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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아가씨> 본격 스포일러하는 인터뷰 - 박찬욱 감독에게 묻다
김혜리 사진 백종헌 2016-06-06

이렇게까지 명랑하고 통쾌할 줄이야. 새침하면서도 가차 없는 이야기일 거라고는 어렴풋이 짐작했다. 에로틱한 영화가 될 거라는 점은 확신했다. 그런데 <아가씨>의 서슴없는 관능성은 천연덕스런 순진함과 맨살을 맞대고 있다. 우는 아기를 술 한 모금으로 취하게 만들어 잠재우고, 막대사탕으로 키스의 기술을 마스터하는 극중 일화처럼 말이다. 산전수전 겪고 나름 교묘한 계획을 세웠던 주인공들은 모든 적신호를 무릅쓰고 사랑에 빠진다. 아니, 사랑이 그 잘난 프로젝트들을 거꾸러뜨린다(이 점은 준주연인 백작과 코우즈키 경우에도 얼마간 적용된다). 그런데 그 사랑이 훨씬 교묘한 책략까지 선사한다. 이보다 만사형통일 수가 있을까. 성인을 위한 환상적 동화라고 불러도 거리낄 것이 없다. <위험한 관계> <도브> 등 남녀 세 사람의 조합이 음모로 출발해 진심에 부딪히는 이야기는 많은 영화에 쓰였다. 위의 영화들이 반성적 파국으로 귀결된다면 <아가씨>는 사랑의 혁혁한 승리담이다. 리들리 스콧의 <델마와 루이스>,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디아볼릭>이 비교대상으로 소환되는 까닭이다.

<아가씨>는 들려주고자 하는 바를 거의 남김없이 시각화하는 영화다. 박찬욱의 전작들에 비해 균열 내지 숨은 이면은 없다시피 하다. 이 영화를 관람한 당신이 흡사 팝업북 한권을 읽은 기분이라면, 비단 화려하고 정교한 세트와 의상 때문만은 아니다. <아가씨>는 책을 읽는 독자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대로 편지의 화자를, 낭독의 내용을 진행하는 화면 안에 주저 없이 불러들인다.

3부 구성이 관점의 주인을 명시하고 있지만, 동일 숏 안에서도 널찍한 공간을 도는 능청스런 무빙을 통해 카메라 내 편집을 수행하는 촬영은 상황과 공간의 주인을 수시로 바꿔놓는다. 그녀들의 공간인가 싶으면 지배자가 드러나고, 다시 그것을 조망하는 관찰자가 있다. 펼쳐진 페이지를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스토리의 임자가 바뀌는 팝업북의 즐거움과 같다. <아가씨>에 관해 <씨네21>은 100호 이후 여러 차례 인터뷰를 게재했다. 이번에는 <아가씨>를 이미 관람한 관객을 대표해 박찬욱 감독에게 궁금증을 털어놓고 친절한 답을 얻었다.

-막상 <아가씨>를 보고나니, 톤이 역사적 판타지, 동화적인 모험담에 가까워 놀랐다. 인물의 심리보다 이야기 자체의 속도와 위트가 부각되고 코미디도 무척 많다. 촬영 전 인터뷰에서는 코믹한 대목이 많은 영화는 아니라고 했었는데, 도중에 변화가 생긴 건가.

=의도는 원래 있었지만 강도의 차이는 생겼다. 현장에서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유머의 가능성이 보일 때마다 흘려보내지 않고 약간 더 파고든 결과다. 하정우의 백작 역에는 처음부터 유머를 기대했지만, 숙희 역의 김태리에게서 예기치 못한 표정들을 많이 봤다. 예를 들어 히데코(김민희)가 숙희에게 신발이 그득한 장을 보여주며 “난 갈 데가 없잖아”라고 설명하는 장면을 보자. 숙희가 “응? 갈 곳이 없는 게 왜 신발이 많은 이유지? 반대 아냐?” 하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나 혼자 웃는 대목이다. 장갑 서랍을 하나씩 열어 보이며 꼬박꼬박 아가씨 눈치를 살피는 숙희 얼굴도 무척 귀엽고, 엉엉 울다가 갑자기 멈추고 궁금한 거 물어보는 순간도 정말 사랑스럽게 웃겼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처럼 책의 포맷을 직접 따오진 않았지만, 제1, 2, 3부의 중간 제목을 넣은 점도 그렇고 콤팩트한 이야기책을 읽은 인상이다. “성인을 위한 페미니스트 동화”라고 소개해도 어색하지 않다.

=그런 생각도 있었다. 영화 시작과 끝에 책 표지를 열고 닫는 형식을 써본 적도 있다. 앞부분에서 히데코가 낭독하는 책의 정사 묘사를 나중 장면에서 한국말로 바꾸어 숙희의 목소리로 다시 읽는 버전도 한때 있었다.

