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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 도서] 술을 마시고 <계속해보겠습니다>를 읽고 엽편소설을 썼다

<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펴냄

도시의 밤은 너무 일찍 왔고 길었다. 나는 잠을 많이 자지 않았고, 긴 밤을 보내는 방법은 많았다. 세상이 잠이 들었을 때 나는 자주 작은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마다 나는 맥주를 마시기도 했고, 책을 읽기도 했고, 맥주를 마시면서 책을 읽기도 했다. 나는 황정은의 <계속해보겠습니다>를 보고 어느 해의 가장 평온했지만 불안했던 여름을 떠올렸다. 나기와 나나와 소라처럼, 그 여름에는 우리 세명이 함께했었다. 우리는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항상 불안했고, 그 불안을 불식시키기 위해 걸었다. 그때 나와 은희는 스무살, 오빠는 스물한살이었다.

그해 여름, 우리는 모두 대학 1학년이었다. 지방에서 대학에 다니던 오빠는 개강할 때까지 딱 2달간 집에 머물렀다. 오빠는 항상 내 옆에 있었고, 나의 하루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빠로 채워졌다. 저녁 6시가 되면 나와 오빠는 산책을 하러 나갔다. 나는 항상 오빠와 1m 떨어져 걸었고 그것이 서로의 목소리를 듣기에 가장 좋은 거리였다. 우리는 종종 옆 동네에 사는 은희를 불러서 함께 걷곤 했다. 은희는 나와 오빠 사이에서 걸었다. 은희는 별로 말이 없었고, 나는 여전히 오빠의 말을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은희는 종종 나와 오빠에게 뭘 할 건지 물었고, 우리는 둘 다 잘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매일 같은 거리를 걸었다. 지금도 나는 그 길을 선명하게 그릴 수 있다. 나지막한 언덕이었던 그 길에는 아스팔트가 깔려 있었고, 아스팔트의 중간중간이 거칠게 땜질되어 있었다. 우리는 붉은 벽돌빌라를, 오빠가 다니던 학교를, 무지개세탁소를 지나 걸었다. 우리는 아주 천천히 걸었고, 매미 울음소리가 풀벌레 우는 소리로 바뀌는 것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우리는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서인지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렀다. 오빠는 항상 은희의 얼굴을 보며 걸었다. 은희의 눈은 작았고, 입술은 도톰했다. 은희는 예쁜 곳이 없었지만 예뻤다. 은희는 작은 것에 항상 감탄했다. 은희는 초파리 떼에, 풀벌레 소리에, 심지어 도로에 번진 노란 가로등 불빛에 감탄했다. 오빠는 감탄하는 은희를 보고 감탄했다. 여름이 무르익을수록 오빠와 은희는 조금씩 더 걸었고, 나와 은희는 전보다 조금 떨어져서 걸었다. 오빠는 은희에게 말했고, 나는 그런 오빠의 목소리를 듣고 오빠에게 말했다. 은희와 오빠가 아주 가까워지기 전에 여름은 끝이 났다.

그해 여름이 끝나고 우리는 더이상 자주 만나지 않았다. 오빠는 군대에 갔고, 은희는 대학을 졸업했고, 나는 휴학을 했다. 나는 은희와 만났고, 휴가 나온 오빠를 만났지만 셋이 만나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났다. 은희는 결혼을 했고, 오빠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러 노량진에 갔고 잔치도 없이 서른이 됐다. 나는 잠을 자지 못하는 시간들이 점점 늘어났다. 오빠는 일주일에 한번씩 집에 왔다. 나는 가끔씩 오빠에게 그때 진짜 은희를 좋아했느냐고 물어봤다. 하지만 오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 우리에게 3은 완벽한 숫자였고, 오빠는 그 균형을 깨뜨릴 수 없었을 것이다. 나와 은희와의 거리와, 오빠와 은희와의 거리는 같았다. 관계는 깨지지 않은 채 사라졌고, 그 편이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