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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택시 기사의 도(道)

<도쿄 택시> <황해> <다윈으로 가는 마지막 택시>

<도쿄 택시>

내가 다닌 고등학교 재단은 버스 회사였다. 그래서 수학여행을 남들 다 가는 제주도 대신 버스 타고 갈 수 있는 설악산과 서울로 가야 했지만(서울 구경이라니, 수치스러웠다) 그렇다고 버스 대여비를 안 받은 것도 아니었으니 대체 누구를 위한 수학여행이었는지 모르겠다. 선생님들도 제주도 가고 싶었을 텐데.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수학여행을 교복 입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럴 수도 있어, 근데 우리 학교는 교복이 가지색이지, 꿈돌이 보러 단체로 교복 입고 대전 엑스포 갔다가 우리가 구경거리 됐다고. 그 소식을 듣고 성난 소녀들은 주동자도 없는데 입실을 거부하며 운동장에서 생애 최초의 침묵 시위를 벌였고, 첫날만 교복을 입기로 재단쪽과 대타협, 그렇게 하나로 뭉친 민중의 힘을 경험했다고 믿었으나… 정말로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시골 버스 회사가 관광버스를 수십대씩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 당연히 버스가 모자랐다. 게다가 때는 봄날, 1년에 두번 있다는 버스 회사의 대목, 그래서 우리는 재단 소유의 좌석버스를 타고 서울로 갔다가… 왠지 모르게 국회의사당 앞에서 벨을 눌렀다. 교복을 입으라는 건 아이들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려는 고도의 술책이 아니었을까, 숱한 세월이 흘러 문득 감탄하고야 마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00시민들은 좌석버스 없는 2박3일 동안 뭐 타고 다닌 거지. 그런데 재단쪽이 구사한 고도의 술수는 아무래도 한 가지가 더 있었던 것 같다. 아주 당연하고도 단순하게 도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택시 기사의 일상을 담은 영화라고 믿었던 <도쿄 택시>를 보고 있을 때였다. 뭐야 저거, 택시 타고 도쿄에서 서울 오는 이야기잖아, 택시 타고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거였어? 카페리가 뭔지도 모른다고 순진무구한 시골 10대들을 농락하다니. 그러고 보니 고3 담임들, 입시 끝나고 포상 휴가로 하와이 갔었지, 그 회사 해외여행도 취급하는 회사였어.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바다를 건너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택시를 타면 가지 못할 곳이 거의 없다. 처음 두편의 영화를 모두 장거리 택시 타고 다니는 이야기로 만든 진정한 택시 마니아 김태식 감독은 <도쿄 택시> 이전 영화인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에선 택시 타고 낙산에 간다. 택시비만 있으면 갑자기 바다를 보러 가자, 할 수 있는 건가! 그런 거 해보고 싶었는데! 면허도 없고 자전거도 탈 줄 몰라 이동 수단이라고는 두 다리뿐인 부끄러운 어른으로서 신세계가 열리는 기분이었으나… 아, 나 저거 해봤구나. 술 마시다 막차 놓쳐서 두당 2만원에 승객 모집하는 총알택시 타고 전주까지 내려가다가 겁에 질려서 2만원 내고 여관 갈걸 그랬다며 울었지. (그런 트라우마를 얻은 사람이 많은 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영화가 태어났고 보지 말았어야 할 영화를 보았으니,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을 <공포택시>다. 혹시 궁금해지더라도 절대 보지 마라.)

그처럼 험한 택시의 세계에서 진정한 택시 운전사의 도(道)를 구현하는 이가 있다면 <다윈으로 가는 마지막 택시>의 택시 기사 렉스가 아닐까 싶다. 수분을 보충해야 한다는 의사의 충고에 물 대신 열심히 맥주를 챙기는 이 ‘내 타입의 남자’는 암에 걸리자 존엄사가 허용된 호주 북부 다윈까지 대엿새를 운전하기로 한다. 외국은 땅덩이가 커서 비행기가 비싸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죽으러 가는 거 시원하게 현금 서비스 받으면 될 텐데, 택시와 더불어 살았으니 택시와 더불어 죽겠노라인가. 심지어 도중에 동행이 생겨도 뒷자리에 태운다. 나는 차가운 도시의 택시 기사, 댁을 뭘 믿고 조수석을 내주겠어. 하지만 뒷자리에 태운다고 안전한 건 아니다. <콜래트럴>에서 기사와 승객 사이에 안전판이 있는 범죄의 도시 LA의 택시 기사 맥스(제이미 폭스)는 뒷자리에서 총 들고 있는 승객(톰 크루즈) 덕분에 시체 치우고 전복 사고 당하고 체포되고 지하철을 달리던 끝에… 여자가 생긴다, 경축.