-방금 언급한 장면은, 히데코를 소외시키고 착취한 에로틱한 텍스트를, 주체적 쾌락의 텍스트로 전유(專有)한 설정이라 통쾌함을 준다. 히데코가 남자들의 관음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억지로 낭독했던 묘사를 두 여자가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 실천하자 의미가 전도된다.

=관객이 그런 점을 알아줘서 고마웠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는 한 여성 스탭이 관객이 불쾌해하지 않겠냐고 염려하기도 했다. 착취자인 코우즈키(조진웅)가 읽도록 강요한 내용을 주인공들이 답습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하지만 영화제뿐 아니라 배급 시사 관객도 우리가 의도한 설정을 파악하더라. 섹스 장난감인 방울과 어린 히데코를 체벌하던 문진의 생김새가 유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 어느 역관에 관해 이야기해보죠.” –백작

-도입부를 따라가기 만만치 않다. 화면은 익숙하게 보아온 일제강점기 가난한 조선인들의 애환인데, 한발 들어가보면 실상은 딴판이다. 길 떠나는 숙희에게 애틋하게 건네지는 머리꽂이의 용도도 엉뚱하고 “그 왜놈 집엔 내가 가야 하는데!”라는 끝단이의 대사도 위로가 아니라 진짜 부러워서 하는 소리다. (웃음)

=도입부 연출은 전형적인 오도(誤導)다. 일본 사람 첩으로 팔려가는 것도 같고 위안부로 끌려가는 것도 같은 오프닝이고, 숙희가 코우즈키 저택에 들어갈 때에는 영화 <레베카> 같은 고딕 호러다. 음악도 음산하고 거대한 초상화가 내려다본다. 눈치 못 채는 관객이 많겠지만 이때 숙희의 시점숏으로 보이는 어린 히데코의 그림 속 얼굴이 살짝 움직인다. 그런데 나는 이 오프닝이 오도이면서 오도가 아니라는 점이 좋았다. 진실은 사기치러 들어가는 것이라 해도, 식민지 시대 가난한 조선인 여성이 돈이 필요해 일본에 귀화한 조선인 부잣집에 들어간다는 계급 관계는 여전히 사실이다. 호러적인 분위기도 속임수라면 속임수지만, 무섭건 행복하건 간에 깜짝 놀랄 미래가 펼쳐진다는 점은 그대로다.

-백작이 사기 계획을 브리핑하는 장면도 관객에게 다소 벅찬 속도로 정보를 늘어놓는다. 멀티태스킹 연기에 능한 하정우 배우를 염두에 둔 것인지.

=캐스팅 전에 각본을 썼으니 그건 아니다. 그 장면에서는 음모도 음모지만 상속녀, 결혼, 정신병원 같은 키워드만 전달되면 족하다. 그보다 코우즈키라는 인물의 배경을 설명하는 것이 긴요했다. <아가씨>는 시대배경이 내러티브에 중요하지 않아 보일 수도 있지만 내겐 시대가 중요했다. 밀수품으로 고관대작의 통역을 부정하게 따내고 한일합방에 공을 세우고 그 대가로 따낸 이권을 통해 부자가 된 인물이 코우즈키다. 한데 그가 돈을 모은 이유는 책 수집이다. 즉, 코우즈키는 중인 출신인데 근대로의 이행기에 부호이자 지식인으로 신분이 바뀌었으며 취향에 지배당하는 ‘덕후’이기도 하다. 여기서 백작의 연기는 마치 투자사 앞에 영화를 피칭하는 것과 비슷하다. “어느 역관에 관해 이야기해보죠” 하면서 “이런 영화를 만들어볼까 합니다” 하는 거다. (웃음)

-요컨대 코우즈키는 ‘에로티카 덕후’다. 그런데 그는 책들의 위조본을 경매해 재산을 축적한다. 코우즈키의 최종목표는 돈인가, 책인가, 아니면 지위인가.

=좋아해서 팔고 싶지 않은데 더 좋은 걸 사려면 팔아야 하니까 애착하는 책을 위조하는 거다. 그러니까 책에 대한 욕망쪽이 돈이나 권력보다 우선이다. 코우즈키의 욕망은 정확히 말하면 책 자체보다 낭독회에 있다고 본다. 책을 팔아 독회 퍼포먼스의 밑천을 마련하는 거다.

-원작인 세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와 비교하면 결정적 변화는 두 가지다. 원작에서 찰스 디킨스적인 세계를 가장 많이 반영한 복순네 보영당 사람들 분량을 도려냈고, 2부 중간에 두 주인공이 진실을 서로 실토해 3부는 온전히 두 여자가 의기투합한 모험으로 펼쳐진다. 두 선택의 목표는.

