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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행복이 가득한 집
김혜리 2016-07-13

※<비밀은 없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엔 읽지 마십시오.

<비밀은 없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효신과 시은에게 학교 옥상과 교환일기가 있었다면, <비밀은 없다>의 민진(신지훈)과 미옥(김소희)에게는 아지트와 2인조 밴드가 있다. 이경미 감독과 홍주희 미술감독이 꾸민 두 소녀의 공간에는 잡동사니와 사금파리들이 모여 발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빈방을 즐겨 찍는 사진가 베르나르 포콩의 작품 같기도 하다. 이곳을 민진과 미옥의 진짜 ‘집’으로 간주한 이경미 감독은, 편집으로 잘려나갔지만 냉장고와 밥솥도 들여놓았다고 한다. “냉장고를 열면 만화책과 굽 높은 구두, 색조 화장품이 들어 있고, 밥솥 안에는 술병과 담배와 초콜릿이 있었어요.” 어른들의 서사 속에서도 아이들의 조촐한 세계를 안전히 지켜주고 싶은 작가와 감독의 의지가 공간으로 형상을 갖춘 셈이다.

06/24

영국인들이 EU 탈퇴를 국민투표로 결정한 오늘, 공교롭게도 같은 나라의 여성 참정권 투쟁을 다룬 <서프러제트>에 대해 관객과 이야기하는 행사가 있었다. 뭐, 브렉시트나 <서프러제트>나 ‘투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두루뭉술 공유하긴 한다. <서프러제트>가 재현한 100년 전 영국 사회에서 여성들은 참정권은 물론 교육권, 자녀 양육권에서 차별받고, 남성 노동자보다 적은 임금으로 더 오래 일하고, 가정과 직장에서 성추행을 포함한 폭력에 흔히 노출된다. 영화 도입부에 제시되는 여성 참정권 불허의 근거는 ‘여성은 정치적 판단력과 객관성, 균형감각을 (선천적으로) 결여하고 있다’는 전제다. 그리고 이어지는 에피소드들은 당시 남성들이 개인마다 온정적 태도의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기본적으로 ‘성인 여성은 1인의 온전한 시민이 아니다’라는 암묵적 합의를 보여준다. 노동계급 여성들이 물리적으로 혹독한 차별에 매일 시달린다면, 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상류층 여성은 “참아주는 데도 한계가 있지!”라는 점잖은 남편의 호통을 들으며 미아처럼 손목 잡혀 집으로 끌려간다. 한편 극중에서 거리에 운집한 여성 시민들을 거칠게 진압하던 경찰들은 돌아서며 이렇게 말한다. “야, 그만 내버려두자. 저러고 집에 가면 각자 남편들이 알아서 벌을 주겠지.” 여성 시민을 성인으로서 자결권이 없는 미성년자로 취급하는 것이다. <서프러제트> 속 남성 캐릭터 가운데 현대 관객인 내게 가장 위협적이었던 인물은 성추행을 일삼는 악덕 공장주가 아니라, 주인공 모드(캐리 멀리건)의 온화한 남편 소니(벤 휘쇼)였다. 아내와 같은 세탁공장에서 일하는 동료 노동자인 그는 아내를 사랑한다고 믿지만, 퇴근 후 어린 아들을 거두는 일은 전적으로 모드의 몫이다. 시위 현장에 휩쓸려 유치장에서 종일 고초를 겪다 돌아온 밤에도 모드는 “식사는 했어요? 홍차 끓일까요?”라고 미동 없이 앉아 있는 남편에게 묻는다. 이에 소니는 아내의 안부를 묻는 대신 다시는 자기를 수치스럽게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모드가 참정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할 즈음 소니가 무심코 던지는 질문은 영화를 통틀어 가장 소름 끼치는 대사다. “투표권? 당신이 투표권을 가져서 뭘 하려고?” 깜짝 놀란 모드는 대답한다. “뭘 하긴? 투표를 하지. 당신처럼.” <서프러제트>의 이런 장면들은 더이상 시대극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늘도 페미니즘이 문명사회의 기본 아이디어일 뿐임을 주변에 이해시키려고 애쓰는 여성들을 제일 깊이 좌절시키는 벽은, 다른 주제로는 원활한 대화가 가능했던 남성 친구, 가족 구성원, 동료들의 차별주의를 내장한 ‘천진난만한’ 반문이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서프러제트>의 활동가들이 미디어에 목소리를 반영시키기 위해 때로는 목숨을 던지고, 남성들이 장악한 통신 시설을 타격했던 데에는 실질적, 상징적 이유가 있다. 여성들은 먼저 편향에서 언어를 건져내고 정련해야 한다.

