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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고질라>와 <신 고지라> 재난과 영화
박수민(영화감독) 2016-04-26

개러스 에드워즈 <고질라>를 통해 안노 히데아키 <신 고지라>에 기대하는 것

<고질라>

안노 히데아키의 <신 고지라> 새 예고편이 지난 4월13일에 공개되었다. 한마디 대사나 로그라인 없이, 사기스 시로의 묵시록적인 오라토리오가 깔리고, 명백히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연상시키는 분위기 속에, 등장인물들의 표정과 새로운 고지라의 모습이 몽타주로 지나간다. 그리고 무심하게 ‘7•29 [FRI]’ 개봉일자와 함께 이 영화를 좀더 리얼하게 즐길 포맷인 IMAX나 4DX 등의 로고가 붙으며 예고편은 끝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다음날인 14일, 구마모토현에서 지진이 발생했고 현재진행형이다. 재난과 재해가 끊이지 않는 나라에서 만드는 괴수영화. 새삼스럽게 이 장르가 기이하게 느껴지면서 문득, 우리가 재난영화라고 통칭하는 엔터테인먼트와 현실 세계와의 어떤 간극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파괴의 스펙터클과 현실

재난영화에서 관객은 무엇을 즐기는가? 파괴의 스펙터클이다. 우리는 대량의 죽음을 구경하기 위해 재난영화를 본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재난영화의 대가 롤랜드 에머리히는 “나는 극장의 편안한 의자에 앉아 세계가 멸망하는 것을 보는 걸 즐긴다”라고 말한 적 있다. 안전한 제4의 벽 바깥에서, 관객의 세계는 무너지지 않는다. 극장은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를 공유하는 일종의 방공호가 된다. 3D 안경을 쓴 관객은 재난의 CG를 얼마나 사실적인가의 기준으로 평가한다. 그 사실을 맨눈으로 코앞에서 보는 일은 분명히 마다하겠지만.

무서운 질문. 실제로 재난을 겪은 사람에게 재난영화는 어떤 느낌일까? 2014년의 잔인한 봄 이후 우리가 지금 <포세이돈 어드벤쳐>(1972)를 다시 본다면 그 감상은 예전과 같을까? <타이타닉>(1998)을 다시 보는 일도 고통스러울지 모른다. 엔터테인먼트가 현실의 여파로 더이상 오락이 아닌, 다른 텍스트가 되는 일이 누군가 예민한 관객에게는 일어난다. 길티 플레저에서 쾌락이 제거되면 죄책감만이 남고, 그것을 우리는 불편함이라 말한다. 2014년 여름, 세편의 한국 블록버스터(<해적: 바다로 간 산적> <해무> <명량>)는 공교롭게도 모두 바다로 나갔다. 모든 영화가 각자 스펙터클을 그려냈다. 그중 현실에서 목격한 이 사회의 어떤 기운을 고스란히 담은 영화는 한편이었고, 그 작품만 흥행에서 실패했다. 세계를 잊기 위해 극장 안으로 숨어든 관객에게 영화는 불편했다.

<신 고지라>의 포스터에 붙은 캐치프레이즈는 ‘현실 대 허구’이다. 현실 옆에는 ‘일본’을, 허구 옆에는 ‘고지라’를 나란히 적어놓았다. 안노의 대담한 제안. 일생일대의 프로젝트에 도달한 오타쿠의 제왕은 이 역사와 전통의 프랜차이즈를 한낱 이벤트로만 소모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어느 날 일본 미디어에서 사라진 리얼리즘을 특수촬영(이하 특촬) 괴수영화에서 추구하겠다는 선언. 예고편을 보고 예측 가능한 스토리는 결국 고지라가 야기한 재난에 대한 컨트롤타워, 즉 일본 정부의 대응이다. 허구의 괴물 캐릭터를 현실의 일본에 대한 실제의 재앙으로 그리겠다는 감독의 야심. 특촬을 재현한 묘한 CG의 고지라보다 절망적인 표정의 이치카와 미카코와 쓰카모토 신야의 클로즈업, 분노 끝에 폭주하는 듯한 하세가와 히로키의 마지막 몸짓이 더 심상치 않다.

