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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희] “미제 사건의 한을 보듬으며 진실을 향한 끈질긴 의지를 전하려 했다”

드라마 <시그널> 김은희 작가

장기 미제 사건 앞에서 시간은 무력하다. 만약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부터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돼줄 신호가 온다면? tvN 드라마 <시그널>(2016)의 상상력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과거에서 온 무전 신호를 좇아 과거의 형사와 현재의 프로파일러가 하나의 팀처럼 공조수사를 한다. 시간을 뛰어넘어 범인을,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이들의 분투는 “과거가 변하면 현재도 바뀐다”는 극중 대사를 증거해 보인다. 그렇기에 이 말은 다음과 같이 새로 쓸 수 있다. ‘현재가 바뀌면 미래도 바뀔 수 있다.’ 그렇다면 미래는 현재의 손에 달렸다. 미제 사건이라는 암울한 소재에서 <시그널>이 발견한 얼마간의 긍정은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시그널>의 김은희 작가를 만났다. 사인(死因)을 밝히려는 법의학자의 이야기 <싸인>(2011), 경찰 사이버 수사대가 온•오프 세계의 추악한 얼굴을 밝히는 <유령>(2012), 정재계의 음모에 맞선 대통령과 경호원들을 그린 <쓰리 데이즈>(2014)까지. 작가는 장르물을 통해 꾸준히 말해왔다. 어쩌면 진실로 가는 단초는 우리가 놓친 증거와 신호 속에 있다, 그러니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현재) 너머의 진실의 실체를 계속해서 물어야만 한다고. 인터뷰는 <시그널>의 마지막 2회분 방영에 앞서 진행됐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한 <응답하라 1988>(2015)의 후속작이라 부담이 상당했다고 들었다. 그 고민이 무색할 만큼 안정적인 시청률에 호평까지 얻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늘 걱정한다. 지금도 마지막 15, 16회 시청률이 잘 나올지 걱정이다. 욕은 안 먹었으면 좋겠는데. 괜히 결말을 쥐어짜낸 게 아닌지. 한회 끝나고 나면 ‘괜찮은 것 같은데?’ 했다가 좀 지나면 ‘아, 그때 이렇게 썼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대본 쓸 때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다. 특히 15, 16회 쓸 땐 더욱더 그랬다.

-<시그널>은 2015년을 현재로 삼아 멀리는 1989년에 일어난 장기 미제 사건을 풀어간다. 어떻게 미제 사건을 소재로 삼을 생각을 했나.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다. <싸인> <쓰리 데이즈> 등의 전작이 다소 건조하게 전개됐다면 이번엔 좀더 감정적으로 슬픈 장면들이 많다. 미제 사건이다보니 아무래도 한(恨)이 있다. 범인으로 오인돼 감옥에 간 경우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미제 사건이다. 조사하다보면 절로 감정이입이 돼 힘들어진다. 사건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감정을 보듬는 데 초점을 맞춰보자고 김원석 감독님과 의견을 모았다. 미제 사건이라 과거 시점이 나와야 했고 그걸 다시 현재의 관점에서 푸는 게 관건이었다.

-그 문제를 푸는 데 무전기가 열쇠가 돼줬다. 과거의 이재한(조진웅) 형사가 현재의 프로파일러 박해영(이제훈)에게 무전을 보내면서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시작되는데.

=무전기라면 과거와 현재를 유기적으로 보여줄 수 있겠더라. 그런 장치가 없으면 과거는 전형적인 플래시백으로만 전개되니 굉장히 답답했을 거다. 근데 이 장치를 두고 대본을 쓰려니 정말 힘들었다. 미제가 될 수밖에 없던 당시의 상황도 써야 했고 어떻게 해야 이 사건을 풀 수 있을지에 대한 현재적 관점도 필요했다. 사실상 한 사건에 두 이야기를 쓰는 셈이니. 아, 내가 진짜 미쳤지. 그래도 어쩌면 무전으로 미제 사건이 풀릴 수도 있다는 일종의 희망을 갖게 하는 건데. 이런 판타지라도 없었다면 (인물들이) 얼마나 속상할까 싶다.

-수사물은 사전에 상당한 자료 조사가 전제돼야 쓸 수 있지 않을까. 자료는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수집하고 정리해뒀나.

=<시그널>은 2014년부터 준비에 들어갔다. 미제 사건인 만큼 과거의 수사 방식과 다르게 기존 자료를 분석하는 프로파일러의 역할이 중요했다. 초반에는 전직 프로파일러였던 분이 상주하다시피 해 도와줬다. 유괴, 연쇄살인 등 사건별로 미제로 남은 이유, 수사방식 등을 정리했다. 실제 강력계 형사분들과 인터뷰를 한 게 도움이 많이 됐고. 보통은 보조작가와 함께 다니며 녹음하고 녹취록을 만들고 회의 후에는 관련 자료를 한부씩 프린트해둔다. 드라마 한편 끝날 때마다 자료 박스가 하나씩 생긴다.