06/26

오래된 취재수첩을 꺼내보았다. 봉준호 감독은 <마더>(2009) 후반작업 당시 인터뷰에서, 생물학적 가족 구성 안에서 모자 관계가 갖는 원초적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가족 내에 형성되는 네벌의 관계- 모자, 부녀, 모녀, 부자- 중 두 세트가 이성의 조합인데, 부녀 관계는 아버지에게서 나온 정자로 매개되니까 어딘가 간접적인 반면 엄마는 아들과 몸 안에서 본디 합쳐져 있었던, 신체적으로 독보적인 관계다. 섹스가 페니스가 자궁으로 들어오는 행위라면, 모자 관계에서는 아들의 몸 전체가 엄마의 몸 안에 있었던 것이다.” <마더>가 모성 멜로 혹은 스릴러의 외피를 쓰고, 가장 지독하고 눅진한 인간과 인간의 연(緣)으로서 모자 관계를 해부한 영화라면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는 자녀 실종 미스터리의 표면 아래에서 특수한 인간관계로서 모녀 사이의 ‘비련’을 쓴다. 이를테면 모성 멜로가 아니라 그냥 멜로에 가깝다. 학교의 왕따였던 민진(신지훈)은 아빠에게 속고 있는 ‘멍청하고’ 가련한 엄마와 단 한명의 친구 미옥이 애써 살아가는 목적의 전부였지만 겉으로는 빙글빙글 웃고만 있었다. 연홍(손예진)은 여느 엄마처럼 딸을 당연히 사랑한 나머지 그 사랑에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고 민진에 대해서는 더욱 몰랐다. 엄마 연홍과 딸 민진의 사랑이 비련인 까닭은 둘의 감정이 영화에서 한번도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도입부에 나오는 귀가 시간에 대한 관습적인 대화, 성적표를 둘러싼 역시 전형적인 상황의 플래시백을 제외하면 관객은 이 모녀의 ‘스킨십’을 목격할 기회가 없다. 사라진 딸과 범인을 찾아 나선 연홍의 추리가 진전되면서 사건 경위와 더불어 감정의 진상이 드러난다. 그러나 연홍은 애통하게도 영화 내내 한발 늦게 도착한다.