=작가의 의도도 그랬겠지만 <핑거스미스>는 배경뿐 아니라 디킨스 시대 통속소설의 형태까지 물려받고 있다. 그래서 출생의 비밀 같은 구닥다리 장치도 거침없이, 그리고 정당하게 사용한다. 나 역시 그런 소설의 독자답게 손에 땀을 쥐며 읽었다. 그런데 원작의 결말은 나의 소망과 달랐다. 그래서 영화는 보고 싶은 대로 썼다. 두 여자가 함께 뭘 신나게 하는 모습을 좀더 보고 싶었고 백작을 이용해 코우즈키까지 정리해버리도록 하고 싶었다.

-숙희의 관점으로 1부에 한번 본 이야기를, 히데코 관점으로 재방문하는 내용이 있는 2부는 자칫하면 1부에 화음을 넣는 성부가 되거나 퍼즐을 맞추는 기능이 부각될 수 있다는 고민은 없었는지.

=2부도 숙희가 히데코의 하녀로 도착하기 전후로 나뉜다. 히데코의 성장기와 백작과 히데코의 사전 모의를 그린 과정은 2부에서 처음 나온다. 애초 히데코 아역이 셋이었는데 조은형 배우가 얼굴도 표정도 너무 좋아서 다들 돌려보내고 세 연령대를 혼자 연기하도록 했다. 어째서 아이한테서 이런 표정이 나올까, 사연이라도 있나 궁금했는데(웃음) 알고 보니 언니, 오빠와 터울이 어마어마하더라. (태블릿을 꺼내 기자에게 세트에서 찍은 조은형의 평소 모습과 몇초 후 히데코 역할로 스탠바이한 상태를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그리고 2부 중 백작이 처음 참석한 히데코의 낭독회 장면은 연기를 포함해 이 영화에서 제일 잘 찍힌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가 씻기고 입힌 것들 중에 저보다 고운 것이 있었나?” –숙희

-<아가씨>는 대사가 유려하다. 문어적이면서도 유머는 모던하다. 보통 한국영화에서 ‘잘 쓴 대사’라고 하면 생활성과 생생함이 압도적으로 중요한 가치로 평가된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한국영화 대사에 문학성이 결핍된 것도 사실이다.

=내가 늘 가졌던 아쉬움이었다. 조금만 문학적 수사나 점잖은 완곡어법으로 상반된 내용을 전달하는 대사를 구사하려면, 천생 현대를 떠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언젠가 사극을 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것이 이유일 거라고 생각해왔다. <아가씨> 시나리오를 쓸 때도 염상섭, 채만식 소설을 참고하며 썼는데 막상 해보니 고풍스러운 말투를 자막 없이 현대 관객이 이해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 어려웠다. 옛 말투가 급격하게 사라지고 예전 문학을 열심히 가르치는 사회도 아니니까. 한국어는 아니지만 서재에서 백작과 코우즈키가 대화를 나누고 히데코가 엿보는 장면은 돌려 말하기의 묘미를 살려보려고 노력한 장면이다. 연미복을 차려입고 거드름 피우면서 대화하고 있지만 말의 내용은 역겹다. 편집에서 삭제 위험이 가장 큰 신이기도 했는데 내가 좋아서 고집했다.

-숙희는 도둑이고 어린 여자지만 모성애가 강하다는 특이점이 있다. 소매치기 시절에도 일본에 팔아넘길 아기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젖을 주고 싶어 한다. 히데코에 대한 감정도, 그녀를 자신의 아기처럼 느끼는 것이 결정적 계기다. “이 딱한 것을 보고 있으니 내 마음이 편찮다” 같은 할머니 말투는 영락없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영군이랑 닮았다. (웃음)

=이 영화를 보러올 때 갖고 오는 선입견에서 조금씩 다 어긋나길 바랐다. 어린 여자 캐릭터고 귀엽고 젊은 여배우가 연기하니까 당연히 이러저러한 성격과 연기이겠거니 예상하는 바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이가 적다고 모성을 드러내지 말란 법도 없고, 더구나 히데코는 현실에 무지한 아기 같은 면이 있으니 충분히 가능하다고 봤다. 동성애 관계에 대해서도 “누가 남자 역이야?” 같은 질문의 선입견을 완전히 흐트러뜨리고 싶었다. 남자, 여자의 역할 분담 프레임이 둘의 관계에는 아예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했다. 남성적인 것이 뭐고 여성적인 것이 뭔지 질문하게 만드는 거다. 담을 넘을 때 씩씩하게 상대를 끌어올려주면 남성적인가? 남장을 하면 남자 역인가? 능동적인 것이 남성성이라면 여성적인 건 반대겠네 하는 고정관념도 없어져야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했다.

-남장을 하는 캐릭터가 시나리오와 다르다. 현실적 이유에서였나.

=김태리에게 남자 옷을 입히니 동안이라서인지 학예회에서 엄마아빠 놀이하는 것 같았다. 콧수염도 붙여봤지만 사태만 악화됐다. (웃음) 하지만 말한 대로 굳이 어느 쪽이 꼭 남장을 맡을 이유가 없으니 결과적으로 더 잘된 것 같다. (조선인인데 일본인연한) 백작의 여권을 도용하는 사람이 히데코라는 점도 재밌었다.