-미드처럼 에피소드별 전개가 아니라 몇 가지 미제 사건들을 관통하며 박해영, 이재한, 차수현(김혜수) 각자의 아픈 과거도 드러난다. 인지하지 못한 순간 이들의 과거가 서로 이어져 있기도 하다.

=<싸인> <유령> 때도 비슷한 구조였다. 한국 시청자에게 조금 더 익숙한 방식이 아닐까. 주연 캐릭터들을 좀더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 과거와 현재가 무전으로 이어지고 재한과 수현의 애틋한 관계도 그려지다보니 그들간의 인연이 부각됐다. (과거와 현재의 주인공들이 대화를 하는) <프리퀀시>(2000), <동감>(2000)도 마찬가지겠지만 무전이라는 게 판타지잖나. 이걸 논리적으로 설명할 게 아니라면 인연이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로 가보자 싶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한국 사람이라 그런가 보다.

-4회 대본이 나온 뒤에 중요 캐스팅이 결정됐고 이후 나머지 대본까지 한번에 다 썼다. 촬영도 지난해 10월부터 시작돼 절반 이상이 사전 제작됐다.

=작업하고 싶었던 배우들이 대본을 보고 함께하고 싶다고 해왔다. 다만 여러 일정을 고려했을 때 1월 안에 극이 완성돼야 했다. 이 좋은 배우들이 의지를 보이는데 내가 못 쓸 게 뭔가. 감독님과 한번 해보자고 하고는 그때부터 죽어라 대본을 썼다. 지난해 8월에 5회부터 썼고 15회를 1월 초에 끝냈다. 그때를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웃음)

-김혜수, 조진웅, 이제훈을 캐스팅한 뒤 대본상의 캐릭터에 변화가 생겼을 것 같은데.

=그림이 그려지니까 대사부터 달라지더라. 그래서 4회까지 쓴 걸 다시 고쳤다. 극을 쓰다보면 어느 순간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여간다. 내가 썼지만 왜 이렇게 인물들을 슬프게 그렸지….

-초반에 이제훈의 연기력 논란도 있어 마음이 쓰였을 것 같다.

=대본을 좀더 정제해 쓰지 못한 내 잘못이다. 해영의 대사량이 상당하다. 사건을 풀어가는 화자인 데다 내레이션도 있고. 생활 용어 하나 없이 죄다 딱딱하고 낯선 수사 용어뿐이고. 장르물이 생각보다 연기하기 어렵다. 또 드라마라는 게 초반에는 연출, 작가, 배우 모두 톤을 맞춰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인물을 분석하고 만들어준 배우가 괜히 마음고생한 게 아닌가 싶다.

-이재한을 통해 조진웅은 로맨스물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 같다.

=김혜수 선배님도, 현장의 여성 스탭들도 재한이가 너무 좋다며. (웃음) 재한의 대사나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실제 강력계 형사님들을 인터뷰하며 많이 얻었다. 드라마에서처럼 기동 차량 운전을 못하는 여성 경찰이 있어서 수현처럼 ‘쩜오’(0.5로 1의 절반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고. 또 수현이가 퍽치기범을 잡는 에피소드는 실제로 막내 형사의 사례를 집어넣은 거다.

-김혜수가 과거 장면에서 풋풋한 신입 형사 차수현으로 등장할 때 주는 새로움이 있더라.

=카리스마가 넘치는 청룡영화제의 여신 아닌가. 그런데 실제 만나면 상당히 귀여운 분이다. 무엇보다도 <시그널>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 본인이 출연하는 장면이 아니더라도 대본을 꼼꼼히 분석하고. 재한과 해영이 서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무전하는 부분에서 눈물이 나서 못 보겠다고 얘기하더라. 재방부터 본방까지 다 챙겨볼 정도다. 내 고등학교 1년 선배인데 자꾸만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러서 그러지 마시라 했더니 “작가님은 다 선생님”이라며. 액션 신도 많았는데 정말 고마웠다.

-디테일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고 소문난 김원석 감독(<성균관 스캔들> <미생> 등)과는 호흡은 어땠나.

=일밖에 모르는 순수한 분이다. 소품 하나하나 챙기는 건 물론이고 주인공 외의 인물들, 심지어 단역들의 연기까지도 생생하게 그린다. 장기 미제 사건 전담팀이 처음 결성됐을 때 다른 형사들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수현이 형사기동대에 첫 발령을 받고 왔을 때 형사들의 분위기를 연출하신 걸 보면 정말 놀랍다. 극적 상황을 이해하고 인물들의 감정을 만들어가는 디테일이 좋다. 대본과 다르게 현장 상황이 바뀌면 꼭 전화를 해 의견을 물으시더라.

-많은 추측이 있었다. 왜 무전은 밤 11시23분에 오는가.