이메일 인터뷰에 응한 이경미 감독은, 딸 입장에서 바라보는 모녀 관계의 중요한 특징을 강력하고 불가피한 동일시로 꼽았다. 가부장 사회에서 딸은 엄마처럼 살까봐 염려하는 동시에 엄마를 보호하고자 한다. 이것은 모자, 부자, 부녀 관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수평적인 애정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민진과 단짝 미옥의 우정, 그리고 민진과 연홍의 모녀 관계가 이 영화에서 그리는 평행선은 그림이 된다. 언제나 형사들보다 한발 늦게 증인들을 찾아가는 서투른 초짜 탐정 연홍이 결정적인 증인 미옥과 커넥션을 맺고 궁극적으로 진상에 먼저 도달하는 이유도 두 인물이 같은 삼각형의 꼭지점이라서다. 중학생 딸을 둔 엄마로서는 과하게 젊어 보이는 손예진 배우의 캐스팅도 통상 모성 드라마와는 다른 모녀 관계의 톤에 기여한다고 볼 수 있다(이경미 감독은 “연홍은 영화 마지막에 도달해서야 처음으로 엄마 같아요” 라고 덧붙였다). 두쌍의 관계가 민진에게 동등한 의미와 무게임을, 이경미 감독은 두 소녀의 거짓말을 통해 꼼꼼히 암시한다. 우선 민진이 거짓으로 꾸며낸 가상의 모범생 친구 자혜는 엄마 연홍의 학창 시절을 <유주얼 서스펙트>의 카이저 소제 스타일로 재구성한 결과다. 한편, 수사가 시작된 후에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친구의 복수를 하려고 결심한 미옥은, 연홍이 지켜보는 최면술 취조 장면에서 민진을 데려간 여자에 관해 거짓으로 묘사한다. 최면에 걸린 척하는 미옥이 언급하는 자동차의 색, 용의자의 외모, 민진이 가수가 되려고 서울에 가고 싶어 했다는 이야기는 모두 민진에게 들은 연홍의 파편들이며, 머리를 한묶음으로 묶었다는 외모의 특징은 관련된 다른 여성 인물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요컨대 의식과 무의식의 수프 안에서 세 사람은 따로 또 같이 자맥질한다. 이경미 감독은 해당 최면 신의 큰 목표가, 극중에서 이미 사라진 민진의 존재감을 관객에게 환기하는 데에 있었다고 말한다. 과연, 민진은 이 영화의 모든 운동을 가동하는 제1자이며 일찍 퇴장해 까마득히 보이지 않지만 <비밀은 없다>의 소실점이다. 그렇다면 부재하는 민진을 통해 이어진 새로운 짝 연홍과 미옥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끝내 만나지 않은 모녀처럼 두 여자 역시 팀을 이루어 직접적으로 공조하지는 않는다. 서로가 모르는 사이, 같은 방향으로 기어갈 따름이다. 이를 표시하는 엠블럼처럼, <비밀은 없다>에는 미옥과 연홍이 각기 수풀이 우거진 공터를 잡은 롱숏에서 프레임 왼쪽으로 빠져나갔다가 다시 화면 안으로 들어오는, 한쌍을 이루는 숏이 있다. 이경미 감독은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덧붙여 알려주었다. 충격적인 나머지 에필로그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의견에 밀려 수정됐지만, 원래는 최종 클라이맥스에서 연홍과 미옥은 따로 각자의 길을 완수한다. 연홍이 길바닥에 종찬을 두고 떠난 다음, 미옥이 홀연히 나타나는 것이다. <비밀은 없다> 서사의 구성에 비추어보면 아귀가 들어맞는 전개이고 만약 감독판이 존재한다면 응당 포함될 만한 신이다.

06/27

그렇다면 엄마인 연홍의 자리에서 보면 <비밀은 없다>는 어떤 이야기일까? <마더>의 도준 엄마(김혜자)와 마찬가지로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빗발과 수풀을 헤치며 휘적휘적 뛰어다니고, 매달린다. 그런데 이 강렬한 모성애의 발로로 보이는 활극을 통해 <비밀은 없다>는, 민진의 엄마이기 이전에 김연홍이라는 여자가 어떤 인간인지 퍼스낼리티를 양파처럼 한겹씩 벗겨나간다. 선거 캠프원들을 위해 새벽부터 거한 밥상을 차려내고 캠페인송에 맞춰 율동을 하는 연홍은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 남성 정치인의 현모양처 몰드에 딱 들어맞는 세속적인 미인이다. 그런데 딸의 실종이 그녀를 충격하자 껍질이 부서져내린다. 사건에 대한 남편과 보좌역들의 대응에 도저히 동조하고 앉아 있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연홍이 살아오면서 쌓아온 성격의 지층들이 하나씩 불거져 나온다. 아이가 사라진 마당에도 남편의 선거본부원들과 경찰이 자신의 고향이 전라도라는 사실에 먼저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을 본 연홍은 고향 친구와 호남 사투리로 통화하며 과거의 태도를 되찾는다. 꽤 오랜 연애 끝에 결혼한 것으로 짐작되는 남편과 단둘이 있는 장면에서는, 영부인의 꿈을 안고 엘리트와 결혼하기까지 그녀를 지탱했을 법한 강단이 드러난다. 딸의 장례에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나타나는 순간부터는 그냥 폭주다. 동기는 모성이되 엄마의 역할을 통해 역할 너머에 본래 존재했던 가차없는 인간, 비굴한 척 숙이고 있었던 단호하고 집요한 심성이 솟구친다. <비밀은 없다>가 관객에게 버겁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사건과 인물이 동시에 껍질을 벗는 과정을 따라가야 하는 부담일 것이다. 여기서 이경미 감독의 답장을 인용해보자. “<비밀은 없다>의 이야기에 제가 사회를 살면서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다 생각한 모든 편견을 다 넣었어요. 연홍 역시 적당한 편견과 부조리, 아이러니를 가진 모순적 인간인데 아이가 사라짐으로써 (자신도 일조한) 이 모든 것들과 비로소 맞닥뜨리게 되고 끝내 그것들을 극복해서 마침내 진실에 도달하기를 바랐어요.”

