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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재미 먼저, 그 뒤에 의미를 담았다
김현수 사진 오계옥 2016-03-10

<널 기다리며> 모홍진 감독

<널 기다리며>로 감독 데뷔하는 모홍진 감독은 시나리오작가 출신이다. 그가 골방에 틀어박혀 만들었던 수많은 이야기 중에 처음 영화화된 시나리오는 <우리동네>(2007)였다. 비록 시장에서는 외면받았지만 모홍진 감독은 이후 상업영화 시스템과 할리우드 스릴러에 맞선 한국적 스릴러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게 됐다. 감독 스스로 “스테이크와 와인에 대적할 수 있는 고추장식 스릴러”라고 명명한 <널 기다리며>는 과연 어떻게 다른 ‘한국산 스릴러’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걸까. 무려 15년 동안이나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을 기다려온 어린 소녀 희주(심은경)의 이야기, <널 기다리며>의 각본과 연출까지 도맡은 모홍진 감독이, 활자로 새기는 이야기에서 영상으로 찍어내는 이야기로 영역 확대를 꾀한 속마음을 들어봤다.

-복수를 꿈꾸는 소녀를 둘러싸고 그녀를 지키려는 자와 해하려는 자가 뒤섞이는, 독특한 전개가 인상적인 영화다. 이야기를 어떻게 구상했나.

=극한에 몰린 소녀라는 설정에서 출발했다.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억울한 사람들의 사연이 과거가 되면 현재는 결국 남은 사람들의 몫일 테다. 그럼 세상의 잘못된 판단을, 과연 견고한 제도로 뚫고 나갈 수 있을까? 아니면 차라리 누군가를 제도권 밖으로 보내보면 어떨까? 상상해봤다.

-권선징악을 주제로 강렬한 두 캐릭터가 팽팽하게 맞붙는 스릴러와는 다소 거리가 멀다. 이 시나리오를 가지고 투자자들을 설득하는 과정도 어려웠을 것 같다.

=<널 기다리며>와 관계된 대부분의 회사들은 영화를 하기까지 큰 용기가 필요했다. 사실 이야기의 힘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다소 실험적이더라도 캐릭터가 새롭고 배우가 도전할 수 있으니 설득 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심은경에게 먼저 시나리오를 보냈고 그녀를 설득하고 나니 제작이 한결 수월해졌다. 배우의 욕심도 작가로서의 내 욕심과 비슷했던 것 같다.

-일대일 대결 구도의 영화가 아니기에 초반 전개가 다소 혼란스럽다. 워낙 많은 인물이 등•퇴장하며 그들 모두 기다리는 누군가가 다르다.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물들의 관계가 정리되더라.

=연출을 시작하고 현장에서 아차, 싶었던 점이 있다. 2회차 때였는데 스스로에게 당연한 질문을 하고 있더라. ‘영상과 활자의 속도가 전혀 다르다’는 것.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각 신의 정보를 인식하고 다음 신을 보는데 영상은 정보를 담을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활자보다 친절해야 했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를 길게 늘렸다면 평범한 스릴러 구조가 됐을 것 같다. 영화의 초반부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는 암시를 보여주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던 셈이다. <아저씨>의 이정범 감독에게 이런 하소연을 했더니, ‘무슨 소리냐? 그냥 재미있게 만들면 되지’ , 그러더라. (웃음)

-첫 연출 현장의 어려움이라면 뭐니뭐니해도 배우들에게 오케이 사인을 외쳐야 하는 순간 아닌가.

=배우의 캐릭터가 제대로 서지 않으면 드라마가 재미없어진다. 나는 배우들의 눈만 쳐다보면서 그들이 하는 대사가 눈빛에 붙으면 오케이를 외쳤다. 눈이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되니까 그 감성만 끌어내자, 싶었다. 그런데 내가 행운아인 게, 윤제문, 김성오, 심은경 세 배우 모두 재능이 뛰어나서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호흡을 차분하게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이 다 알아서 해줬다. (웃음) 실은 현장에서 처음 편집을 보는데 어려웠다. 미안하더라. 동료 감독 작가들에게. 고마움 때문에라도 내가 흔들리면 안 되겠다고 자극되더라. 죽기 살기로 했다.

-15년 동안 교도소에서 생활하다가 풀려난 살인 용의자 기범 역의 김성오 배우가 놀라운 체중 감량 때문에 화제가 됐다.