안노의 <신 고지라>가 도전하고 넘어서야 할 대상은 프랜차이즈 자체의 이름값과 현실의 일본만이 아니라 미국에서 훌륭하게 다시 만들어낸 레전더리 픽처스 버전의 <고질라>(2014)다. 개러스 에드워즈의 <고질라>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고지라> 시리즈 중 가장 리얼한(?!) 작품이며, 괴수영화가 도달한 어느 정점이다. 에드워즈는 이 허무맹랑한 장르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카메라를 어디에 놓을 것인가의 문제를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고민한 괴수영화는 이전에 없었다.

<고질라>

쉽게 간과하곤 하지만, 영화 역시 시점이 존재한다. 오로지 전지적 작가 시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나 감독이 인간의 위치에 남아 신이 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영화들도 있다. 그런 영화는 시점을 최대한 등장인물의 영역으로 통제한다.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도 보지 못한다. 극중 인물이 보지 못한, 볼 수 없는 정보를 관객에게만 보여주려고 할 때는 반드시 영화적인 이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스토리 전개상 편의와 장치의 작동을 위해서 갑자기 인물 바깥의 정보를 보여주는 일이 반칙은 아니다. 다만, 시점의 포기는 가끔 명백한 사기가 된다.

재난영화 속 파괴의 스펙터클은 결국 누구의 시점으로 보는 광경일까? 영화를 만드는 쪽과 보는 쪽 역시 이 구경이 돈이 되는 장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니 그 구경을 제대로 시켜주어야 한다. 실제로는 맨눈으로 볼 수 없는 장면을 관객이 보게끔 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롤랜드 에머리히 같은 감독들은 슬쩍 시점을 없는 셈 친다. 세계의 파괴를 집요하게 가까이에서 원하는 만큼 즐기라고 카메라를 실제로는 가져갈 수 없는 불가능한 장소에 놓는다. 카메라가 갑작스레 그 장소에 갈 수 있는 시각적인 근거 없이 스펙터클로 곧장 향한다. 관객의 보려고 하는 욕망에 대한 철저한 봉사는 블록버스터의 미덕으로 간주된다. 돈값을 하는 영화잖아!

파괴의 징후와 그 결과

놀랍게도 개러스 에드워즈는 관객의 이런 욕망을 거절한다. 정확하게는, 거절하기보단 철저하게 통제한다. 그는 카메라를 현실에서 불가능한 위치에 좀처럼 놓지 않고, 등장인물이 본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항상 카메라 앞에 레이어를 건다. 무토(M.U.T.O)와 고질라의 모습을 우리는 공항 창문과 버스와 전철의 차창을 통해서, 닫히는 문 사이와 고글 속으로, 심지어는 TV 화면으로 그것도 일부만을 보아야 한다. 그는 카메라 위치와 시점의 면적을 감질나게 아주 천천히 점층적으로 올리고 늘린다. 관객이 마침내 무토와 고질라의 빅 매치를 풀숏으로 구경하는 것은 영화가 끝나기 20분 정도를 남겨둔 지점이다. 그것조차 괴수들 사이로 강하한 군인들이 존재한다는 시각적 근거를 통해서야 열어준 화면이다.

