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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x cross] 형식을 딛고 상상을 열다 - 그림책 작가 이수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최종후보에 오른 그림책 작가 이수지

그림책 작가 이수지가 한국 최초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최종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접했다. 엘리너 파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에리히 케스트너, 모리스 샌닥, 앤서니 브라운 등등 역대 수상자 이름만으로도 이 상의 무게와 신뢰도는 설명이 불필요하다. 결국 트로피는 다른 후보에게 돌아갔지만 40개국 약 80명의 후보 가운데 10인의 최종 리스트에 호명된 성과는 아직 젊은 작가 본인은 물론, 그림책과 북아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즐거운 흥분을 안겼다. 20여년 전 나는, 같은 학교를 다닌 인연으로 서양화과 학생 이수지의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형태를 완벽히 장악한- 도미에를 닮은- 데생과 육감적 색채가 생동하는 그녀의 그림은 한번 보면 혼동할 수 없는 부류였다. 캔버스 대신 책을 매체로 택한 이수지의 작품들을 뒤늦게 일람하면서 그녀가 기질과 재능에 맞는 날개를 찾았음을 확인했다. 이수지의 그림책은 풍만하면서도 비전이 확고하다. 특히 책의 접지면을 논리적으로 활용한 대표작들은, ‘경계’가 없는 척하는 대신 인지함으로써 그것을 무너뜨리고 넘나드는 쾌감을 선사한다. 종이를 묶은 오브제로서 책이 지닌 고유한 미적 가능성을 누리며 신나게 뛰노는 것이다. 양평 작업실에서 나눈 이수지 작가와의 대화는 그녀가 홈페이지에 쓴 부러운 문장을 거듭 상기시켰다. “내가 가지 않은 길로 갔어도 나는 행복했을 것이다.”

-영국에서 북아트 유학 중에 이탈리아에서 첫 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02)를 냈고, 이후로도 외국에서 먼저 출간한 예가 많다. 에이전트가 있는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원래 석사 과정 프로젝트였다. 볼로냐 아동도서전 구경을 가면서 “책 박람회니까 나도 책을 가져갈까?” 하는 기분으로 더미(dummy, 가제본)를 가방에 넣어갔다가 이탈리아 출판사에 보일 기회를 얻었다. <파도야 놀자>(2008)는 평소 편집부 취향이 내 책이 가진 어떤 면과 맞는다고 느꼈던 미국 크로니클 북스에 무작정 가제본을 보냈다가 출판됐다. 이렇게 한번 작업을 하고 나면, 시장에 진입하게 되고 의뢰를 받기도 한다. 물론 반응이 없었던 적도 있다. 보통 미국 출판사들은 에이전트 없는 원고를 잘 받지 않는다고 들었다. 하지만 거절당하고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통해 깨달은 사실은, 안 보네 안 보네 해도 편집자들은 언제 어떻게든 (투고된 원고를) 본다는 거다. 작가가 출판사를 찾듯 출판사도 좋은 신인을 필요로 하니까. 그림책은 직관으로 파악되니까 문화적 문턱이 상대적으로 낮기도 하다.

-오늘 작업실에 와서 여러 나라 버전의 책을 보는데 신기하게도 스페인어 표지의 캐릭터는 스페인 아이로, 중국판 한자 제목 옆의 같은 캐릭터는 중국 소녀로 보인다. 인물도 공간도, 한국을 포함해 특정 국적의 표식이 없다.

=이목구비라고 해봤자 점 두개에 선 몇개로 이뤄지는데, 읽히는 맥락에 따라 달라지면 족하다고 여긴다. 국적과 인종이 이슈가 되는 이야기들도 아니다. 북아티스트 가운데 브루노 무나리를 제일 좋아하는 이유도, 단순한 색과 선 등 에센스들을 조합하는 작가여서다. 예술적 규율 안에서 제한된 제재로 유희를 벌이는 작업에 끌린다. 내 책 중에서도 <그림자놀이>나 <거울 속으로>처럼 작정한 경우는 “여기는 창고야”, “여기는 연극 무대야”라고 공간을 규정하고 클로즈업 하나 없다. 지나치게 논리적인 면도 있는 듯하다.