=배우 김성오는 매뉴얼을 풍성하게 갖고 있다. 준비를 철저하게 해온다. 도서관 책 찾듯이 툭 건드리면 그걸 보여준다. 그런 그에게 <머시니스트>를 연기하기 위해 살을 뺀 크리스천 베일의 사진을 보여줬다. 굳이 감량 안 해도 되지만 기범이란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끌고 갈 자신이 있다고 말하니 그럼 해보겠다고 하더라. 우리도 놀랐다. 그 몰골로 턱시도를 입고 결혼식까지 했으니 말이다. (웃음) 식장에 들어서자마자 양가 부모님 뵙고 죄송하다고 인사드렸다.

-배우 심은경의 새로운 연기를 보는 계기도 될 것 같다.

=은경양의 캐릭터 소화력은 또래 배우 중에서 독보적이다. 영화는 캐릭터의 힘인데 그녀가 희주에 적역이라고 생각했다. 현장에서 그녀가 연기할 때 놀랐던 점은, 자신이 생각하는 감성의 연기를 설정해오면 그게 대부분 맞는다는 거였다. 다른 배우들은 2, 3개의 대안을 가지고 오는데 은경양은 처음 이야기한 것을 딱 잡으면 그게 대부분 맞는다. 촬영 시작과 함께 나는 훌륭한 감독이 아니니까 나한테 기대지 말아라, 연기에 대해서는 네가 나보다 선배이니 정 못 찾겠으면 그때 같이 고민해보자고 했다. (웃음) 그런데 대부분 알아서 하더라. 나이에 비해 고민이 많은 친구다. 답을 발견해내면 확신을 갖는 모습도 멋있더라.

-희주는 음악에 대해서도 예민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죽은 아빠와의 연결지점이 노래이기도 하니까. 방의 벽에도 ‘음악이 없는 삶은 잘못된 삶이다’라는 문구를 붙일 정도로 음악 디테일에 관한 한 연출자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것 같다. <우리동네> 때 쓰인 이문세의 노래 <사랑이 지나가면>처럼 말이다.

=인간의 오감 중에서 가장 공포심을 느끼는 게 청각이다. 희주를 괴상한 캐릭터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고 노래도 좋아하는 소녀로 그리고 싶었다. 또 음악은 종종 시나리오상의 어떤 개연성을 대체할 수도 있는 매개체다. 우리가 <널 기다리며>를 감성 스릴러라고도 부르는데 영화 전체의 톤 조절에도 음악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스포일러라 정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널 기다리며>는 영화 전체 국면이 급격하게 달라지는 후반부 반전 설정을 숨겨두고 있다. 희주를 둘러싼 여러 캐릭터가 품고 있는 꿍꿍이가 다르다는 정도로만 언급하자. 이런 설정은 <우리동네>의 확장판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야기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장치 정도인데 이왕이면 재미를 위한 장치에서 의미도 찾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모든 인물들이 그들 각자 기다림이라는 모티브를 지닌 캐릭터이면 어떨까 싶더라. 그리고 그것이 곧 제목이기를 바랐다. 이야기가 방만해지는 위험부담도 있었지만 ‘다른’ 이야기가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실은 <우리동네> 끝나고 이 영화는 왜 안됐을까를 고민하다가 창작자로서 오기가 생겨 8일 만에 써내려간 작품이 바로 <널 기다리며>다.

-시나리오 쓸 때 자신만의 창작 원칙이 있다면.

=내게 시나리오 쓰는 법을 가르쳐주신 선생님들이 항상 하신 말씀이 영화는 캐릭터가 힘이라는것이었다. 캐릭터가 거짓되어 보여서는 안 된다며, 그 캐릭터는 정서와 감성이 느껴져야 한다는 점을 늘 강조했다. 작위적인 인물이 아니고 정말 그 캐릭터로 향기가 나고, 관객이 동의하는 순간 영화는 더 슬퍼지고 더 잔인해지고 더 웃겨진다고 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널 기다리며>에는 알고 보면 잔인한 장면이 별로 없다. 그렇게 늘 ‘홍운탁월법’(烘雲托月法), 그러니까 바로 달을 그려내지 않고, 구름을 물들여서 달을 드러내는 수법으로 시나리오를 쓰라고 배웠다.

-영화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선한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악인들을 위한 길”이라는 대사를 직접적으로 등장시킨 이유가 있나.

=죄와 벌의 문제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리고 제도권 밖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경우에 대해 그리고 싶었다. 여자가 남자를 이겨서 시원하게 복수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니다. 정의와 폭력, 법과 윤리에 관한 복잡한 생각으로 이뤄진 결말이니까. 관객이 공감하고 재미있게 봐줬으면 좋겠다. 그들이 먼저 재미있어하고 나서 여유가 좀 생기면 그 사이에서 내 이야기도 좀 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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