시선의 1차적 주인이 관객이 아닌 연출자 자신임을 강조하는 듯한 감독의 고집은 신기하게도 영화를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데 기여한다. 그가 매번 프레임에 레이어를 거는 이유는, 실제로 108m 키의 고질라가 존재한다면 개미새끼에 불과할 인간이 한눈으로 그 전체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에서 기인한 것이다. 레이어는 곧 무력한 인간의 관점에 대한 레퍼런스로서 괴수의 압도적 박력과 공포를 극대화한다. 인간의 위치에 놓인 카메라를 통해 관객은 이 가공할 재난을 올려다보아야 한다. 여기서 스펙터클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개러스 에드워즈의 <고질라>는 괴수가 세상을 부수는 걸 구경하라고 만든 영화가 아니다. 그는 파괴 자체보다는 파괴의 징후와 그 결과에 주목한다. 무토와 고질라가 지나간 지역은 쑥대밭이 되어 있고, 인간은 늘 뒤늦게 대처한다. 헬기에서 보는 앵글의 뉴스 화면은 실제로 우리가 세계의 재난을 접하는 주된 매체인 TV와의 관계를 상기하게끔 만든다. 이 놀라운 괴수영화는 관객이 스크린 밖의 세계에서 안전하다고 믿으며 눈앞의 일을 방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 세계를 견뎌내려는 의지의 상징

개러스 에드워즈의 장편 데뷔작 <몬스터즈>(2010)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에드워즈가 각본과 연출은 물론 직접 촬영과 특수효과까지 도맡은, 거의 홈메이드 무비에 가까운 이 초저예산 괴수영화에 이미 <고질라>의 영화적 스타일과 고민, 야심이 그대로 존재한다. 이 영화가 괴수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영화 종료 10분 전이다. 표지판과 가끔 보여주는 괴물의 촉수 몇개로 구현한 설정의 세계관에서 감염 구역을 피해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도망치던 두 남녀는 도착한 폐허(실제로 재해를 입고 버려진 지역에 가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에서 느닷없이 이 재난 속에 남기를 소망한다. 결말의 괴수 장면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경외감은 불과 제작비 50만달러의 영화가 구현한 스펙터클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한 문장으로 쉽게 그 의미를 정의내릴 수 없는 이 신비한 영화는, 개인이 직면한 바깥의 세계적 상황과 부조리함이야말로 재난 그 자체임을 보여준다. 인간에게 재난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재난은 오래 지속된다.

우리는 대재앙 앞에서 과연 신은 존재하는지 묻는다. 이것이 천벌이라면 왜 죄의 당사자들을 향하지 않는가. 왜 죄 없는 자들이 희생을 당해야 하나? 왜 인류는 신 앞에 연좌제로 묶여 있는가? 신의 부재가 곧 신의 존재라면, 이 모든 재해의 총합이 신의 현현(顯現)이라면? 무력한 인간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개러스 에드워즈의 <고질라>를 그해 극장에서 보았을 때, 나는 차라리 저 괴수야말로 신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인간은 탐욕스럽고 세계는 부조리하며 신은 결국 거대한 무의미라면 차라리 저 파괴신 고질라를 숭배하고 싶다는 이상한 기분. 그래서 내가 한 일이란 당장 NECA 12인치 고질라 피겨를 사서 TV 옆에 놓아두는 일이었지만, 지난 2년간 무능한 정부와 먹고살아야 되니 그만 잊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괴물로 진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고질라는 내게 이 세계를 견뎌내려는 의지의 상징이 되어주었다. 참사를 그저 바라본 일반인의 공허한 마음을 당사자와 유가족의 찢어진 마음에 비할 순 없다. 그들에겐 사고의 그날로부터 모든 시간이 정지한다. 남은 가족은 가족을 잃은 장소 앞에 내내 머무른다. <고질라>에서 아내를 잃은 조셉(브라이언 크랜스턴)은 15년의 세월이 지나 이제 그만 잊자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진실을 밝혀서 종지부를 찍을 거야. 영원히 도망칠 순 없어. 과거 속에 묻을 순 없어.” 결국 고질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니라 이러한 의지의 응답이었다.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현실을 향해 포효한다. 이제 안노 히데아키의 신 고지라는 이미 현실에서 과오를 저지른 일본 자국과 우리를 향해 어떤 울음소리를 들려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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