의 이름은 스티브 아이스먼이다. 자레드 베넷으로부터 부동산 시장이 붕괴되는 쪽으로 돈을 걸어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마크 바움은 자레드 베넷을 믿지 않는다. 먼저 베팅을 시작한 마이클 버리도 믿지 않는다. 마크 바움은 동료들과 함께 직접 현장으로 뛰어간다. 대규모 주택 단지에 가서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실태를 점검한다. 집을 샀다는 스트리퍼를 만나서 취재를 한다. 스트리퍼는 말한다. “전 집이 다섯채인데요? 콘도도 하나 있고.” 그제야 마크 바움은 미국 부동산 시장에 거품이 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마크 바움은 오직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만 믿는다. 이것이 시장을 이기는 마크 바움의 방법이다.

모두가 돈을 벌고 싶어서 투자를 하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에 투자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게 금융 시장의 현실이다. 사람들은 금융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없이 대출을 한다. 은행 창구 직원들도 자신이 무엇을 팔고 있는지 모른다. 대형 은행의 엘리트들도 자신들이 어떤 재앙을 초래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누구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 눈앞의 이익만 좇으면서 굴러갈 수도 있는 게 금융 시스템이다. <빅 쇼트>의 주인공들이 대박을 터뜨린 이유는 어쩌면 단순하다. 모두가 시장을 믿을 때 이들은 시장을 끝까지 의심했다. <빅 쇼트>엔 유대인인 마크 바움이 <탈무드>를 공부하던 때의 일화가 나온다. 마크 바움은 신이 틀렸다는 점을 찾아내기 위해 <탈무드>를 미친 듯이 공부한다. 시장을 이기려면 신조차 의심해야 한다.

<빅 쇼트>엔 포르노 용어를 빌리자면 ‘머니샷’이 없다. 계획이 끝내주게 성공해서 황금을 챙기는 순간의 희열이 없단 말이다. 대신 <빅 쇼트>엔 이런 장면이 있다. 네 사람은 부동산 폭락에 베팅했고 실제로 부동산 시장은 붕괴되고 있다. 그런데도 부동산 관련 채권의 가치는 그대로다. 부동산이란 담보 가치가 떨어졌는데 부동산 관련 금융 상품의 가치가 그대로라는 것은 모순이다. 원인은 하나다. 누군가 시장을 왜곡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폭락으로 큰 손실을 보게 된 투자은행들은 거짓말을 계속한다. 덕분에 네 사람도 위기에 몰린다. 시장이 지지 않으면 그들이 죽는 상황이다. 마크 바움과 동료들은 투자은행 관계자인 자레드 베넷을 앞에 놓고 흥분해서 고함을 쳐댄다. 한참 아우성을 치게 내버려둔 다음 자레드 베넷이 말한다. “당신들은 시장에 오류가 있다는 걸 확신했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시장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 거라고 믿는 거지?” 모두가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듯 털썩 주저앉는다.

금융의 본래 역할

<빅 쇼트>는 2008년 금융 위기를 다룬 영화치곤 뒷북이다. 벌써 햇수로 9년 전 일이다. 정작 <빅 쇼트>는 월가를 현미경 위에 놓고 들여다보면서 앞선 금융 위기 영화들이 얼마나 많은 디테일들을 놓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재앙적 금융 위기를 놓고 이제까진 모두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했다. 입이 닳도록 단죄하고 고발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빅 쇼트> 같은 영화가 등장하면 한국의 경제 전문가들은 각자의 부동산 폭락론과 정부 단죄론과 투자 무용론의 근거로 삼기에 바쁘다. 탐욕을 욕하고 정부를 욕하고 은행을 욕하고 월가인들을 실컷 욕해도 시장이 계속 똑같이 굴러가는 건 그래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반복돼왔고 반복될 위기 속에서 강요당하는 개인의 선택이다. <빅 쇼트>는 싫든 좋든 간에 시장에서 살아가야 하는 개인의 선택에 집중한다. 시스템을 바꿀 수도 욕망을 버릴 수도 없는 평범한 인간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탐욕에 눈이 멀기 전에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마이클 버리처럼 시장을 다 읽어보든, 자레드 베넷처럼 시장의 하수인이 되든, 제이미와 찰리처럼 시장을 의심하든, 마크 바움처럼 자신까지 의심하든, 방법은 상관없다.

<빅 쇼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제 억만장자가 된 제이미와 찰리는 사부 벤 리커트를 찾아가서 되묻는다. “우리를 왜 도와주신 거죠?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었잖아요?” 벤 리커트는 말한다. “돈을 벌고 싶어 했잖아? 그래서 돈을 벌게 해준 거야. 그뿐이야.” <빅 쇼트>가 앞선 월가 영화들보다 고수인 이유가 이 장면에 있다. 금융은 나쁜 게 아니다. 금융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직시한 사람에겐 혜택을 줘야 한다. 돈을 벌고 싶다는 욕구는 가장 인간적인 욕구다. <빅 쇼트>는 탐욕이라는 멍에로 그런 욕망까지 죄악시하진 않는다. 대신 벤 리커트를 통해 금융의 본래 역할을 보여준다.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돈을 벌게 도와주는 순기능 말이다. 벤 리커트 역할은 <빅 쇼트>의 제작자 브래드 피트가 직접 맡았다. 우리는 돈을 벌고 싶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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