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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인간의 고통, 배우의 얼굴
박수민(영화감독) 2016-03-29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속 다카미네 히데코의 얼굴에 대하여

<부운>

영화란 결국 무엇일까? 매번 되묻는 질문에 대한 지금 나름의 답. 결국, 영화는 인간의 고통을 다루는 예술이라는 것. 영화만이 남다른 대단한 무엇이 아니라, 인류가 만들어온 수많은 종류의 예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인간의 고통 없이 가능한 영화는 없다. 있다면 사기다. 작가의 고통, 배우의 고통,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을 떠받치는 스탭들의 고통. 가수 한대수의 목소리를 빌려 “고통, 고통, 고통…!”이라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싶은 일을 계속하는 업계. 영화는 인간의 고통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슨 짓을 할까? 영화가 시나리오에 적힌 고통을 영상으로 재연(再演)할 방법은 재현(再現)밖에 없다. 재현은 그저 하는 척의 시늉이 아니다. 인물이 우는 모습을 찍으려면, 그 배우를 정말로 울려야 한다. 맞는 장면을 찍으려면 때릴 수밖에 없다. 쉬쉬하고픈 무서운 진실. 영화는 결국 폭력일지도 모른다.

리얼함과 사실주의와의 차이

합의된 폭력 역시 폭력이다. 링 위의 복서, 옥타곤 안의 파이터처럼 배우의 개런티는 어쩌면 맷값이다. 인간 연기의 한계란 어느 지점이나 순간에는 결코 연기일 수 없다는 것. 배우가 시나리오에 적힌 고통을 표현하려면 그 캐릭터가 되어 모든 일을 직접 겪어야 한다. 카메라 앞에서 매 맞고 울어야 하는 배우의 육체와 영혼에 대한 존중, 존경, 아니 경외심 없이 영화는 불가능하다. 관객이 보는 스크린 속 폭력은 가상이지만, 프레임 바깥과 카메라 뒤에서 배우나 스탭이 겪는 일은 분명 현실이다. 때론 폭로가 뒤따른다. 네가 말하는 그 대단한 영화, 그 어마무시한 장면을 찍기 위해 감독이 얼마나 악마같이 굴었는 줄 아니? 그러나 결국 영화만이 남는다. 영화란 본래 그런 짓이고, 감독은 위대한 예술가이기 전에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을 보려는 의지를 끝까지 관철하는 게 직업상의 유일한 목적이자 도리인 존재다. 그래서 그가 영화로 하는 일이란 살아 있는 인간을 피사체(被寫體)로 만들어 서사의 시간에 기록하는 것. 피사체를 숭배하면서 파괴하고, 해체하면서도 보존하여 현실의 인류에 뭔가를 호소하는 일이다.

우리는 보통 “리얼하다”라는 표현으로 영화가 보여주는 사실성의 정도를 따진다. 그러나 폭력과 그 고통의 피상적인 전시는 말초신경만을 자극하는 것일 뿐 정작 사실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고문 포르노는 영화 예술이 아니다. 영화의 본질은 고통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인간의 감정과 태도를 타인(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기에, 인물의 외상(外傷)만 들추지 않고 내상(內傷)까지 진단해야 한다. 극중에서 인물들의 고통은 실제로는 가상이지만 그 표현과 전달은 최대한 진실해야 한다는 영화의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다. 감독은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의 고통을 영화 속에 진실하게, 효과적으로 담아야 한다. 최악의 연출은 자기가 마련한 고통에 배우를 정말로 몰아넣고도 그것을 찍은 장면에 진실을 담지 못하는 것이다. 인물의 고통이 관객에게 가짜로 읽히는 순간 영화는 망하고, 고통의 낭비는 용서받지 못할 죄로 남는다. 나는 내 첫 영화에서 그런 죄를 지었다. 배우를 거의 죽일 뻔하고도 그 고통을 담지 못했다.

<흐트러지다>

영화에 담긴 인간의 고통을 생각할 때마다 떠올리는 배우의 얼굴이 있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 속 다카미네 히데코(高峰秀子)의 얼굴이다. 나루세 미키오의 세계에서 인간이란 남에게 빌붙지 않으면 등치는 두 가지 부류이고, 가족이나 연인이라고 예외가 아니라 그들이야말로 가장 염치가 없는 족속이다. 그들을 위해 매번 희생하며 혼자 힘으로 살아가려 애쓰는 가장 숭고한 여인이 착취의 대상이 되고, 다카미네가 자주 그런 여인의 역할을 맡았다.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결코 절망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거나, 북받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짓는 쓸쓸한 미소, 사랑에 속고 인생에 지친 시무룩한 표정이 그녀가 영화에서 매번 보여주는 인물의 얼굴이었다. 모두 다른 사람이면서 같은 사람인, 여러 명의 다카미네 히데코들. 쓸쓸하게 피식 웃거나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표정이 도리어 관객에게 더 큰 슬픔과 연민을 전하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의 인내에서 나오는 표정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진실하게 연기했고, 감독이 그 진실을 분명하게 카메라에 담았다. 광학(光學)의 아름다운 은총(恩寵). 우리는 영화 전체를 머릿속에 넣어 재생하지 못한다. 우리가 마음에 남겨 가질 수 있는 건 오직 몇몇 장면뿐이다.