=이재한 형사가 죽은 시간이다. 자기가 죽음으로써 이 모든 게 미제로 남는 데서 오는 한과 안타까움이 있다. 그 안타까움이 무전을 시작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래서 이들을 살릴 수 있다면.’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지 않나. 하지만 과거의 인물 모두를 행복한 상태로 살려낸다는 것 역시도 판타지 같다. 이미 일어난 사건을 막을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사건의 진실과 진범만은 밝힐 수 있도록 하는 정도의 판타지가 들어갔으면 했다.

-이재한은 수사물에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사건 해결을 위해 끝까지 싸우는 정의로운 인물이다. 자신의 몸에 사인을 남긴 <싸인>의 법의학자 윤지훈(박신양)과도 상당히 닮았다. 그런 유의 인물에 애착이 있어 보이는데.

=찔린다. (웃음) 내가 절대로 될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일제 강점기 때 독립투사를 생각해보면 그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절대로 그렇게 살 수 없을 텐데. 그래도 누군가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보려고 했기에 이 사회가 지금 이렇게나마 존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죗값을 치르게 한다’는 대사뿐 아니라 진실을 밝히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인물들이 작품마다 꾸준히 등장한다.

=아무래도 드라마다 보니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게 된다. 법이 아니더라도 도덕, 양심, 상식선에서 죗값을 생각해보고 싶다. 현실에서도 이 정도의 극단까지 가지 않더라도 모두가 조금씩만 (정의를 지키길)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그럼 전체 사회가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N분의 1씩 노력하다보면 전체적으로 좋아지지 않을까.

-<시그널>은 <싸인>과 유사한 의미의 제목으로 읽힌다.

=안 그래도 동료들이 <싸인>과 너무 비슷하다고 했는데, “<싸인>은 오래됐잖아, 사람들이 잊을 때도 됐어”라고 일축했다. (웃음) 내용이 감성적이다 보니 제목은 좀 건조하게 가자 싶었다. 대신 포스터가 좀 감성적이다.

-대본을 쓸 때 관련 서적 외 다른 책들도 읽을 시간이 될까 싶다. 드라마가 끝난 지금, 작가의 독서 목록이 궁금해지기도 하고.

=작업할 때도 책은 계속 읽는다. 특히 화장실 갈 때. 그곳에서만큼은 일을 안 해도 되니까. 대본 쓸 때는 컴퓨터 앞에만 앉지 않게 해준다면 뭐든 하겠다는 마음이다. 예전에는 소설을 많이 읽었는데 요즘은 인문학 서적에 손이 간다. 지금은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을 보고 있고. <총, 균, 쇠>류의 책을 좋아한다.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은 정말 좋아하는 책이다. 잡학다식형이랄까.

-드라마작가이기 이전에 <그해 여름>(2006)의 시나리오작가이기도 했다. 시나리오도 쓸 계획이 있나.

=간절히 쓰고 싶다. 영화로 시작한 사람이라 지인들도 영화쪽에 많고. 영화로 풀어볼 아이템을 드라마로 푼 경우도 있다. 드라마는 내 안의 것들을 다 소진해가는 과정이라면 시나리오는 나를 채우는 작업 같다. <시그널> 끝나면 죽어도 시나리오 한편 쓸 거라고 이미 주변에 얘기해뒀다. 쓰고 싶은 게 하나 있긴 한데, 하반기에는 드라마를 시작해야 해서 어떻게든 상반기 안에 초고를 써야 한다.

-쉴 틈도 없이 벌써 차기작 소식이다. 다음 드라마는 어떤 내용이 될까.

=고만고만한 이야기가 되지 않겠나. (웃음) 그래도, 이 작가가 조금이라도 새로운 걸 쓰려고 했구나 싶게는 해야지. 작가들 사이에 이런 말이 있다. ‘작가는 한편 잘되면 세편은 봐준다.’ <시그널> 덕에 세편 정도는 좀더 써볼 수 있지 않을까. 일하는 즐거움을 상기시켜준 고마운 작품이다.

-<싸인>, <위기일발 풍년빌라>(2010) 등의 대본을 남편인 장항준 감독과 함께 썼다. 다시 협업할 생각도 있나.

=없다. 장항준 감독이 ‘드라마작가는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인정하더라. 영화가 고향이기도 하고. 현재 스릴러물 시나리오를 준비해 영화화할 계획이다. 예전에야 내가 꼬박꼬박 말을 들었지만 이제는 말도 안들을 테니 같이 해도 재미가 없을 거다. 하하.

-마지막으로 드라마작가가 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조언을 부탁한다.

=결국 자기 안에 있는 게 이야기로 나오더라. 대본 쓰는 방법이야 대본 한두편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많이 보고 많이 쓰는 것밖에는. 거기에 쓴 글을 모니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더 좋겠다. 하루에 영화 한편, 일주일에 책 한권은 꼭 놓지 마시라. 복기까지 하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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