-제작 전 인터뷰에서 숙희와 히데코의 관계에 원작보다 많은 장애가 가로놓여 있다고 설명했다. 1930년대 조선과 연관해 나타나는 계급, 민족, 문화, 나이 차가 그것이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니 상전과의 사랑이라거나 여성끼리의 사랑이라는 점은 극중에서 거의 고민이나 논란거리가 되지도 않아 흥미롭다. 변호하거나 합리화하는 과정을 건너뛰고 “당연한 것 아니야?” 하는 투의 연출이다.

=내겐 그것이 무척 중요했다. <아가씨>는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맞서 싸우는 퀴어영화는 아니다. “우리 사랑을 인정해주세요”가 아니라 “당연한 건데 뭐가? 왜?” 하는 식으로, 굳이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노멀한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런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그동안 동성애 문제를 전투적으로 다루고 차별에 맞서 싸운 노력들이 있어서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이런 영화가 투자를 받고 스타가 출연하진 못했을 것이다.

집이 너무 커서 미쳤나?” –숙희

-판타스틱 동화 같은 무드에는 미술적 요소가 기여한다. 코우즈키 저택이 혼합 양식일 거라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서양식과 일본식, 한식 건물이 덩어리째 연결돼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다른 문화가 혼재하던 시기임을 직설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과장인가.

=천장은 양식으로, 바닥은 일본식으로 섞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는 첫째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둘째 국적 불명의 괴상한 스타일은 역겹기만 할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상한 것, 낯선 것이지 추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일본에서 양관과 화관이 붙어 있는 집을 딱 한 군데 찾아 찍었지만 양관 건물 외관이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CG로 수정했고, 대신 화관은 그대로 잘 썼다. 한편 별채에 코우즈키가 꾸민 서재는 그의 모든 것이 망라된 일종의 낙원이다. 서고는 영국식 도서관풍이고 중간의 넓은 다다미 공간을 지나면 도코노마식 무대가 있다. 화식과 양식 건물을 오갈 때 인물들이 신을 벗어다 신었다 하는데 그런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 부자들의 방식이라고 봤다.

-코우즈키가 조선의 미감을 멸시하는 인물인 점을 고려하면 아무리 하인의 거처라고 해도 조선식 건물을 경내에 둔 점이 의아했다.

=민속촌의 양반 가옥에서 찍었다. 우리끼리는 그 집이 출세하기 전 코우즈키가 조강치처와 살았던 집이라고 상정한 거다. 초라한 과거와 화려한 현재의 격차를 매일 보며 만족하는 것이다.

-총독부의 전기를 끌어다 쓰는데 종종 정전이 된다. 뱁새의 가랑이가 찢어지는 상황인가.

=비슷하다. 외딴 산속에 자리한 저택인데 전기를 끌어다 쓴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특혜가 아니다. 그런 특권을 누리면서도 코우즈키의 삶과 존재 자체는 가짜이므로 어쩔 수 없는 어설픔이 드러난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는 세트의 지분이 70%라고 말했는데 영화를 보니 더 많은 것 같다. 일단 방들이 무척 커 보인다. <스토커>가 문설주나 벽의 구획을 걸고 찍었다면 이번에는 무빙으로 재프레이밍을 많이 한다. 애너모픽렌즈를 채택한 점과 세트 크기가 관계가 있나.

=서재는 코우즈키의 우주이기 때문에 인물을 압도할 만큼 커야 한다고 처음부터 주장했다. 그보다 작았으면 슬펐을 것 같다. 독회에 참석한 손님들이 앉아 있으면 왜소해 보일 정도다. 류성희 미술감독이 다 지어놓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건, 너무 큰가요?”라고 묻더라. (웃음) 서재는 <암살>의 미쓰코시 백화점 내부를 지었던 안성 동아방송대 세트장에 지었다. 특히 낭독 공연이 있을 때 다다미의 일부를 걷어내 실내 정원으로 변형하는 안이 류성희 미술감독이 마지막에 낸 신의 한수였다.

-자연을, 코우즈키가 동경하는 일본을 집 안에 만든다는 의미였나.

=여러 차원에서 볼 수 있겠지. 일본 미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정원을 끌어들인 것이다. 일본 정원은 바위로 산을 표현하고 물로 강을 표현한 우주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안압지인 줄 알았다. (웃음) 말이 서재지 일본식 인형극 극장으로 보이기도 한다.

=도서관이자 정원이고 극장이다. 바닥을 열면 지하 공간으로 내려가는 문도 나오고. 원래는 히데코의 보이스 오버로 “이모부는 서재를 가두어진 세계라고 불렀다”는 대사가 있었는데 지나치게 설명적이라 판단해서 뺐다.

-낭독은 영화적으로 흥미롭기 힘든 활동이다. 원작을 읽으면서 제일 영화적이지 않은 장면을 제일 화려하게 연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닌가.