-다수 작품에 원피스 한장을 걸친 맨발의 명랑한 단발머리 소녀가 등장한다. 외국 독자들은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를 연상할 것도 같은데.

=어린 시절 내가 좋아하던 빨간 원피스를 입고 찍은 사진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요소로 쓴 것이 시작이고 굳이 영향이라면 지브리보다 이와사키 지히로(<창가의 토토> 등을 그린 아티스트)의 그림이다. 짱구 이마, 동그란 얼굴, 좁고 둥근 어깨, 머리가 커서 불안정하지만 발을 땅에 확실히 딛고 있는 모습 등 내가 생각하는 여자아이의 정수가 이와사키 그림에 있다.

<이 작은 책을 펼쳐봐>(2013). 책 속에 책이 꼬리를 물고 열리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스타일’의 그림책이다.

-지난 4월 세계 아동문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최종후보 10인에 포함되는 성과를 냈다. 안데르센상의 카테고리는 저자(author)와 일러스트레이터 부문으로 나뉘는데, 이수지 작가는 후자에 속했다. 그러나 <토끼들의 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림자놀이> <파도야 놀자> 등 대표작은 아예 글 없이 온전히 그림만으로 스토리를 전하는 책이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좁게 분류되는 것에 이의는 없나.

=스스로는 일러스트레이터라는 명칭을 쓰지 않고 그림책 작가, 영어로는 픽처북 아티스트라고 소개한다. 안데르센상의 ‘저자’ 부문은 순전히 전통적인 문학성에 집중하는 범주에 가깝다. 반면 일러스트레이터 부문 후보로 오른 많은 작가들이 직접 글을 쓰거나, 글 없는 그림책을 만들었다. 사실 안데르센상은 평생 공로상에 가깝다. 한 작가의 커리어가 장르에 공헌한 바를 치하하는 상이다. 그래서 겨우 신인티를 벗은 나를 한국 후보로 낸다는 연락을 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 한국지부(KBBY)에서 받고는 당치 않다고 펄쩍 뛰었다. 외국에서 책을 많이 내서 집행부에 제출할 작품과 자료를 준비하기 용이하다는 점이 컸던 것 같다.

-그림책 작가로서 느끼는 작업 환경의 어려움은 무엇인가.

=2015년 볼로냐 아동도서전에서 한국 작가가 10명이나 입상했다. 그림책 학교도 생겼고 창작 그림책의 수준이 훌쩍 높아졌다. 그러나 미술도 아니고 문학도 아니라고 간주되는 그림책은 지원도 없고 이익대변단체도 없다. 그림책은 0살부터 100살까지를 포괄하는 장르인데도 국내에선 아동문학의 부분집합으로만 인식돼 도서관에서 소화하는 기본 물량마저 적다.

-미대 학부 졸업 직후, 애니메이션 <오돌또기>팀에서 작업한 기억이 난다. 어떤 경험이었나.

=순수회화를 전공한 나로서는 그곳에서 만난,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아티스트들의 영향으로 그림책에 눈을 돌린 면도 있다. 애니메이션은 컵 하나, 손 모양, 배경 세부가 뭐 하나 허투루 있는 게 없다. 사실 미대 출신이라도 그림을 제대로 그리는 사람은 적다. 나 역시 유승배 배경작화 감독님께 배우며 내가 그림을 똑바로 그릴 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그림자놀이>(2010). 소녀가 불을 켜자 창고의 잡동사니가 정글의 영혼을 얻는다. 스텐실 기법을 썼다.

-<거울 속으로>와 <그림자놀이>는 판형과 컬러가 자매 같다.

