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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10년 뒤를 생각해도 당당할 것

<특종: 량첸살인기> <과속스캔들> <노리개> 등에서 본 기레기의 도(道)

<특종: 량첸살인기>

연말을 앞둔 어느 술자리였다. 스포츠 신문 연예부 기자인 선배는 수심이 가득했다. 몇달을 쏟아부어 터뜨린 스캔들 기사가 당사자들의 무반응과 더불어 만인의 비웃음만 산 게 얼마 전이기 때문이었다. 선배는 억울했다. “내가 그 주변 인물을 100명은 취재했을 거다.” 우리 엄마도 내 주변 인물인데 내가 30년 넘게 연애 한번 못해본 줄 안다고. 설움에 겨워 먼저 취해버린 선배를 보내고 자리에 남은 누구도 그 말도 안 되는 스캔들을 믿지 않았다. 넌 그 둘이 말이 된다고 믿냐? 아니,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했지.

그리고 며칠이 지나 새해가 밝았다. 우리는 모두 경악했다. 어느 연예 매체가 그 말도 안 되는 스캔들을 데이트 현장 사진과 함께 공개했던 거다, 아아, 사랑은 위대한 거였구나, 그리고 사진도. 우리는 반성했다. 너는 기사 하나를 쓰기 위해 100명을 취재한 적이 있더냐. 영화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의 기획사 장 대표(진경)는 기자면 소설을 쓰지 말고 기사를 쓰라고 막 뭐라 하지만, 기자가 소설 쓸 능력이 되면 100명 취재해서 그냥 소설을 쓰면 된다. 억대 연봉 받는 미국 변호사들도 여름만 됐다 하면 장기휴가 내고 시골로 소설 쓰러 내려간다잖아, 존 그리샴 되고 싶어서.

하지만 소설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 진실만 쓴다는 말은 아니다, 소문이 그런 것처럼. <특종: 량첸살인기>를 보니까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는 건 뉴스를 보는 사람의 몫이라고 뻗대던데, 의처증이 심했던 어느 여배우의 남편은 연예부 기자들이 장난처럼 헛소리하는 걸 믿고 신혼이 끝나기도 전에 이혼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죄인은 예쁜 여자와 결혼한 돈 많은 남자를 놀리겠답시고 분탕질을 일삼은 연예부 기자들일까, 남의 말만 믿고 아내를 의심한 줏대 없는 남편일까. 기레기 중의 기레기라고 욕을 먹는 연예 기자, 과연 그들에게도 도(道)라는 것이 존재하는 걸까.

진정 도라고는 모르는 연예 기자의 전형이 있다면 영화 <과속스캔들>의 봉 기자(임승대)일 것이다. 인기 가수의 섹스 동영상을 폭로하면서(이런 게 뜨면 기자들도 한번 보고 싶어서 다른 기자들을 취재한다. 연예인 X 파일이 뜨던 날 우리 사무실은 발칵 뒤집어졌는데, 한글만 쓰던 아저씨 기자들이 PDF 파일을 볼 줄 몰라서… 보고 싶은데…) 잘나가는 봉 기자는 특종을 터뜨리기 위해 애 잃어버린 애엄마까지 이용하는 후안무치한 기자다.

<노리개>

그런데 기레기라면 소문을 진실처럼 쓰는 기자일까, 없는 사실을 날조해서 쓰는 기자일까, 같은 사실을 쓰더라도 자기가 편드는 쪽에 유리한 사실만 걸러 쓰는 기자일까, 인간으로서 써서는 안 될 기사까지 몽땅 쓰는 기자일까. 봉 기자 해당 사항은 4번, 어쩌면 3번까지. 그래도 증거를 확보하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으며 사진도 돈을 주고 사서 쓰려는 봉 기자가 인터넷 블로그 사진 퍼다 쓰라던 “나눔을 실천하는” 옛날 회사 사장보다는 염치가 있다. 그 나눔이 그 나눔이 아닐 텐데.

어쨌든 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 봉 기자는 눈앞에 놓인 연예인의 스캔들 사진을 못 본 척해야 했던 걸까. 그는 이 문제를 두고 고민하지 않지만 아직은 양심 바른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의 수습기자 도라희(박보영)는 몇날 며칠을 고민한다. 누가 보면 대통령 형님 비리를 입증할 증거라도 두고 고민하는 줄 알겠다.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의 하재관 부장. 지금은 기자 시절을 수놓은 그 숱한 하재관 부장(a.k.a 개 또는 쌈마이)들을 추억하며 집에서 혼자 노는 실업자지만, 내게도 취재를 앞두고 부끄러움에 고뇌하던 시절이 있었다. 촬영 현장 취재 가는 나더러 왜 (진짜 사귀던) 주연배우 둘이 첫 키스 언제 했는지 물어보라 그래, 술 먹고 했겠지 뭐, 다 그런 거 아냐? 하나도 안 궁금하다고. 결국 입도 떼지 못한 나는 돌아와서 보고했다, 질문하려고 손 들었는데 안 시켜줬어요, 팔이 짧아서 안 보였나봐. (진짜로 짧긴 짧다.)