=아주 음란한 내용을 모두가 잔뜩 점잔 빼고 앉아서 즐기는 광경이 재밌었다. 그러면서도 남자들은 다다미 너머에서 몇겹의 기모노를 껴입은 히데코와 거리를 유지하며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다. 음란성은 언어로만 전달되고 상상 속에서 전개된다. 그리고 덕분에 이야기의 내용은 한층 음란해질 수 있다. 그래서 성기를 포함해 보통 영화에서는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단어들이 극중에 난무한다. 인형과 체위 시범을 보일 때도 옷을 입은 채다. 제작진 한명이 노출하는 장면 아니었냐며 촬영날 놀라더라. 바로 그 점이다. 자세가 중요하지 노출은 필요하지 않다.

-방금 설명한 에로티시즘에 대한 <아가씨>의 접근법과 관련해 영화 결말부에 등장하는 지하실의 소품들은 영화 전체의 스타일과 어긋나 보여 조금 혼란스럽다.

=카메라 포커스를 맞춰 자세히 보여주지도 않았으니 감춰진 컬렉션, 배경의 소품 정도라 여겨달라.

-독회에서 읽히는 텍스트 중 <금병매> <줄리엣: 악덕의 번영> 정도만 짐작이 가는데.

=실제 <줄리엣: 악덕의 번영>이 아니라 사드풍으로 다른 작가가 쓴 작품이라는 언급이 대사에 있다. 독회에서 읽힌 글은 우리가 꾸며내서 고쳐 쓴 것이라 원안 텍스트가 무엇이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영화의 안타고니스트인 이모부 코우즈키는 인물로서는 다소 희화화된 느낌이라 그의 소유물인 집 자체가 악역으로서 더 위협적이었다.

=제3부에서 코우즈키의 모습을 말하는 건가. 거기에 이르면 코우즈키는 이미 악당이라기보다 조바심 난 늙은이일 뿐이다. 서재가 파괴됐을 때 그는 함께 파괴됐고 행색도 망가진다. 악당으로서의 압도적인 기운이 아니라 어떤 인간인지를 기준으로 말하면 충분히 어떤 인물인지 표현됐다고 본다.

-소품 가운데 히데코가 자라면서 작아진 구두들을 모아놓은 신발장은, 원작에 없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스토커>에서 주인공 인디아(미아 바시코프스카)가 해마다 생일 때 선물 받았던 구두를 연상시킨다. 왜 또 구두인가.

=모르겠다. 그건 나뿐 아니라 정서경 작가의 취향이기도 하다. <스토커>의 초고는 웬트워스 밀러가 썼지만 구두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정서경 작가와 내가 같이 더했다. 성장하면서 바뀌는 물건으로는 옷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신발은 조그맣게 한 켤레로 성장의 흔적을 한눈에 보여주지 않나.

-소설에서도 중요한 장갑 서랍장은 예측했지만 정말 켤레 수가 많더라. 그러고보니 <올드보이>에서 비슷한 셔츠가 줄줄이 걸린 우진의 옷장 이야기를 하면서 류성희 미술감독이 “비슷한 물건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감독님이 풍요와 부의 표식으로 여기는 것 같다”는 말을 했었다.

=그럴 수도 있다. 남이 보기에 똑같아 보이는데 미묘한 차이로 구분 짓는 것이 사치의 징표니까. 예를 들어 똑같은 색 단추인데 재질이 진주냐 상아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옷이라고 여기는 거다. 그런데 <올드보이>는 아마 소품 대여비용 때문이었을 거다. (웃음)

-영화 내내 집에 거의 해가 들지 않는다. 밤이거나 비가 오지 않으면 기껏해야 흐린 정도다.

=원작에서 가져온 몇 안 되는 대사 중 하나가 “이모부가 책이 상할까봐 햇볕을 금지했다”라는 히데코의 말이다. 정서경 작가가 빼놓았는데 내가 도로 넣었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히데코

-앞서도 김태리 배우의 활력에 대해 언급했다. 영화를 보니 촬영 전 감독이 예측했던 장점이 거의 적중한 것 같다. 그 밖에 작업 도중 발견한, 배우로서의 장점이 있다면.

=대학 4년 동안 연극반이었고 졸업 후에도 3년 동안 무대에 서와서 발음이 정확하고 분명하다. 징징 울면서 말하는 장면에서조차 전달이 확실하다. 분명하고 똑 부러진 스타일이라 군소리가 필요 없다. 연기가 미흡해서 한 소리 들을 경우에도 변명 따윈 없었다. “알고 있는데 잘 안 되네요. 죄송합니다” 하고 돌아서서 혼자 주먹을 꼬옥 쥐는 스타일이다. 영화에 히데코가 설렁줄을 잡아당기는 데도 심술이 나서 미적이다 뒤늦게 사과하는 장면 있지 않나? “너무 늦게 오셔서 잠들었나 봐요. 죄송합니다”라는 대사를 하는 숙희가 현장의 김태리와 많이 닮았다. (웃음)

-<아가씨>의 연기는, 인물들이 모두 상대를 속이고 있는데 모두 거짓은 아니라는 점이 관건이다.