=<파도야 놀자>도 동일 판형이다. 계획된 3부작은 아니고 앞책이 다음책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거울 속으로>는 세로로 긴 접지선이 현실과 전신거울의 경계였고, <파도야 놀자>에서는 가로로 펼쳐진 해변이 접지선에 의해 소녀와 파도의 영역으로 갈린다. 세 번째 <그림자놀이>는 아예 종이부터 상하로 접어놓고 뚫어지게 쳐다보며 구상했다. 판형을 정하고 이야기가 따라온 경우다. 이제 같은 판형으로는 안 해본 제본 방향이 하나 남은 셈이다. 그네 타기도 생각해봤고, 폭포? 엘리베이터? (웃음)

-홈페이지의 글에서 엄연한 회화작품 여러 장을 묶어 책장에 꽂아둘 수 있다는 점, 비교적 적은 돈으로 누구나 소유할 수 있다는 점, 회화의 아우라를 복제를 거치며 한 단계 눌러준다는 점을 그림책의 장점으로 나열했다. 세 번째가 재미있다.

=(펜으로 형태를 그려 보이며) 이렇게 그린 대로만 나오는 건 좀 재미가 없다. 이걸 복사하면 밝은 부분은 날아가고 진한 부분은 더 진해져서 예기치 못한 요소가 내 의도에 가미되는 현상이 매력적이다. 판화도 같은 이유로 사랑한다. 항상 결과가 기대를 배반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 정확히 컨트롤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작업이 좋다.

-어린이들이 주 향유층이라는 점은 아티스트로서 그림책을 자기 장르로 택한 이유와 무관한 것 같다.

=처음엔 무관했다. 그런데 그림책만이 가진 이야기의 경지, 하이쿠처럼 군더더기 없는 순수함과 초월성이 가능한 이유가 어린이라는 대상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도중에 깨달았다.

-<동물원> <검은 새> <그림자놀이> 등 많은 작품 속 아이들이 부모는 알지 못하는 비밀스런 여행을 하고 돌아온다. 어른에게는 닫힌 문인가.

=두 세계는 포지티브와 네거티브처럼 포개진 관계라고 생각한다. 눈을 사팔로 뜨면 보였다가 초점을 맞추면 사라지는 이미지처럼 말이다. 아이들도 상상과 현실을 혼동하는 건 아니다. 어른이 상상놀이에 섣불리 끼어들면 “엄마, 이게 정말 기차라고 생각해?”라고 가차 없이 쳐낸다. (웃음) 아이도 어른도 두 세계를 볼 수 있는데, 다만 인생의 특정 시기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상상을 차단할 뿐이다. 그러다 계기를 만나면 다시 시야를 뜻대로 전환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파도야 놀자>(2008). 지금까지 가장 많이 읽힌 이수지 작가의 책. 11개국에서 출판됐고 <뉴욕타임스> 우수 그림책으로 선정됐다.

-책 속에서 아이들이 조우한 상상계가 마냥 우호적이지도 위협적이지도 않다는 것이 일관된 특징이다. 한방 먹은 줄 알았는데 선물을 받기도 하고, 위협하다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현상은 그대로인데 퍼스펙티브가 바뀌는 여행이다. <검은 새>에서 부모의 다툼으로 우울해진 소녀는 거대한 새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지만 다시 현실의 방으로 돌아온다. 첫 페이지와 똑같은 구도로 그린 마지막 페이지의 소녀의 얼굴에서 일어난 표정 변화는 미미하다. 상상은 현실을 극적으로 개선해주진 않는다. 단, 몰랐던 스케일의 시야를 경험함으로써 다른 세계 하나를 가져다준다. 그렇게 극복해나갈 수밖에 없다. 아이들에게 아첨하는 책을 만들지 않으려고 주의한다. 아이들도 그런 책엔 쉽게 질리더라.

-픽사, 지브리, 아드만, 얀 스반크마예르, 퀘이 형제 등등 애니메이션 명가, 명장 중에서 좋아하는브랜드가 있나.

=얀 스반크마예르를 압도하는 작품은 본 적이 없다.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너무 구구히 설명하는 걸 싫어하나보다.

-책의 물성을 기준으로 해보고 싶은 책을 묘사한다면? 예컨대 큰 책, 작은 책, 가벼운 책, 무거운 책, 보풀이 많은 책….

=투명한 책? 적어도 반투명한 책은 꼭 만들고 싶다. 아래 페이지가 비쳐나와 넘겨가며 이야기가 드러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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