아아, 나도 한때는 <노리개>의 이장호 기자(마동석)처럼 세상의 부정부패를 폭로하는 르포 기자를 꿈꾸었거늘. 하지만 우리도 할 수 있다며, 할리우드 기자들처럼 영화 현장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파헤치고 오라는 지시를 받고 사진기자도 없이 홀로 출장을 떠났던 내가 밤새 사람 바꿔가면서 술을 퍼먹고 파헤친 내밀한 사정이란 이런 거였다. 촬영부 막내는 거의 아빠뻘인 촬영감독과 사귀고 있고, 그걸 모르는 여배우는 촬영감독에게 들이대고 있으며, 조명감독과 조명부 퍼스트는 툭하면 여자 하나 놓고 싸우는데 지금도 그렇다. 이게 내밀하다면 내밀하긴 한데…. 그나저나 <노리개>를 보면서 가장 궁금했던 건 이거였다, 이장호 기자는 대체 뭐라고 하면서 전화를 걸길래 사람들이 다 만나주는 건가요, 그런 건 왜 영화에 안 나와요.

내가 처음 기자가 되었던 무렵, 나를 가르친 선배는 말했다, 사람들이 네 기사를 10년 뒤에 읽으면 어떨지 생각하면서 기사를 쓰라고. 살다 보니 사람을 세 다리쯤 건너 연락처를 따내는 열정을 바치며 배우의 다이어트 비법도 취재하고(진짜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다) 득남 소식도 취재했지만(이건 나름 단독), 그리고 한번 읽고 내버릴 내 기사를 10년이 지난 지금 누군가가 읽고 있을 일은 절대 없겠지만, 그 말은 내가 기레기(당시로 치면 지라시쯤?)가 되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최소한의 기준이었다. 수치를 알게 했다.

하지만 기레기라고 하여 10년 뒤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10년 뒤를 생각해도 당당하다는 것이 진정한 기레기의 도일 것이다. 어느 유력 일간지 기자는 촛불 시위를 꼬박꼬박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시위’(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만 해야 하는 시위였고, 나중에 불온 세력에 의해 변질된 시위는 가짜니까)라고 썼다며, 그것이 진정한 기자 정신이라고 지금도 자랑하고 다닌다. 어찌하여 부끄러움은 듣는 나만의 몫일까, 난 사회부 근처에도 못 가봤는데, 억울하다.

본능처럼 수다를 떨어보자

기레기가 되지 못해 슬픈 이들에게 필요한 두세 가지 주의사항

<특종: 량첸살인기>

찔러는 본다

엄청난 취재력을 가진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 덕분에 나는, 그리고 함께 일하던 기자 모두는, <텔미썸딩>이 개봉하기 몇달 전에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버렸다(그리고 <텔미썸딩>은 잠재적 관객 10명을 잃었다…). 시나리오를 읽은 것도 아니고 감독을 만난 것도 아니면서 그녀가 그런 비밀을 캐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무나 찔러보면서 원하는 사실이 나올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는 수다였다. 심지어 특종도 아닌데(쓸 수도 없고 딱히 쓸 데도 없으니까) 그 선배가 그랬던 건 본능처럼 수다를 떨다 보면 그렇게 된다고. <특종: 량첸살인기>의 허무혁 기자(조정석)도 그렇게 특종을 건진다.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실업률을 본다

이러려고 대학 4년 다니면서 그 높은 학점 받은 게 아니라는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의 수습기자들이 버틸 수 있는 힘은 86만명에 달한다는 청년 실업자의 숫자다. 그래, 한달에 한번 월세 낼 때마다 카드론을 고민하느니 골 들어갈 때마다 한번, 5분에 일곱번 인터넷 농구 기사 쓰면서 한탄하는 게 낫지. 대학 5년 다니면서 학점도 낮은 데다 실질 실업자 260만명 중 한명으로 놀고 있는 내가 청년들의 노동 의욕에 기여하고 있다니, 뿌듯하다.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협찬을 본다

인터뷰 끝나고 집에 가려고 자동차 문을 열면 그 안으로 봉투가 날아들더란 전설을 듣고만 자란 세대,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의 하재관(정재영)이 산양삼과 금두꺼비를 받는 걸 보니 그 전설은 나에게만 전설이었구나, 슬퍼졌다. 하지만 협찬은 살아 있다. 일간지 사회부 기자들이 결혼을 앞둔 생활경제팀 동료가 몽땅 협찬으로 혼수 장만 중이라고 욕하길래 그런 사람 많아요, 라고 한마디 던졌다가 순식간에 기레기 취급을 받았다. 아니, 그냥 팩트가 그렇다고, 난 협찬으로 혼수 땡기고 싶어도 결혼을 못했다고, 카드회사 광고 받아서 빨아주는 특집 기사 실은 건 댁들이잖아요,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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