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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x cross] “내 만화의 제1원칙은 재밌게 하는 것” - <무빙> 강풀 작가
이화정 사진 오계옥 2016-05-19

“다시는 이렇게는 안 하려고 한다.” 강풀 작가는 지난해 7개월간 하루 4시간 이상 수면을 취하지 못하고 <무빙> 연재에 매달렸다. ‘다음’에 연재한 <무빙>은 기존 작품들의 30회차를 고수한 연재분량을 깨고 45회차를 강행한, 강풀 작가로서는 최장기간 연재물이다. 마감의 고통이 길어진 사이, 그는 개인적으로 부친상의 아픔을 겪었고, 그 부재를 슬퍼할 틈도 없이 유명 작가라는 이유로 악플러의 인신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작가의 고통은 작품성과 반비례하는 걸까. 날 수 있는 능력을 감추고 사는 소년 ‘김봉석’의 성장기를 구심점으로 한 액션 활극 <무빙>은 여전히 분단 문제를 안고 있는 대한민국과 국가기관의 감시와 통제 속에 신음하는 야만의 현대사가 녹아 있는 수작이다. 지난가을 마지막 연재를 끝으로, 12번째 단행본 <무빙>을 출간하기까지 강풀 작가는 어떻게 ‘무빙’하고 있었을까. 고돌이와 청운이, 고양이 두 마리가 사는 성내동 작업실을 방문했다.

-<타이밍> <어게인>에서 이어진 ‘미심썰’(미스터리 심리 썰렁물)의 본격적 전개다.

=처음엔 마냥 히어로물이 하고 싶었다. ‘하늘을 날고 싶은 아이가 있는데 몸이 무겁다. 그러다 배변으로 몸이 가벼워져서 날 수 있다’, 이런 단순한 설정에서 시작했다. <타이밍>이 시간을 다루고 있다면, 이번엔 몸을 다루는 작품을 하고 싶었다. 연재는 7개월 걸렸지만, 남북 분단이라는 배경, 초능력이 유전된다는 설정을 더해 3년 동안 계속 다듬으면서 이야기를 발전시켰다. ‘한국형 히어로물’이라고 하는데 한국형이라는 말이 뭔지는 모르겠더라. <무빙> 속 인물들의 능력치는 마블 캐릭터들의 전지전능한 능력이 아니라 남들보다 조금 뛰어난 능력, 조금 자유롭게 뻥을 칠 수 있는 정도였다.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가 주요 배경이다. 초능력자들을 감시하고 억압, 통제하는 시스템이라는 설정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비판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국정원 까려고 하냐”는 질문을 직접적으로 받은 적도 있는데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파헤쳐보자는 게 아니었다. 지금의 한국 현실에서 초인이 있다면 어디서 가장 관심을 가질까라는 생각을 발전시키다보니 안기부, 군부대가 나온 거다. 의미를 주는 측면에서라면 난 <26년>(2012)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내 만화의 제1원칙은 재밌게 하는 거다. 재미가 없었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정 조직이 거론되다보니 면밀한 사전조사가 더 요구되었을 것 같다.

=항상 사전조사를 많이 하지만 이번엔 더 철저하게 했다. 안기부 건물이 재밌게도 지금의 남산애니메이션센터 자리라 사진도 마음껏 찍었다. 강동구 선사고등학교의 전폭적인 지지도 받았다. 드론을 띄워 학교 전체 조망도 찍고 체대입시학원도 가봤다. 등장하는 배경 모두 실재하고, 관련 직종 사람들도 다 만나봤다. <시사IN> 주진우 기자의 도움도 받았다. 블랙, 화이트 요원 같은 만화 속 용어를 두고 유치하다는 댓글이 많은데, 정말 쓰는 용어다.

-공중부양, 상처치유능력, 스피드 등에서 능력을 감추고 있던 초능력자들이 모여 절대조직에 맞선다. 히어로물로서 구축해야 할 지점들이 명확하다.

=기존의 히어로물을 참조했다기보다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겠다’였다. 보통 히어로물을 보면 초능력자의 능력이 엄청나다. 슈퍼파워는 그리지 말자 싶었다. 아버지가 목사라 그런지 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데 가치를 두는 편이다. 각각은 뛰어나지 않아도 모이면 힘이 생기는. <이웃사람> 때도 <타이밍> 때도 그랬다. 물론 그 한계를 정하는 게 쉽지는 않더라. 저 정도면 건물 하나는 날려야 하지 않나 싶은 유혹이 생기는 거다. 문이 부서지는 정도에서 멈추었다. (웃음)

-김봉석을 중심으로 고등학교 아이들의 문제에 집중하다가, 그들의 부모 세대로까지 이야기를 확장한다. 거기서 독보적인 캐릭터가 등장한다. 바로 남편 없이 묵묵히 소년 김봉석을 키우던 엄마(정보분석관 이미현) 능력자다. 후반부의 주요 액션 신을 모두 이 캐릭터에 할애한다.

