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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의 트립 투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피사와 그 인근

피사, 데카당스 이탈리아의 귀족적 풍모

타비아니 형제의 <굿모닝 바빌론>. 교회의 전면을 복원 중인 석공 형제.

피사는 피렌체에서 서쪽으로 약 80km 떨어진 지점에 있다. 이탈리아반도 왼쪽의 티레니아 바다에 거의 붙어 있다. 그래서 중세 때는 패권도시 피렌체와의 경쟁은 물론, 해상권 통제를 두고 북쪽 제노바와 경쟁까지 벌여야 했다. 말하자면 피사는 이탈리아의 최상위 패권도시였다. 그런데 13세기에 제노바와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피사는 지금과 같은 인구 9만명 정도 되는 중소도시로 왜소해진다. 하지만 크기만 작아졌지, 도시에 대한 자부심까지 작아진 것은 결코 아니다. 대학의 도시, 예술의 도시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의 도시로서의 자부심과 명성은 지금도 대도시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 나에게 피사는 화려한 과거를 가진 현대 이탈리아의 상징처럼 보인다. 귀족적인 품위를 가진 도시, 하지만 늙어가는 데카당스의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타비아니 형제, 피사 영화의 적자

피사 출신의 대표적인 영화인이 타비아니 형제다. 이들은 변호사 부친 덕분에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문화적 토양도 어릴 때부터 가꿨다. 특히 부친과 함께 영화관과 오페라 극장에 자주 가면서 두 예술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갖는다. 부친은 당시 변호사 사이에서는 소수파인 반(反)파시스트였다. 이런 진보적인 정치성도 두 아들에게 고스란히 전수됐다. 두 형제는 피사대학에 진학했는데, 형 비토리오는 부친을 따라 변호사가 되기 위해 법학을 전공했고, 동생 파올로는 문학도답게 문학철학부에 진학했다. 당시는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이 세계영화계를 뒤흔들 때다. 타비아니 형제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전화의 저편>(1946)을 본 뒤, 영화계로의 진출을 꿈꾸기 시작했다.

대학을 다닐 때 형제는 영화를 직접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평생 영화인이 되기 위해 두 청년은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었다. 그 이유가 사뭇 남달랐다. 당시의 대학은(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의 대부분이) 극소수만이 진학하는 선택받은 자식들의 배움터였다. 졸업하기도 대단히 어려웠고, 하지만 학위를 따면 어느 정도 미래가 보장되는 삶의 비옥한 토양이었다. 지금은 유럽의 대학이 학비가 거의 없는 국립 위주의 평준화 시스템이지만(영국은 예외), 그래서 유명 대학은 존재하지만 명문을 구분하는 문화는 없는데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특히 피사대학은 대표적인 명문이었다. 말하자면 형제는 피사대학을 졸업하면 안정된 삶을 어느 정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형제는 약속된 미래를 갖고 있으면, 영화에 전념할 수 없다는 이유로 대학을 관둬버렸다. 한번 해보고 힘들면, 다시 대학에 되돌아갈지도 모르는 유약함을 아예 없애버리자는 취지였다. 곧 두 형제는 일부러 자신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 뒤, 영화계에 입문했다. 말 그대로 배수진을 치고, 영화에 모든 걸 걸었던 청년들이었다(<파올로 타비아니>, 남인영 지음).

피사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아마 ‘피사의 사탑’일 것 같다. 최고의 건축술을 자랑하던 나라에 걸맞지 않게 무엇이 잘못됐는지 기울어져 있는 신비한 탑, 게다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낙하실험을 했다는 ‘전설적인 스토리’까지 더해져 말 그대로 이곳은 세계적인 명소가 됐다. 지금도 전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탑 주변에서 북적댄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현장에 도착하면 ‘사탑의 흥분’은 곧 진정되고, 바로 옆에 있는 피사의 두오모(Duomo)가 시선을 압도하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11세기에 건축된 이 건물의 우윳빛 대리석과 전면을 장식한 화려한 조각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피사의 대성당은 중세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표 건물이다. 피사 사람들이 가장 자부심을 갖는 건물도 바로 이 두오모다. 당대 피사의 찬란한 예술이 종합돼 있어서다. 이탈리아 데카당스 문학의 대표 작가인 가브리엘레 다눈치오는 교회와 이 주변을 가리켜 ‘기적의 광장’(Piazza dei Miracoli)이라고 불렀다. ‘기적의 광장’은 교회, 사탑, 세례당 그리고 캄포산토(Camposanto, 성스러운 땅이란 뜻)라고 불리는 공동묘지 등 교회 주변의 네개의 명소를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기적’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강조하는 곳이 대성당임은 물론이다.

<노스텔지아>에 등장하는 시에나 인근의 산 갈가노 수도원. 이 수도원은 폐허로 남아 지붕이 없는 상태다.