특히 잊을 수 없는 몇 가지 표정들이 망막을 통해 뇌리로 전해져 이제 가슴 한곳에 각인되어 있다. <번개>(1952)에서 엄마를 울린 이후 바깥을 바라보다 번쩍, 번개가 치는 기적 같은 순간에 크나큰 슬픔에서 어떤 작은 희망으로 변한, 울다가 웃어버린 웃음. <부운>(1955)에서 병들어 죽어가면서도 아무런 희망 없는 연인을 포기하지 못하며 “여자는 흔하거든”이란 말에 “여자는 흔하니까 분하네요”라고 답하며 보이던 쓸쓸한 웃음. <방랑기>(1962)에서 친정엄마 앞에서까지 남편에게 냉대를 받으면서도 울지 않으려 혀를 메롱 내밀던 모습. <흐트러지다>(1964)에서 자신을 사모하는 시동생의 마음을 끝내 차마 받지 못하고 맞이한 비극의 순간 영화가 쾅, 하고 여운을 남기지 말라는 듯이 그렇게 끊어지듯 끝나버릴 때까지 짓고 있던 넋이 나간 얼굴. 비천한 언어로는 묘사할 수 없기에, 문학이 끝내 써낼 수 없는 영화만의 표정.

다행히도 영화가 남아 있으니 저 표정을 볼 수 있었고, 인간의 고통을 진실하게 연기한 다카미네 히데코와 사실적으로 연출한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위대함은 알았다. 그러나 질문. 대체 이런 장면은 어떻게 찍은 것인가?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에 즈음해 방한한 배우 다카라다 아키라의 인터뷰(<씨네21> 1045호)를 읽으니 나루세 감독은 현장에서 ‘못된 할아버지’라고 불렸다고 한다. 대본도 보여주지 않고, 촬영 직전에 중얼중얼 멋대로 대사를 바꿔버리곤 하던 감독은 <방랑기>의 촬영장에서 다카라다가 다카미네를 말없이 바라보는 12초짜리 연기에 어떤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계속 NG만 외친다. 선배인 다카미네에게 이유를 물어도 자긴 알고 있지만 아까우니까 안 알려주겠다는 쩨쩨한 답만 듣는다. 뭐야, 영화판은 더럽고 치사하구나! 작가인 자신보다 먼저 잡지에 작품이 실린 아내를 질투하는 장면을 위해 정말로 악에 받쳐 질투해야 했던 다카라다의 일화. 어떤 감정에 대한 진짜 표정은 연기만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늙은 감독과 선배 여배우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폭력이 아닌, 자연히 나오길 기대하는 기다림. 인간의 고통을 찍어보겠노라고 구구절절 설명하며 이러이러한 지옥을 겪어주길 배우에게 뻔뻔하게 요구했던 아마추어는 이러한 일화 앞에서 꾸벅 고개가 숙여지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신파 아닌 하드보일드의 멜로드라마

‘멜로영화의 천재’ 나루세 미키오가 남겨놓은 영화들의 방법론은 최루성 멜로에 익숙한 우리가 예상하는 신파가 아니라 오히려 하드보일드라고 불러야 옳을 지극한 사실주의다. 그런데 인간의 고통을 사실 그대로 바라보려는 이 태도가 놀랍게도 관객을 울린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의 고통에 대한, 카메라 뒤에 선 자의 깊은 이해와 연민 때문이다. 다카미네 히데코의 얼굴을 이야기했지만, 이것도 언급하고 싶다. 적어도 내가 본 나루세 미키오의 거의 모든 영화에는 반드시 주인공이 사는 서민 동네의 골목길을 잡은 앵글이 있다. 그리고 그 골목길에는 항상 아이들이 놀고 잡상인과 거리의 악사가 지나다닌다. 주인공이 고통받는 이곳 바깥에도 지금 이 세계를 살아가는 누군가가 오늘 하루 삶을 위해 각자의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영화는 잊지 않는다. 위대한 영화, 위대한 배우의 연기를 보며 연신 눈물을 훔치다 영화가 끝나고 어두운 극장 안에 불이 켜지자 드는 생각. 아아, 이제는 아무도 이런 영화를 만들지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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