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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는 것 조차 부족한 잔혹한 게임, <복수는 나의 것>

■ Story

류(신하균)는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장애인이다. 하나뿐인 혈육인 누나가 신장병을 앓자, 공장에 다니면서 정성으로 누나를 돌본다. 그러나 병원에서 남은 길이 신장이식수술밖에 없다며 누나를 퇴원시킨다. 류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장에서 해고까지 당하자 장기밀매조직을 찾아간다. 거기서 모아놓은 돈 1천만원과 자신의 신장까지 도둑맞고 빈털터리가 되자 다니던 공장 사장 동진(송강호)의 8살된 딸을 납치한다. 운동권 출신의 급진주의자인 여자친구 영미(배두나)가 자본가의 돈을 조금 뜯어서 요긴하게 쓰는 건 죄가 아니라며 유괴를 부추기고 동참한다. 동진으로부터 돈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 그날, 류의 누나가 동생이 자기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다는 자책감에 자살한다. 누나의 시체를 묻으러 간 강가에서 마침 동진의 딸이 사고로 물에 빠져 죽는다. 류는 장기밀매조직을 찾아, 동진은 류를 찾아 복수에 나선다.

■ Review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 죄진 자는 죗값을 받는다? 아니라면, 복수를 통해 인과응보를 실현할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의 대답은 단호하다. 아니다, 불가능하다!

사람인 한 인과율에서 해방되기는 힘들다. 나쁜 일이 생겼을 때일수록 더욱 그렇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 잘못한 게 없다면 누가 잘못했기에를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종종 실제 피해보다 그 답이 찾아지지 않는 데서 오는 갑갑함이 사람을 더 괴롭게 만든다. 외줄타기하는 곡예사처럼 인과율의 줄이 끊기면 사람은 추락할 수밖에 없다.

<복수는 나의 것>은 가까운 사람의 납득할 수 없는 죽음으로 인해 자기 삶의 인과율이 무너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동진은 멀쩡하던 딸아이를 잃었다. 교통사고였더라도 ‘왜?’를 묻지 않을 수 없는데, 유괴라는 범죄로 인해 죽었다. 표적이 되는 이와 실제로 육체적 위협을 당하는 이가 다른 범죄가 유괴다. 딸은 교통사고사보다도 더 무고하게 죽었다. 죽음은 단절이다. 원상회복이 불가능하다. 여기서 인과율을 이으려면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만으론 부족하다. 인과응보를 요구하는 분노심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둘은 서로 충돌한다. 범인을 찾아가보니 신장병 걸린 누나를 살리려는 청년, 그것도 청각장애자인 류의 애처러운 사연이 나온다. 거기에 하나의 인과관계가 있는 걸 발견한다. 그러나 딸의 죽음까지 그 연장선에 놓기가 힘들다. 자신에게는 보복으로만 이을 수 있는, 끊어진 또 하나의 인과관계가 있을 따름이다.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복수는 인과율을 복원하는 가장 폭력적인 방식이다. 자신의 인과관계를 잇기 위해 남의 인과관계를 끊어버린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 결연함에는 실존의 무게감이 있다. <복수는 나의 것>은 이런 복수의 논리학을 정교하게 분석한 리포트이기도 하다. 인물들 저마다의 인과율이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무너져버린 뒤에 동진과 류는 복수의 일방통행길로 치닫는다. 여느 영화 같으면 복수를 선택하는 순간을 전환점 내지 정점에 배치할 텐데, 이 영화는 어차피 인과율이란 개별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라는 비관적인 관점을 깔고서 그 순간을 의도적으로 생략한다.

‘하드보일드’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 영화는 대사가 간결하고 음악이 거의 없다. 인물의 감정이 드러나면, 그 순간 다른 화면으로 바뀐다. 폭력이 등장하는 섬뜩한 장면일수록 뜸들이거나 예고하는 일 없이 바로 스크린에 들이닥친다. 망설이는 틈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잘 조율된 촬영과 편집으로 관객의 감정선을 움켜잡고 의도한 방향으로 내몬다. 그 솜씨가 무척 세련됐다. 동진이 딸 시체의 부검을 목격하는 대목에선 동진의 표정만 비춘 채 톱으로 뼈를 자르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재현한다. 다른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번갈아 비추는 교차편집도 적절하게 활용한다. 영미가 류에게 “(장기밀매조직을)찾으면 어쩔 거야?”라고 묻자, 경찰관과 통화하는 동진이 대답한다. “죽여야죠.”