파졸리니가 피사의 대성당을 보는 방식

피사의 대성당에 대한 자부심이 잘 표현돼 있는 작품이 타비아니 형제의 <굿모닝 바빌론>(1987)이다. 미켈란젤로를 꿈꾸는 피사의 두 형제 석공 이야기다. 이들의 부친도 석공이고 7형제 모두 석공인데, 가장 어린 두 형제가 일에 제일 열심이다. 첫 장면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형제들이 피사의 두오모 전면을 복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부친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고, 아들들은 그 지휘에 맞춰 교회의 얼굴을 새것처럼 살려낸다. 때도 벗겨내고, 조각들의 흐릿해진 외곽선들은 다시 예리하게 깎는다. 그 솜씨가 마치 죽은 미켈란젤로가 부활한 것처럼 날래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을 그냥 ‘장인’이라고 부르는데,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이 ‘예술가’처럼 보이는 것이다. 곧 피사에는 예술가의 경지에 이른 석공들이 널려 있는 것처럼 영화는 표현하고 있다.

타비아니 형제는 피사의 두오모는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예술품 가운데 하나라고 자랑하고 있다. 그런 예술품이 지금도(영화의 배경은 20세기 초)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드러낼 수 있는 것은 피사 사람들의 빼어난 ‘손’ 덕분이라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로부터 물려받은 그 손 덕분에 이탈리아의 예술은 찬란하게 빛날 것이란 자부심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형제들은 그 솜씨를 발휘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일감은 점점 줄어들고, 석공만 해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진다. 형제는 ‘신세계’ 미국으로 갈 계획을 세운다. 이들이 미국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는 게 영화의 중반부다. 그런데 우연히 형제는 D. W. 그리피스가 제작 중인 <불관용>(1916)의 미술팀에 합류하게 된다. 영화의 후반부는 이들이 주위의 경쟁과 질투를 모두 이겨내고 결국 자신들의 솜씨를 드러내, <불관용>에 등장하는 불멸의 세트를 완성해내는 과정이다. 형제들의 자부심대로, 그들의 ‘손’은 세계 최고였던 셈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피사의 대성당이 늘 찬미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파졸리니에 따르면 그곳은 서양 제국주의의 상징이다. 에우리피데스의 그리스 비극을 각색한 파졸리니의 <메데아>(1969)에서도 피사의 대성당은 주요한 의미로 등장한다. 알다시피 <메데아>는 그리스의 영웅 이아손이 황금양털을 손에 쥐기 위해 동방원정을 갔다가 그곳의 아름다운 제사장 메데아를 만나 양털도 획득하고 그녀의 사랑도 얻어내는 이야기다. 동방은 야만, 그리고 서양의 그리스는 문명으로 대조되는데, 파졸리니는 그리스 시퀀스를 원작의 배경과는 달리 이탈리아 피사의 ‘기적의 광장’에서 찍었다. 먼지가 풀풀 나던 야만의 땅을 벗어나 메데아가 영웅을 따라 막 도착한 곳이 피사의 ‘기적의 광장’이다. 잘 정돈된 푸른 잔디, 수학처럼 균형이 맞는 거대한 대리석 건물이 그리스의 발전된 문명을 단번에 상상하게 했다. 반면에 메데아가 살던 동방은 터키의 유명한 유적지인 괴레메(Göreme)에서 촬영했다. 동방은 주로 사막과 언덕의 황야다. 그리고 주거지는 언덕 안의 동굴 같은 게 대부분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메데아 역을 맡은 마리아 칼라스가 제사장으로 나와 피가 튀는 사육제를 지휘하는 ‘야만의 명장면’이 바로 터키의 ‘괴레메 시퀀스’이다.

그런데 파졸리니는 그리스, 곧 서양 문명의 상징으로 내세운 피사의 대성당을 문명의 절정으로 찬미하기보다는 영악하고 타락한 정신의 터전으로 비판한다. 피사의 석공에겐 그렇게 아름다운 건물이, 동방의 메데아에겐 다른 문명을 약탈하고 파괴하기 위해 계산을 하고 작전을 짜는 영악한 정신의 본산처럼 보이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아손은 그리스에 온 뒤, 사랑을 배반하고 메데아를 내친다. 미래를 계산한 이아손은 이제 공주와의 결혼을 도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노한 메데아의 처절한 복수는 잘 알려진 대로다. 그 복수가 행해질 때, 피사의 ‘기적의 광장’은 위선과 탐욕의 사원처럼 비친다. 파졸리니는 그리스 고전을 끌어와 당대 서양의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비판하고 있으며, 그런 비판의 공간적 은유로 피사의 대성당을 내세운 것이다.

<사랑을 카피하다>의 배경이 된 중세도시 루치냐노.