=딸이 4살이다. 어떻게 내게서 이런 딸이 나왔을까 싶을 정도로 예쁘다. 다행히 엄마를 꼭 닮았다. (웃음) 그런데 사랑하는 것과 육아는 별개더라. 연재하는 게 너무 두려운데, 육아를 하면 차라리 마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봉석이 엄마처럼 뛰어난 능력자이고, 재능이 있는데 육아 때문에 사회활동에 제약을 받는다. 유전이라는 설정 때문에도 꼭 필요한 존재였지만, 내가 딸을 키우지 않았다면 분명 지금보다 약화됐을 거다.

-애초 계획한 어두운 결말을 긍정적인 톤으로 바꾸기까지에는 사정이 있었다. 지난해 아버지의 작고가 작품 내외적으로 깊숙이 영향을 미쳤다.

=나는 연재 전에 마지막 화까지 대사가 안 나와 있으면 아예 안 들어간다. 다른 만화가보다 그림이 약하기 때문에 이야기까지 약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왔고 그래서 이야기에 많이 집착하는 편이다. 그런데도 <무빙>은 처음으로 결말을 바꾼 작품이다. 원래는 훨씬 어두운 결말로 설정했었다. 내 작품엔 늘 착한 사람만 나오다보니 내가 매너리즘에 빠진 건 아닌가, 이번 작품에서는 그런 착함을 좀 탈피하고 세게 가자는 생각을 한 거다. 그런데 연재 도중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암투병 중이셨지만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몰랐다. 우울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더라. 원래 결론도 속편을 위해서는 나쁘지 않았을 것 같지만, 가족적인 지금의 결론도 후회하지 않는다. 다음에 죽이면 되지 않을까. (웃음)

-부고로 인한 2주간의 휴재를 두고 가한 악플사건은 우리 사회의 미성숙함을 보여준다. 힘든 상황에서 고소라는 강경책으로 대응했고 그 결정에 응원의 시선이 많았다.

=‘건드리면 짖는다’는 걸 보여주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이렇게 긴 시간이 걸릴 줄 몰랐다. 하지만 앞으로도 가족을 향한 공격에는 단호하게 대처하려고 한다. 부모님 모두 내 만화를 보셨다.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 어머니가 댓글을 다 보셨을 텐데, 차마 뵐 면목이 없더라. 웹툰 작가 중 악플 때문에 연재를 그만두거나 정신과 상담을 받는 친구도 있다. 다들 변호사 선임도 힘들고, 앙심을 품으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에 참고 넘어가는 편이다. 2003년부터 이 일을 시작하면서 웹툰계의 시조새, 조상님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오래 활동해온 만큼 온라인 문화는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웬만한 것은 눈 감고 그냥 넘어가는데 아버지를 공격하는 건 못 참겠더라. 나서야지 싶었다. 분노와 함께 내가 이 분야의 선배라는 책임감도 더해지더라. 트위터에 고소 사실을 알리니 순식간에 청정지역이 되더라. 정말 하루 만에 그렇게 극악스럽던 악플러들이 다 사라졌다. 이럴 거면서 뒤에 꼭꼭 숨어서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내뱉었나. 한편으로는 허탈하기도 했다.

-작품이 영화화되는 게 기정사실 같지만, 이번처럼 연재와 동시에 영화화가 궁금해지는 경우도 없었다. 많은 이들이 연상하고 시도했던 ‘한국형 히어로물’이다. 탐내는 곳이 많았을 것 같다.

=여러 곳에서 제안이 뜨거웠던 작품이다. 많이들 하고 싶어 하시더라. 이번에도 <바보>(2008) 때 알게 됐던 유재혁 대표와 하게 됐다. <이웃사람>도 함께했고 워낙 친하기도 하다. <마녀>도 그와 작업하고 있다.

-<바보>와 <이웃사람> 스코어가 좋지 않았으니 원작자로서 다른 선택을 하고 싶은 욕심도 발동하지 않았나. (웃음)

=정확히 그 반대다. 나는 그런 경우에 “이번엔 잘해봐” 하고 등 두드려준다. <순정만화>(2008)로 알게 된 이군선 대표와도 <26년>을 함께 했다. 같은 조건으로 제안이 온다면 내 기준은 이왕이면 아는 사람과 하자는 주의다. 요즘은 원작 하나에 방송국이나 영화사가 너무 많이 붙기도 하고, 중국 시장은 너무 커져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고, 너무 많이 준다고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믿음이 안 간다. 그래도 내가 오래 원작 계약을 해봐서 그런지 사람들이 그냥 경쟁적으로 판권을 사놓기만 하려는 건지 진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건지 구분은 가더라. 정말 영화를 하고 싶은 사람들과 계약하고 싶다.

-영화화되는 과정에 전혀 관여를 안 하는 건 익히 알고 있다.