06/28

내가 이해한 <비밀은 없다>는 악의 근원을 지목하거나, 특정 남성 인물형 혹은 남성 지배적 문화를 비판하려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 아닌 영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경미 감독과 공동 작가들은 남성 인물이나 그들의 문화가 정색하고 자세히 다룰 만큼 흥미롭다고 여기지 않는 듯하다. 이 영화에서 남성 인물들의 행태는 다분히 스테레오타입인 반면 성의껏 그려진 부덕이나 천박함, 어리석음은 모두 여성 캐릭터들의 것이다. 미술교사 손소라는 협박자의 정체를 연인에게 알리지 않음으로써 비극의 불씨를 제공하고, 민진은 아빠에게 직접 맞서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 연홍은 갑자기 성적이 오른 딸을 석연치 않아 하면서도 내막을 알려들지 않았고 미옥도 오판을 했다. 나아가 이경미 감독은 영화에서 관객이 동조해야 할 여성 인물들의 언행을 전혀 세탁하지 않는다. 엄마는 딸을 가리켜 자신을 닮아 공부머리가 없고 “똥구멍이 보이게 스커트를 짧게 입는다”고 막말을 한다. 손소라 선생은 결정적 혐의를 피하는 방편으로 보통 영화라면 그 자체로 하나의 터부일 레즈비어니즘 암시를 동원하기도 한다(“민진이가 좋아서 그랬어요”). 유괴 스릴러의 전개를 기대한 관객이 멀미를 호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끝으로 <비밀은 없다>가 인상적인 이유는 미스터리 스릴러에 따라오는 공포와 불안, 인물의 연상 작용을 표현하는 감각에 있다. 연홍이 딸의 이메일 계정을 뚫기 위해 밤을 새우다가 손목을 푸는 동작, 정신을 차리기 위해 연홍이 브러시로 정수리를 두드리는 이미지, 휴대폰의 암호 패턴을 풀기 위한 미옥의 히스테리컬한 손동작, 경찰의 무능에 분노한 연홍이 화이트보드를 발로 짓이기는 소음은 전에 맛본 적 없는 촉각적 흥분과 긴장을 전한다. 이 감수성과 과단성이 여성으로서 감독의 젠더와 필연적인 관련이 있을까? 일부는 그렇겠지만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보다는 세계를 재현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비전의 확고함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내 머리를 땋아줘. 내 마음을 안아줘.” 민진의 노트에 적힌 이 구절을 듣다가 나는 핑그르르 머리칼 사이에 손가락을 넣고 말았다. 서늘하고도 따뜻했다.

좋 아 요

<굿바이 싱글>

어바웃 어 걸

워킹 타이틀의 <어바웃 어 보이>가 그랬듯, <굿바이 싱글>은 철이 덜 든 부유한 독신자가 나이는 어려도 현실을 터득한 친구를 만나 서로의 빈 곳을 채우고 잠재력을 일깨우는 동성 로맨틱 코미디다. 김혜수가 연기한 스타 고주연은 실수를 반복하는 천방지축으로 보이지만, 아기를 얻고자 10대 미혼모 단지(김현수)의 보호자 역을 맡게 되면서 미덕과 장점을 드러낸다. 둘의 계획이 전개되면서 영화는 연예계에서 꿋꿋이 살아남은 고주연의 저력이 행운이 아니라 곧은 심지와 맑은 성정에서 비롯됐음을 넉넉히 보여준다. 그녀는 입양 계획을 세우기 전인데도 산부인과에서 눈총 받는 소녀를 박력 있게 당겨 안으며 변호한다. 9시 뉴스에서는 본인의 결단을 근사하게 설명하는 데에 실패하지만, 단지를 변호해줄 목소리가 아쉬울 때에는 비록 감상적일지언정 필생의 스피치를 감행한다. 한층 섬세해진 코믹 타이밍으로 돌아온 <굿바이 싱글>의 김혜수는 필러로 퉁퉁 부은 입술로도, 민낯으로도 눈부시다. “이 훌륭한 유전자를 세상에 남겨야지!” 영화 초반 고주연의 대사에 백배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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