=그 문제는 사실 간단했다. 배우들에게 “속이고 있다고 생각지 말자”고 했다. 정황을 자꾸 고려하면 이중삼중으로 생각이 많아져서 연기를 할 수가 없다.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의 매력일 수도 있는데 관객이 그렇게 볼 뿐 배우들은 정말 사랑하고 질투하는 것처럼 다 한다. 예를 들어 백작이 히데코가 차려입은 모습에 감탄하며 의자를 자빠뜨리는 (과장된) 순간에도 진실이 있다.

-그래서 히데코가 숙희에게 하는 첫 부탁이 인상적이다. 속이러 온 걸 뻔히 알면서 “욕, 도둑질, 다 괜찮은데 나한테 거짓말만 하지 마”라고 굳이 꼭 집어 말하지 않나.

=숙희가 어떻게 반응하나 떠보려는 의도가 있는 거다. 어느 정도 인물인지 보자는 거지.

<아가씨> 촬영현장의 박찬욱 감독.

-문맹인 숙희를 놀리는 이름을 종이에 적어 눈앞에 들이미는 대목에서 <올드보이>를 기억하는 관객은 웃게 된다.

=2부에서는 그렇지만 1부에서는 가려져 있는 장면이다. 실은, 우리 아버지 글씨다. (웃음)

-히데코가 하는 말의 많은 수가 다른 인물들로부터 들은 말의 반복이다. 이 습성이 히데코의 성격이나 극중에서 그녀가 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면 무엇인가.

=우선 책을 읽는 사람이기 때문에 인용하는 버릇이 있고, 남의 말을 옮겨 쓴다는 점은, 아기처럼 의존적이면서도 냉소적인 성격의 소유자임을 드러낸다. 인물 관계도상으로도 히데코가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그녀가 제3자의 말을 반복하고 있음을 상대방은 모른다. 그런데 특별한 경우도 있다. “천지간에 아무도 없는 애”라고 숙희가 백작에게 히데코를 이르는 표현을 엿들었다가 밤에 당사자인 숙희에게 “천지간에 아무도 없는 나”라고 한탄하는 장면은 “내가 널 지켜보고 있음을 알아달라”는 은근한 의사표시이기도 하다. 결국 둘의 관계는 네가 먼저 고백하라고 재촉하는 ‘밀당’이기도 하니까. (웃음)

-<아가씨>는 남성성의 허장성세를 캐리커처화해서 놀리는 드문 코미디다. 이 점과 관련해 제대로 멋져 보이는 장면이라곤 하나도 없이, 우스꽝스러움을 포함한 초라한 면모를 성실하게 연기한 하정우가 대단해 보였다.

=워낙 본인이 멋짐을 연기하는 것보다 어수룩하고 허당스러운 면모를 드러내는 연기를 즐긴다. 숙희에게 “내가 그런 걸 구경만 할 것 같아? X년아!” 하고 욕설하는 신을 찍고 다 놓았다고 하더라. “이번 영화에선 글렀구나?” 같은 기분이었나? (웃음) 바지가 벗겨진 채로 손으로 머리를 받치는 장면에서 많이 웃는데, 사실 몸을 뒤집을 수도 없고 그 자세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공교롭게도 <선데이 서울>의 ‘저 오늘 한가해요’식 포즈 같아졌다. 그때 하정우가 짓는 너털웃음은 조롱당한 남성성에 대한 자조다. 하정우에게 감탄한 순간이 있다. 히데코를 겁탈하려고 하는 장면에서 백작이 “여자들은 억지로 하는 관계에서 극상의 쾌락을 느낀다”며 “지금부터 속옷을 찢겠습니다” 하는 대사를 한다. 원래는 “속옷을 찢을게요”였는데 찍기 직전 “찢겠습니다”로 바꿀까 했더니 대뜸 “좋죠!” 하더라. 얼마나 같잖은 대사인가. 그게 무슨 에티켓을 지키기라도 하는 것인 양. 책이나 야동에서 성을 배운 남자들의 무지다. 만약 하정우가 백작의 연기를 완전히 역겹게 했다면 당장 이해는 쉬웠겠지만 그건 좀 하수라고 봤다. 약간 불쌍하다고나 할까 잘못 길러지고 잘못 배워서 실패하는 보통 남자스럽게 그리는 쪽이 오히려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 점을 하정우가 너무 잘 이해하고 왜 이래야 하느냐, 너무한 거 아니냐 하는 반문 없이 잘 연기했다.

-백작은 보통의 조선 남자스러운 실패를 하는 딱한 인생인데 영화가 나서서 연민하지 않는 점도 적당했다.