<다윈으로 가는 마지막 택시>

그러므로 택시 기사라고 해서 체력 단련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대륙의 기상을 품고 연변에서 택시를 몰던 <황해>의 구남(하정우)을 보면 안다. 파리의 택시 운전사는 지점과 지점 사이의 최단 거리를 예측하는 내비게이션 베타 테스트 수준의 시험을 본다던데(<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참고), 연변에선 서바이벌 테스트라도 보는 건가. 전생 빨치산급의 독도법과 행군력을 시전하면서 구글 맵도 아니고 종이 지도만 보고는 순식간에 산 정상에 도달하더니 과연 빨치산스럽게 감자도 훔쳐 먹고 반도의 중심을 향해 진군하는 패기를 보여준다.

미래란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가진다고 하니(아, 이거 지난번에 써먹은 건데) 택시 기사도 차만 믿지 말고 가끔은 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동차 핸들에 지박령처럼 들러붙어 앉아만 지낸 나머지 키 170㎝에 몸무게 60㎏인데도 복부 비만을 짊어진 내 친구(성별 남성)처럼 된다. 인간이 호모에렉투스라 불리는 건 직립하기 때문이거늘.

<화려한 휴가>의 택시 기사 민우(김상경)도 그 따위 앉아만 있는 복부 비만형 인간이었다면 공수부대에 잡혀가다 말고 트럭 위에서 육탄전을 벌여 탈출한 다음 개천을 헤치고 탈출하는 과업을 달성하진 못했겠지.

그리고 10년 가까이 흐른 지금 광주항쟁이 배경인 영화 <택시운전사>가 제작된다고 한다. <화려한 휴가>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저런 일을 27년 동안 기억하며 산다는 건, 그 사람이 무사한 것을 27년 동안 지켜보며 산다는 건 어떤 일일까. 그리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로 9년이 흘렀고, 나는 내년이면 생각할 것이다, 저런 일을 37년 동안 기억하며 산다는 건, 그 사람이 무사한 것을 37년 동안 지켜보며 산다는 건 어떤 일일까.

기사식당이라면 역시 고기

택시 기사라서 행복한 두세 가지 것들

<황해>

나는 먹는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 근처에는 인기 있는 기사식당이 두어 군데 있었다. 나는 20대 팔팔한 남자아이들과 지내던 대학 시절 이후, 그렇게 빨리 먹고 그렇게 맛있게 먹는 사람들은 거기서 처음 봤다. 그리고 돼지불백은 반찬과 함께 볶아 먹어야 한다는 걸 거기서 알았다(매우 맛있음, 부추 무침 필수). 그러니까 <황해>의 구남은 리얼리즘의 결정체라고나 할까, 그렇게 한방에 욱여넣을 줄 알아야 어엿한 택시 기사, 그리고 기사식당이라면 역시 고기, 아, 고기가 먹고 싶다….

<컨스피러시>

나는 본다

애인과 싸우고 택시를 잡아탔는데, 택시가 정차했던 10초 남짓한 순간, 기사는 그의 모든 것을 파악했다. 아가씨, 그런 남자는 만나면 안 돼, 나이가 한참 많지? (그렇긴 합니다만) 시커먼 게 안색도 별로고 (지금 밤 열두시가 넘었는데 그게 보이나요, 바로 뒤에 있는 제 얼굴도 안 보일 텐데요) 아가씨한테 무슨 술을 이렇게 퍼먹여서 (제가 좋아서 말려도 퍼먹었는데요) 돈도 없게 생겼더구먼 (한밤중에 그게 보이냐고요. 그것도 그렇지만, 정곡을 찔리다니 분하다) 아가씨, 지금 우나? (졸려서 하품했어요) 앉아서 천리를 본다고 우기는 <컨스피러시>의 택시 기사 제리(멜 깁슨)가 유별난 게 아니다. 근데 아저씨, 그날 돼지갈비 먹은 거 몽땅 토해서 미안했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을 거예요, 택시에서 토한 건 그게 유일하긴 했지만.

<도쿄 택시>

나는 태운다

<도쿄 택시>의 택시 기사는 승차 거부를 하지 않는다는 신념 때문에(그리고 이삿짐 싸기 귀찮아서 마누라한테 떠맡기려고) 도쿄에서 서울까지 택시를 타고 달린다. 재일 조선인의 성공 신화로 유명한 일본 MK 택시의 유봉식 회장은 이런 경영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내가 섬기는 신은 곧 손님이며 고객은 바로 법이다. 재산이란 금전이 아니라 고객이며 회사 직원이다.” 하지만 일단 금전을 지불해야 고객이지. <도쿄 택시>는 끝내 택시비를 밝히지 않지만, 객기 넘치는 두 미국인을 LA에서 뉴욕까지 태운 택시 기사 말하기를, 미터기 꺾었으면 1800만원 나왔을 거라고. 참고로 LA에서 뉴욕까지 일등석 비행기 티켓은 대충 370만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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