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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거나 혹은 받거나

<조폭마누라> <넘버.3> <거룩한 계보> 등으로 본 형님의 도(道)

<거룩한 계보>

중학생 시절 짝꿍에게 기쁜 일이 생겼다. 오빠가 감옥에 가게 됐다, 만세.

사정은 이랬다. 고등학교를 중퇴할 때까지 집안의 골칫거리였던 그 애의 오빠는 시내 두 번째 조직이었던 **파에 스카우트되면서 갑자기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장한 청년이 되었고,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다가 드디어 형님을 대신해 “한 1년 정도만 살고” 나오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게 경사인가, 그랬다. “아무나 가는 감옥이 아니거든.” 그건 나도 알아.

그 애 말만 들으면 감옥이란 참으로 좋은 곳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데 조직에서 월급은 따박따박 나오지(그런데 감옥에서도 노동은 한다더라), 1년을 놀다와도 경력은 남들 두세배로 쳐주지, 사회로 나오면 어느덧 형님의 오른팔이 되어 있지. 그 애의 눈은 별처럼 반짝였다. “우리 오빠 이제 성공하는 거야.” 그런데 말이다, 홍콩영화 보면(아직 한국에는 조폭영화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감옥 갔다가 따거한테 배신당하고 칼에 찔려 죽는 게 다반사던….

그렇게 꽃 같은 청춘의 1년을 감옥에서 보내며 거시기에 구슬이나 잔뜩 박고(<두사부일체> 참고) 돌아오면 형님의 오른팔로서 햇빛 찬란한 날들이 펼쳐질 것인가. 그건 형님 따라 다르다. 어떻게 아느냐고, 그냥 직장 다니면 안다. 한국의 직장 문화는 조폭 문화, 내 첫 직장에선 모든 남자 부하직원이 상사를 형님이라고 불렀더랬지. 아침이면 온 사무실에 “형님, 나오셨습니까”, “형님, 해장은 하셨습니까”가 울려 퍼지곤 했다. 이게 회사인가, 넘버.2가 되고 싶은 <넘버.3>의 넘버.3 조폭 태주(한석규)도 회사 타령을 하기는 하더라만.

<조폭마누라>

<조폭마누라>의 (여자지만 무조건) 형님 차은진(신은경) 어록에 따르면,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피보다 진한 것이 의리라던데, 오른팔 팔자가 피려면 올바른 형님을 만나야 한다. 내 형님은 내 기사에 자기가 제작자 욕하는 내용 넣어놓고는 성난 제작자가 회사로 쫓아오니까 쟤가 그랬다 그랬어. 이처럼 도(道)가 땅에 떨어진 말세, 과연 올바른 형님의 도란 무엇일까.

무릇 형님이라 하면 동생들보다 월급 많이 받는 만큼 일도 많이 하는 솔선수범의 자세를 지녀야한다(보통은 월급을 많이 받을수록 일은 적게 한다). 1997년 물가로 마누라 카드값만 200만원을 감당하는 <넘버.3>의 고소득 조폭 태주는 하루 평균 열두 시간 반을 일한다. 남들 등쳐먹으면서 편하고 폼나게 살려고 건달이 된 걸 텐데 많이 등쳐먹으려면 많이 일해야 하고, 그렇게 번 돈은 마누라 쇼핑과 시인 수업에 들어가므로 결과적으로 마누라만 편하고 폼나게 산다는, 현대 도시 건달의 딜레마다.

그래도 태주는 자기 할 일은 스스로 하는 새나라의 건전 조폭. <거룩한 계보>의 오른팔 치성(정재영)이 모시는 형님은 이런 사람이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을 아는가, 오른팔 시키면 된다.

형님 잘못 만난 오른팔의 팔자란 그런 거다. (일반적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오다’가 떨어지면 그냥 한다. 그러다가 누가 봐도 어엿한 아저씨 얼굴을 하고는 스무살이라고 구라 치면서 교복 입고 학교 가는 것이 계두식(정준호)의 슬픈 운명. 입학 서류 조작하느라 단란주점 두개 팔아치울 재력으로 고액 과외 선생을 사서 검정고시를 보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하는 건가.

<넘버.3>

그래, 사람은 역시 배워야 한다. 내가 형님의 오른팔이었던 시절, 나만 다른 직원들보다 월급 20만원이 적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씩씩하게 따지러 갔더니 “다른 애들은 대학원 나왔잖아”. 아, 나는 가방끈이 짧구나. 나는 합리적인 근거를 들고 나온 형님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면서 그에 걸맞은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럼 지금부터 20만원어치 일 덜 할게요.” 쫓겨날 뻔했다.