=“그래도 자지는 지켜서 다행이다”라는 백작의 마지막 대사도 이렇게 끝까지 웃겨도 되나 싶어서 촬영 직전 뺄까 망설였더니, 대번에 하정우가 “왜요?” 하면서 눈을 휘둥그레 뜨더라. (웃음)

-영화 속 백작의 마지막 숏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마치 천경우 사진가의 인물사진처럼 얼굴의 초점이 흐리멍덩해지면서 퇴장한다. 다른 인물에게는 없는 숏이다.

=이유가 너무 단순유치해서 입에 올리기 참…. 글자 그대로 두 여자 입장에선 그가 안중에 없다는 의미다. (웃음) 이즈음에 이르면 백작은 뒤늦게 혹시 그녀들이 그런 관계였나 희미해지는 의식 중에 짐작하게 된다. 바보처럼….

“그렇게 황홀한 초야는 어떤 책에도 묘사된 적이 없었을 거예요.” –백작

-<아가씨>는 남자들의 섹스와 여자들의 섹스를 대비시켜 딱 잘라 한쪽은 부정적으로 한쪽은 긍정적으로 그렸다. 말하자면 남자들의 성욕은 착취, 소유, 물신숭배와 연결돼 있고 여자들끼리의 섹스는 서로를 행복하게 만들고 성장시킨다.

=그래서 이 영화가 칸 경쟁부문에 간 게 이상스러웠다. 단순논리니까. (웃음) 적어도 경쟁부문은 어울리지 않는? 하지만 난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오랜 숙원인가. (웃음)

=그런 관점을 취한 영화가 너무 없고, 말로 하는 것보다 영화로 볼 때 통쾌할 듯했다. 무엇보다 내가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 생각엔 대중영화란 의도가 아무리 선명하다 해도 내러티브, 미장센, 장르의 규칙을 통해 형상화를 거쳐서 그리고 이야기와 배우의 연기를 빌려 간접적으로 전달되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의도를 분석하려는 리뷰어들은 그것부터 추출하지만 관객에게는 자연스럽게 전해진다.

-어쨌든 박찬욱 감독의 객관적 조건은 시스젠더 남성 이성애자 연출자다. 게이인 토드 헤인즈도 레즈비언 멜로 <캐롤>을 찍을 때 생물학적 성이 다르기에 조심스러웠다고 한다. 섹스 묘사에 기울인 특별한 주의가 있나? 비슷한 맥락에서 논란이 됐던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베드신은 어떻게 봤나.

=<아가씨>를 준비하면서는 아니고 개봉 당시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봤는데 특별히 착취적이라고 느끼지는 않았다. <아가씨>의 베드신은 대칭성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고 싶었다. 특히 선실 신은 매우 의도가 뚜렷이 드러나는 앵글이다. 하녀와 상전, 남녀 역할 분담의 구도가 아닌 대등한 느낌을 주려고 했고, 가위 자세에서 맞잡은 손의 이미지도 대칭성의 맥락에서 중요했다.

-레즈비언 관객이 보기에 남성적 판타지로 보이는 면이 없는지 따로 검증하는 과정은 없었나.

=남의 의견을 묻진 않았다. 내 스스로 생각해봤다. 그렇게 비판받을 소지가 있는지, 혹시 내가 남성 이성애자로서 판타지를 투사했는지. (표현수위에 관해서는) 남성 감독만 관능성을 원하고 여성 또는 레즈비언 필름메이커라고 관능성에 무관심한 건 아니지 않나. 현장에서는 최대한 짧은 시간에 진행했고 세트에 촬영감독이 들어가지 않고 원격조정으로 카메라 한대를 바깥에서 연출했다.

-영화화를 결심하게 만든 원작의 요소 중 하나로, 히스테리를 통제하는 근대적 기관인 정신병원을 꼽은 바 있다. 그런데 완성된 영화에서는 히데코가 이성을 잃어가는 과정이나 정신병원 풍경이 간략하게 다뤄졌다.

=찍어놓고 뺀 부분도 있다. 결혼 후 머문 여관에서 히데코가 정원의 구덩이 같은 곳에 들어가 있는 장면도 있다. 마음 같아서는 시간을 들여 묘사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어렵고, 그 정도 장면으로는 어정쩡하다고 생각해 아예 생략했다. 정신병원은 각본 단계에서도 완성본이 표현한 정도만 썼다. 대신 2부에서 코우즈키가 아내(문소리)에게 정신병원을 위협적으로 묘사하는 장면이 의미가 있다. 사실이건 아니건 당대 사람들이 생각한 정신병원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말이다. 조진웅이 정말 잘했고 이 묘사는 나중에 히데코의 대사로 반복된다. 확장판(박찬욱 감독은 IPTV용 확장판을 편집 중이다. 감독판은 아니다.-편집자)에는 들어갈 것이다.

-관객으로서 1차 관람에서 가장 카타르시스가 컸던 신은 초야 신과 서재 파괴 장면이었다. 숙희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행동하는데, 책에 대한 경외감을 세뇌받은 히데코는 머뭇거린다. 서재를 어떻게 망가뜨리느냐의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었을 텐데 어떻게 정했나.