복수에 나선 뒤 둘은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잔혹해진다. 류는 사람을 죽여 신장을 꺼내 먹고, 동진은 아무 죄도 없는 목격자까지 죽인다. 인과율을 복원하기 위해 시작된 행위가 인과율을 무차별적으로 부숴버리는 아이러니, 박 감독 말에 따르면 “죄의식이 사람을 더 잔인하게 만드는 아이러니”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인물들이 복수의 논리학을 좇아 자가발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담백하지만 치밀하게 계산된 어법은 여백을 남겨놓지 않는다. 마침내 한바탕 피비린내가 진동한 뒤에 영화는 자못 황당해보이는 결말로 관객의 숨통을 터준다. 비현실적인 몽상가로 남아 있던 급진주의자 영미의 영역이 현실세계로 들어온다. 영화는 인과율의 복원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며 결론을 살짝 유보한다.

<복수는 나의 것>의 조역들

‘하드보일드’한 무표정들

류가 찾아간 장기밀매조직의 두목은 뜻밖에 50대의 여자였다. 두툼한 살과 함께 두눈과 입의 가장자리가 동일한 각도로 내려앉아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그 표정에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보인다. “알아듣겠어?” “(혈액형이)B형 맞지?” 등 대사는 고작 세 마디. 최소한의 표정과 말 속에 뿜어져나오는 그로테스크한 기운이 앞으로 벌어질 피비린내나는 복수극을 예고한다. 이윤미(52)씨는 장편영화 출연이 처음이다. 74년부터 30년 가까이 연극을 했고, 몇년 전 권종관씨의 <이발소 이씨> 등 단편영화 2편에 나왔다. 이번 출연의 계기는 연극계에서 만났던, 배두나씨의 엄마 김화영씨의 소개였다.

“돈 벌려고 했다. 마침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을 보니까 조그마한 역할에도 모두 인격을 주더라. 그게 믿음이 가서 찾아갔더니 원래 남자로 설정했던 두목 역을 여자로 바꿔서 내게 맡겼다. 내 얼굴이 그 역에 맞는다나?” 막상 촬영장에서 이씨는 박 감독 이하 스탭들과 많이 다퉜다. ‘스타는 대접하고 조·단역은 홀대하는 상투적인 분위기’가 싫었고, ‘자꾸 시간을 질질 끌면서 찍는’ 것도 싫었다. “늙었으니까 나한테는 뭐라고 말 못하고, 두번째 촬영 때는 벙어리처럼 있더라. 그래서 좀 편했다. 또 죽어 자빠져 있는 장면은 연기하기 싫었는데 박 감독이 대역 쓴다며 빼주더라.” 아쉽게도 영화에 나오는 목소리는 실제 이씨의 것이 아니다. 기술상의 문제로 현장녹음을 쓸 수 없게 되자, 성우가 더빙했다.

이 여자 두목의 등장에서부터 비롯된 복수극의 종지부를 찍는 건, 어수룩해 보이는 네명의 킬러이다. 논에서 김매다온 것처럼, 시골스럽고 소박해보이는 아저씨들이 칼을 꺼내더니 동진을 무자비하게 찔러댄다. 이 기괴한 킬러들은 무표정에 더해 말 한마디 안 하고서 표표히 사라진다.

넷 다 연극배우로, 오광록(43)씨는 박 감독이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잠깐 출연한 그를 보고 골랐다. 마지막에 동진의 가슴에 칼을 꽂는 김익태(46)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목소리 연기로 유명한, 연극배우이자 성우다. 한 동네 사는 박 감독 친구의 알선으로 이 영화에 출연하면서 연극배우협회 축구단(김씨가 단장이다)의 후배인 신정근(36), 이계영(33)씨를 데리고 갔다. 영화가 처음인 김씨는 맡겨진 배역이 마뜩하지 않았다. “성우 출신인데, 말도 없는 배역을 주는 거였다. 바꿔달라고 했더니 박 감독이 그냥 그대로 도와달라고 했다.… 연극은 관객이 멀리서 보니까 몰라도 이런 얼굴로 영화가 가능할까 싶어 몇번 출연제의를 거절했었다. 이제는 캐릭터를 소화할 자신만 있다면 자꾸 하자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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