베니니, 아레초에서 이탈리아를 노래하다

피사는 토스카나의 대표적인 도시답게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으로도 유명하다. 좀 과장하자면 여행객은 토스카나의 기차역을 지나칠 때마다 아무 데서라도 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 같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멜로드라마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에 따르면 주인공 남자인 사진작가(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실제로 이탈리아 남부의 바리(Bari)를 지나다 풍경에 반해 그냥 기차에서 내린 경험이 있다. 우연히 그 바리 출신의 기혼녀(메릴 스트립)를 만나면서 두 남녀의 관계가 특별해지는 멜로드라마였다. 피사 주변도 마찬가지다. 아무 데나 내리고 싶은 풍경이 널려 있다. 시골의 아름다운 길, 키 큰 사이프러스 나무들, 넓은 들판, 포도밭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토스카나의 도시들 가운데 우리에게 비교적 덜 알려져 있는 ‘자연의 도시’가 아레초(Arezzo)이다.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1997)의 배경이 된 도시로, 피사처럼 피렌체에 거의 붙어 있다.

베니니는 토스카나 사람인데, <인생은 아름다워>에서는 그 지역의 아름다움, 특히 아레초의 아름다움을 노골적으로 자랑하며 시작한다. 가족들이 집단수용소에 끌려가기 전인 영화의 전반부는 대부분 아레초에서 촬영했다. 토스카나의 어느 시골 출신으로 나오는 귀도(로베르토 베니니)는 친구이자 시인인 페루치오와 함께 아레초에서의 도시생활을 꿈꾸며 신나게 들판을 달린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페루치오가 큰 목소리로 시를 낭송하는데, 이 도입부는 시가 저절로 나올 만큼 풍경이 아름답다는 베니니의 이탈리아에 대한 자부심이자 또 토스카나에는 시인이 넘쳐난다는 자랑에 다름 아니다. 불후의 시인인 단테, 페트라르카가 모두 토스카나 출신들이다.

아레초의 중심에 있는 광장이 ‘피아차 그란데’(Piazza Grande)이다. ‘큰 광장’이란 뜻인데, 그래서인지 이탈리아의 웬만한 도시면 시내 중심에 하나쯤은 있는 광장 이름이다. 여기서 귀도는 아레초의 전원에서 우연히 만났던 도라(니콜레타 브라스키)를 다시 만나, 평생의 인연을 이어간다. 중세도시 특유의 돌길들, 돌로 된 광장, 광장 주변의 교회, 특히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타 마리아 델라 피에베 교회’(Chiesa di Santa Maria della Pieve) 등이 도시의 오랜 시간을 한눈에 알게 하는 곳이다. 귀도는 페루치오에게 드디어 도시에 온 감격을 표현하면서 이 광장에서 “장관을 보라!”며 계속 외친다. 베니니는 르네상스의 본산인 토스카나, 그리고 여기 아레초에서 이탈리아라는 나라의 자부심을 마음껏 표현하고 있다. 전반부의 감정이 그만큼 격정적이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후반부 수용소에서의 비극이 더욱더 관객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왠지 낙원 같은 그 고향을 귀도가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불안이 비극의 감정을 증폭시켜서이다.

<인생은 아름다워>를 촬영한 아레초.

타르코프스키의 첫 망명지 토스카나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도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망명자다. 그는 <스토커>(1979)를 발표한 뒤, 더이상 조국(옛 소련)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타르코프스키는 결국 서방으로 망명했는데, 첫 도착지가 바로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였다. 그는 피렌체에서 서방세계의 일상을 시작했다. 이탈리아에 정착한 뒤 처음 발표한 작품이 <노스텔지아>(1983)이다. 가족들을 전부 러시아에 남겨둔 채 혼자 이탈리아에 살고 있던 타르코프스키의 이별의 고통과 외로움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그래서일까. 귀도와 페루치오에게 시를 낭송하게 했던 토스카나의 풍경도 타르코프스키에겐 한낱 지겨운 자연일 뿐이다.