=불을 지를까 하는 안도 나왔지만 기술적으로 어려웠다. 돈도 많이 들고. (웃음) 실내 연못을 이용하는 설정은 전날에야 결정됐고 붉은 물감을 뿌린 건 예쁘기도 하고 선홍색의 선연한 느낌이 좋아서였다.

-칸국제영화제에서는 <아가씨>에 등장하는 문어와 신체절단을 두고 “이렇게까지 굳이 ‘박찬욱’의 인장을 넣을 필요가?”라는 우스개가 오가기도 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구상했는지, 찍는 과정에서 좋아하는 이미지로 회귀한 것인지.

=(웃음) 외국 기자들한테는 “이런 질문은 한국에서 절대 안 나온다. 아무도 <올드보이>를 떠올리지 않을 거다. 한국인은 문어와 낙지쯤은 구별할 줄 알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럼 질문을 바꿔서 꼭 두족류를 등장시키는 이유는. (웃음)

=앞서 영화에 나온 호쿠사이의 춘화 속에 문어가 나오기도 한다. 실제로 <올드보이>는 눈곱만큼도 생각 안 했다. 했다면 안 넣었을 거다. 거대한 문어가 나오는 춘화를 이번에 처음 보고 이만저만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닌데 나만 빼고 남녀노소 모르는 사람이 없더라.

-성인용 재패니메이션에는 촉수물이라는 장르도 있다고 들었다.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데몬러버>에서도 본 기억이 난다.

=오 마이 갓! 아무튼 나는 어린 히데코가 그만한 충격을 받기에 이 이상 무섭고 징그러운 것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보통 문어로 촬영해서 확대했다. 신체절단 고문은 코우즈키가 분풀이도 하고 히데코 일행의 행방을 백작에게 캐내기 위해 필요했는데, 공간에 제책 도구가 마침 있어서 썼다.

“괜찮으시다면 그 남자에게 제 말을 전해주세요.” –히데코

-승리의 세리머니 같은 주인공들의 정사가, 육지 모처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여행 중 이뤄진다는 점도 <아가씨>를 소원성취의 판타지로 보이게 하는 것 같다.

=여정 도중에, 이동하는 가운데, 섹스 중에 영화가 끝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처음부터 생각했다. 그들은 물에 떠 있지만, 안개도 끼고 파도도 그닥 잠잠하진 않다. 보통의 인생살이처럼 적당히 불투명한 상황이되 두 사람만의 세계는 완벽하게 자족적이고 외부 날씨에는 개의치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장난감을 써서 즐거운 놀이를 하는 것이다.

-박찬욱의 영화를 ‘복수 3부작’으로 묶기도 하고 ‘소녀 3부작’이라는 명칭도 나왔다. 그런데 <아가씨>까지 보고 나니 <친절한 금자씨>부터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스토커>까지 다섯 작품이 여성의 탈출기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더이상 “박찬욱의 여성 묘사는 이러저러하다”고 곁가지로 설명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현재 한국의 영화감독으로서 여성의 스토리를 중요하고 흥미로운 소재로 보는 것인가.

=거창하게 한국 사회까지는 모르겠다. 여성 이슈가 한국 사회에만 국한된 문제도 아니고 서구라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내 주요 관심사는 무엇인가를 깨뜨리고 담을 넘고 달려 꿈꾸는 다른 장소에 가기 위해 싸우는 이야기다. 그런데 시대적으로 그 주체가 여성일 때 더 흥미로운 시점이라고는 말할 수 있겠다.

-더불어 관객이 박찬욱의 영화세계를 생각할 때 즉각 떠올리는 색깔들을, 정서경 작가, 류성희 미술감독, 조상경 의상감독, 송종희 분장감독 같은 여성 전문스탭과의 지속적 협업과 분리시키기 어렵다는 생각도 들었다.

=네 사람은 최고의 실력자이고 더 나은 사람을 몰라서 함께 일해왔다. 어쩌면 남성인 나의 부족한 면을 메워주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작업 기간에는 가족보다 더 자주 만나고 일하기 때문에 내쪽에서도 영향을 안 받았다면 더 이상하다. 그 영향 중 여성적인 무엇이 있을 텐데 어떤 형용사로 표현할지는 모르겠다.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게 됐다는 말이 맞을 수도 있다. 내 안에도, 그녀들 안에도 다양한 면이 혼재한다. 사람들이 “이 대사는 정서경 작가가 썼죠?”라고 묻는 대사가 내가 쓴 경우도 많고 반대 경우도 있다. 내가 그동안 남자는 이래야 한다고 교육받고 내면화한 요소라든가 나 자신이 지닌 여성적 면모를 별로 자랑스러워하지 않은 것들이 여성 스탭들과의 작업을 통해 많이 계발됐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다음 영화는.

=<도끼>를 찍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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