이런 호구 동생들을 잡으려면 형님에겐 어떤 매력이 필요할까. 화려한 언변과 유구한 전통, 그리고 이게 바로 우리 형님이다 싶은 정체성이다. 시칠리아 마피아가 창조한 생지옥을 담은 논픽션 <고모라>에 의하면 두목에게 별명이란 “성인의 몸에 난 성흔(聖痕)과 마찬가지”다. 시칠리아에 니콜라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널렸지만 ‘말린 대구’라고 부르면 돌아볼 사람은 한명뿐이라는 것. 다시 말해 세상에 은진이는 많아도 깔치는 맞춤 가위 들고 다니는 우리 형님밖에 없다.

유구한 전통과 혈통 또한 동생들을 호구 잡기에 좋은 요소다. 2대째 조폭의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가문의 영광>의 전라남도 여수땅 장씨 가문은 집 안에 우리 집만 한 정자를 지어놓고 하얀 한복을 차려입고는 동생들을 가르친다. 아아, 왠지 보고만 있어도 자동차 시동을 손으로 걸던 시대부터 다져온 시칠리아 카모라의 일원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 대를 이어 나쁜 짓을 하겠다는 의지가 샘솟고야 말지. 하지만 가진 거라곤 맨주먹과 알몸뚱이가 전부인 자수성가 조폭이라면 역시 언변이 좋아야 한다. <넘버.3>의 불사파 형님 조필(송강호)을 보라. 황소하고 싸우던 최영의의 일화를 건달로서 나아갈 길에 갖다붙이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남발해도, 동생들은 넋이 나가 최영의의 후계자가 되겠답시고 야산으로 올라가잖아. 진정 건달의 혼이 깃든 구라라 아니 할 수 없다.

한때 옷가게 점원이자 호프집 종업원으로, 수많은 이에게 구라를 치며 색 바랜 재고 티셔츠와 본의 아니게 오랜 세월 숙성된 비싼 술들을 팔아치운 사람으로서, 웬만한 언변에는 넘어가지 않는다고 자부해왔다. 그랬던 내가 듣고 있으면 지루해서 잠이 오겠지, 하고 불면증 치료차 틀어놨던 필리버스터에 홀딱 넘어가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밤을 새고 나서 벌게진 눈으로 입당절차를 찾고 있어. 영혼은 조폭이되 채신머리는 형님이 아니었던 이들 사이에서 나는 진짜 형님을 발견했다. 다행히 형님이면서도 영혼은 조폭이 아니고.

이해 불가능한 그들만의 룰

하루에 열두 시간 반을 일하지 않고도 형님이 될 수 있는 두세 가지 비결

<라스트 갓파더>

머리보다 혈통

하비 카이텔이 사채라도 쓴 건가 왜 나왔지(외모만 봐선 사채를 줬으면 줬지 싶은데) 궁금했던 심형래의 <라스트 갓파더>에 의하면 대부의 재목은 아빠가 내는 것이다. 허리가 어디에 붙었나 모르는 건지 바지를 가슴까지 올려 입고는 문장이 아닌 단어만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바보 영구(심형래)를 핏줄이라며 대부로 세우려는 바보아빠, 아, 핏줄 맞구나. 영화 <대부>의 원작자인 마리오 푸조의 소설 <오메르타>에서는 시칠리아 최고의 대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난 이 두살짜리 아이(아들)에게서 지금은 거의 사라져 볼 수 없는 진정한 마피아의 영혼과 심장을 느끼고 있다네.” 두살짜리니까 오메르타(침묵)는 대충 지키겠다.

<가문의 영광>

사실보다 전설

수십년 전통을 이어온 가문이라는데 왠지 별명은 영어 ‘쓰리제이’(3J)인 <가문의 영광>의 돌산파 보스(돌산 하면 갓김치인데) 장정종(박근형)은 백고무신이 아니라 백구두 신고 다니던 젊은 시절 혼자 10여명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 전설이 10초 만에 100여명으로 바뀐다. 이 정도 되면 전설이 아니라 그냥 자작. 그래도 그런 전설 덕분에 서울대 법대만 나오면 가문의 영광인 줄 알고 사윗감으로 납치하려는 시대착오적인 가문이 5편까지 명맥을 잇는다. 뭐, 현실에서도 가문의 전설 덕분에 가문의 영광을 잇고 있으니.

<가문의 영광>

이성보다 눈물

치사하게 건달의 돈을 떼먹은 국회의원 박용갑(박영규)은 함께 죽자는 형님 철곤(차승원)의 협박에도 눈 하나 깜짝 않다가 걔가 마누라하고 통화하면서 엉엉 우니까 비로소 깜짝한다. 그것이 눈물의 힘, 장씨 가문에 붙들려간 대서(정준호)도 홀아비로서 딸을 키운 장정종의 눈물에 넘어가지만 그 영감님이 진짜 딸을 혼자 키우진 않았을 텐데. 시터 이모님이 키웠을 거야. 그런 눈물에도 넘어가는 한국은 누가 뭐래도 따뜻한 나라, 대통령이 귀한 눈물 한 방울만 흘려주면 지지율이 폭등하는 온정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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