=나는 원작자로서 역할을 다한 거고, 영화는 영화를 만드는 분들이 하는 거라는 생각이 확고하다. 가끔 캐스팅 의견을 물어 의견을 주긴 하는데 거의 반영된 적이 없다. (웃음) 내가 영화계 물정도 모르고. 그런 면에서 이번에 좀 변화가 있었다. <무빙>과 함께 <타이밍>도 실사영화로 제작 진행 중인데, 이번엔 한 가지 단서를 달았다. ‘주인공은 절대 죽이지 말아달라’는 거였다. 계속 이 이야기를 할 거라서 몇몇 인물은 영화에서도 죽이면 안 된다고 했다. 지금은 조연 역할이지만, 전개하면서 더 큰 역할을 맡길 거다. 가령 치킨집에 들어간 남자는 나중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로 그려질 거다.

-시즌제로 가는 힌트인가.

=아직은 모르겠다. 올해 9월, 10월쯤 새 연재를 시작한다. <무빙>과 연관성이 있을 것 같다. 앞으로 그릴 모든 주인공은 지금까지 나온 작품 중 하나에서 찾을 거다. 지금 내가 43살인데, 점점 체력적으로 한계를 많이 느낀다. 연재할 때는 하루를 정말 1년처럼 써야 한다. 그러니 이렇게 힘들게 할 바에는 내가 재밌어하는 걸 하자는 생각이었다. <타이밍> 그릴 때 정말 재미있어서 초능력자 나오는 이야기를 계속 해보고 싶더라. 앞으로 순정물을 하더라도 <타이밍>이나 <무빙>에 나온 초능력자들이 나오게 하고 싶다.

-<마녀>는 김대우 감독의 영화화와 동시에 중국의 화책연합에서 드라마로도 기획되고 있다. 중국, 일본에서 한국 웹툰의 수요가 늘고 있다.

=출판만화 시장이 주춤하고 인터넷 만화가 자리잡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변화가 더 빨라졌다. 나는 정말 인터넷 만화 초창기에 운좋게 첫차를 탄 사람일 뿐이다. 시장의 변화를 나도 감지하지만 뚜렷한 대책, 그런 건 없다. 작가 입장에서는 열심히 콘텐츠를 생산하는 게 방법이다. 누룩미디어(박철권, 양영순, 윤태호, 강풀 작가가 설립한 만화전문 에이전시)를 만든 것도 만화에만 집중하고 싶어서였다. 판권 계약으로 시간을 쏟다보면 작업 시간이 그만큼 줄어든다. 그러니 도움을 받게 됐다. 모두 결정에 따르겠다에서 이제는 전문가에게 판단까지 넘겨버리기도 한다.

-이승환, 류승완, 김제동, 주진우로 뭉친 일명 ‘성내동 아저씨들’ 활동상은 여전히 활발하다.

=뭔가 언론에 착한 일 하는 집단처럼 거창하게 소개됐는데, 절대 아니다. 다섯명이 그냥 노는 거다. 맛집 찾아다니고, 집 앞 벤치에서 맥주 마시고. 만나면 서로 자기가 더 많이 말하려고 경쟁한다. (웃음) <26년> 때 이승환 형을 처음 알게 됐고, 내가 따로 류승완 감독을 알면서 그걸 고리로 다 같이 친해졌다. 김제동은 집이 좀 멀지만 워낙 외로워서 멀어도 우릴 찾아오는 거고, 주진우 형은 전국을 다니는 분이니 우리가 어디 있든 온다. 이 나이에 여기서 내가 막내다. 가족을 제외하고 함께 일하는 만화가를 빼면 가장 많이 만나는 친구다. 각자 다 다른 일을 하고 일적으로 묶여 있지 않으니 더 좋다. 인터뷰하면서 형들 이야기한 거 알면 또 혼날 텐데. (웃음)

야만의 현대사가 녹아든 수작, <무빙>

다음 웹툰 연재 당시부터 신선한 소재의 장편으로 주목받은 강풀 작가의 첫 번째 액션만화 <무빙>이 다섯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액션만화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강풀 특유의 따뜻한 시선과 한국 현대사를 바라보는 그만의 관점은 더 생생하게 액션 속에 살아 있다. ‘한국형 어벤져스’라는 별명에 걸맞은 주인공(하늘을 날아오를 수 있는 봉석, 무한한 상처 치유 능력이 있는 희수, 가공할 만한 펀치력과 점프력을 가진 강훈)이 등장하지만 하나하나 들여다본 이들의 일상은 히어로와는 거리가 멀다. 독특한 상상력, 생동감 있는 캐릭터 구축, 긴장감 넘치는 전개, 허를 찌르는 반전, 그리고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믿음을 바탕으로 한 스토리텔링으로 매 작품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 강풀 작가는 과거와 현재, 부모와 아이들의 이야기를 솜씨 좋게 직조하며 또 한편의 멋진 ‘강풀표’ 작품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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