<노스텔지아>는 아레초 인근의 몬테르키(Monterchi)에서 시작한다. 여느 토스카나의 마을처럼 부드러운 구릉이 펼쳐 있는 절경의 시골이다. 그런데 영화 속 타르코프스키의 분신이자 주인공인 러시아 작가(올레그 얀코프스키)는 “맨날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것도 지겹다”며 차에서 내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작가는 이탈리아어 통역 여성인 에우제니아(도미치아나 조르다노)와 함께 이곳에 있는 ‘산타 마리아 예배당’(Cappella di Santa Maria di Momentana)을 방문하려 했다. 여기엔 르네상스 벽화의 걸작인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수태 중인 마돈나>(1455~65)가 보존돼 있다. 출산을 앞둔 마리아의 배가 제법 볼록해진 모습을 그린 벽화다. 에우제니아는 예배당의 벽화 앞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수태’를 애타게 기도하는 모습을 낯설게 바라보고 있다. 반면에 작가는 예배당 밖을 혼자 서성이며 몬테르키의 풍경을 느끼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주변의 풍경은 어느 순간 고향 러시아의 풍경으로 겹쳐 보인다. ‘절경도 지겹다’던 작가의 말과는 달리, 토스카나의 풍경은 고향에 대한 극심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노스텔지아>는 결국 러시아의 작가가 이탈리아에서 품는 ‘출산’의 이야기다. 그 출산의 결과는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특성답게 사뭇 우주적이고 거대하다. 다들 기억하다시피, 무엇을 출산하고 싶을지는 주인공인 작가가 촛불을 들고 야외 목욕탕을 대단히 천천히 걷는 ‘악명 높은 롱테이크 장면’에 압축돼 있다. 작가가 촛불을 들고 목욕탕을 반복해 걷는 것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광인’ 취급을 받던 도메니코(에를란드 요셉슨)의 요청 때문이었다. 그는 지구의 종말을 예언했고 그 파국에서 가족을 구하기 위해 촛불을 들었었다.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동정했는데 작가는 바로 그 광인의 요청을 실현에 옮기려 한다. 말하자면 작가는 파국의 위기에 빠진 세상의 구원을 위해 마리아 앞에서 간절하게 기도하듯 촛불을 들고 있다. 꺼져가는 촛불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작가의 마음은 롱테이크 장면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고, 그건 감독 타르코프스키의 마음일 테다. 구원을 향한 가냘픈 희망을 담은 이 장면은 아레초와 시에나 사이에 있는 야외 목욕탕인 바뇨 비뇨니(Bagno Vignoni)에서 찍었다.

<노스텔지아>에선 종종 이탈리아의 풍경과 작가의 러시아 고향이 공존하는 초월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압권은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지붕 없는 수도원 안의 집’ 장면일 테다. 작가는 고향의 집 앞에 앉아 있는데, 카메라가 천천히 뒤로 빠질 때 다시 보니, 러시아의 고향은 이탈리아의 어느 수도원 폐허 속에 있다. 한 세상이 또 다른 세상을 품고 있는 비현실적인 이 마지막 장면은 시에나 근처의 ‘산 갈가노 수도원’(Abbazia di San Galgano)에서 촬영했다. 화면에서 보듯, 실제로 수도원의 지붕이 없어져 폐허만 남아 있는 13세기 고딕 건축물이다. 말하자면 작가는 이탈리아의 어디를 가든 러시아의 고향에 대한 강한 ‘향수’에 포로가 돼 있다. 아마 타르코프스키에게도 토스카나의 풍경은 고향이라는 땅의 이상적인 모습, 그래서 동시에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비쳐진 것 같다.

키아로스타미의 토스카나 영화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타르코프스키처럼 망명자는 아니지만 경력의 말기를 맞아 마치 망명자처럼 세계를 떠돌며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가 이란을 벗어나 외국에서 만든 첫 작품이 <사랑을 카피하다>(2010)이다. 이 영화도 토스카나에서 찍었다. 아레초에서 남서쪽으로 20km쯤 떨어져 있는 루치냐노(Lucignano)라는 마을이 주 배경이다. 중세의 도시답게 마을 전체가 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오래된 곳이다. 사람들 모습만 지울 수 있다면, 루치냐노는 천년의 세월을 되돌린 옛 마을의 모습 그대로다. 현재 속에 과거가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비현실적인 느낌을 강하게 주는 곳이다. 어쩌면 공간이 이랬기 때문에 여성(줄리엣 비노쉬)과 남성(윌리엄 쉬멜)의 관계가 현재인지 과거인지, 혹은 현실인지 허구인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의 원제목은 ‘증명된 복제본’이란 의미인데, 이것은 남녀의 관계일 수도, 또는 현재까지 존재하는 중세 마을 루치냐노의 의미일 수도 있다. 그만큼 루치냐노는 중세 마을의 복제처럼 현재 속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곳이 어디 루치냐노뿐일까. 토스카나의 전역에는 그런 신비한 기운을 뿜고 있는 마을들이 곳곳에 있다. 도시가 이미 유령이 된 듯한 귀기가 느껴지는 곳들 말이다.

다음엔 밀라노로 가겠다. 문화와 예술의 도시로서는 피렌체와 선두를 다투는 도시다.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이 피렌체였다면 현대 이탈리아 문화의 중심은 밀라노일 것이다. 그리고 밀라노는 이탈리아 경제의 중심이기도 하다. 경제, 문화, 예술, 패션의 최선두 도시인 밀라노의 안내자로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제격일 테다. 안토니오니의 안내를 따라 밀라노를 여행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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